- 2026-07-13목요일에 온다
무너미 사람들은 비 오는 밤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벨은 꼭 한 번 울고 끊긴다. 그러면 마을의 불이 하나씩 죽는다. 사람들은 불을 끄고 이불 속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아침이 오면 맨 먼저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 문짝부터 본다.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쌀…
- 2026-07-12열두 번째 밤
※ 다음은 폐업한 시골 고시원 건물의 철거를 앞두고, 옛 세입자 실종 건을 알아보던 기록팀이 받은 녹취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제보자는 자신을 그곳 총무라 밝혔다. 녹취 시각은 밤 열한 시 사십 분. ─ 냄새부터 물으셨죠. 그래요, 그 냄새. 비 온 뒤에 흙이 부풀면 마당 쪽에서 …
- 2026-07-11야간조 명단
복도 끝 7호실에 사내가 든 것은 시월 첫 월요일이었다. 노파는 숙박부에 이름을 받았다. 이진우. 서른여덟. 직업란에는 경비라고 적혀 있었다. 사내에게서는 장거리 버스 냄새가 났다. 방향제와 발밑에 밴 기름때가 섞인, 오래 앉아 온 사람의 냄새였다. 노파는 방값을 월 단위로 계산해 주…
- 2026-07-10젖은 손
객사 골방의 등잔이 두 번 꺼지는 동안 나는 붓을 들지 못했다. 주인에게 종이를 청한 것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적어 두기 위해서였다. 김수동. 여든두 해를 그렇게 불렸으니 틀림없는 내 이름이겠지. 그런데 오늘 밤은 자꾸 그것이 남의 옷처럼 헐겁다. 홍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아홉 …
- 2026-07-09독자 제위께
[전사자 부기 — 아래는 병인년 여름 경성신문사 사회부 기자 백승하의 속기첩을 옮긴 것이다. 속기첩은 이듬해 봄 전라북도의 한 논 물꼬에서 건져진다. 물에 잠겼던 물건이 어떻게 낱장 하나 번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속기 제일호. 병인년 유월 초열흘 밤. 장마가 초입이다. 편집…
- 2026-07-08입력한 적 없는 이름
먼저 밝혀 두거니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시킨 일을 했고 시키는 대로 지웠으며, 지우라기에 지운 일을 두고 삼십 년이 지났는지 사십 년이 다 되어 가는지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는 입들이 있다기에, 장롱 밑에서 낡은 서류 몇 장을 꺼내어 같이 부친다. 읽어 보면 알 것이다. 잘못은 …
- 2026-07-07마모 일지
장마가 들 무렵의 한내 지하보도에서는 물비린내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도로 밑으로 스물몇 계단을 내려가면 셔터 내린 구둣방과 열쇠 가게가 마주 보고 늘어선 좁은 복도가 나오는데, 콘크리트가 겨우내 머금었던 물을 도로 뱉어 내는 냄새와 곰팡내, 구석 어딘가에 오래 밴 지린내가 형광등 불빛…
- 2026-07-06먼저 온 일기
3월 2일 (월) 정림빌라 관리실 열쇠를 받은 첫날이다. 계단은 나선형이라 3층까지 오르는 동안 숫자를 두 번 헷갈렸다.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다고 부동산 아저씨가 말했는데, 복도 벽지 무늬로 보면 그보다 백 년은 더 된 것 같다. 벽지 밑으로 물이 스며 나온 자국이 지도처럼 퍼져…
- 2026-07-05수화기에서 흙냄새가 났다
이 서랍을 여는 사람은 나 다음으로 초소를 물려받은 상병일 것이다. 그러니 인수인계라고 여기고 읽어라. 총기함 열쇠, 조명탄, 야간 암구호. 그런 것들은 주번사관이 알려 줄 테니 빼겠다. 아무도 대장에 적어 두지 않은 것 하나만 내가 남긴다. 저 전화기에서는 흙냄새가 난다. 처음엔 …
- 2026-07-04대출 가능
다음은 지난달 서비스를 종료한 도시탐험 카페 '도시의 뼈' 게시판에서 '청안고시텔'로 검색하면 나오던 글 전부다. 게시판이 보여 주던 순서 그대로, 최신 글부터 옮긴다. ――― [공지] 청안고시텔 관련 게시물 안내 작성자: 운영진 | 2026.07.01 | 조회 41,203 해당 건…
- 2026-07-03이 방송은 녹음이 아닙니다
(시그널 음악 — 낮게 깔린 신시사이저. 자정을 한참 넘긴 정적.) 진행자[방송]: 새벽 세 시입니다. 〈세 시의 방〉, 한이경입니다. 진행자[방송]: 오늘도 여기 있습니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십이 년째, 이 시간, 이 방. 진행자[방송]: 밖은 겨울이라던데. 저는 모르겠어요…
- 2026-07-02이웃
[유족동반단말 회수 조사 녹취록] 사건번호 2041-대-0417 대상 기기: 생활동반형 추모단말 〈이웃〉 3세대 회수 사유: 전원 차단 불능, 미등록 발화 반복 진술인: 기기 사용자. 고(故) 정우섭의 배우자. 일흔하나. 조사자: 사고이력관리단 회수 담당관(사람). 진술인 자택을 방문…
- 2026-07-01하차벨
다음은 잡지 『심야 노선』 창간 준비 취재 중 나눈 대화를 녹음해 옮긴 것이다. 상대는 시내버스를 서른한 해 몰고 올봄 퇴직한 예순셋의 전직 기사다. 요청에 따라 이름과 노선 번호, 회사명은 지웠다. 기록자의 말과 기록은 그대로 적는다. [기록자 주. 기사의 반지하 원룸에서 녹음함. …
- 2026-06-30명찰 자리
새벽 세 시에 깼다. 왼쪽 발목이 가려웠다. 복사뼈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위. 어제는 오른쪽 무릎 뒤였고, 그저께는 왼쪽 손등이었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그 자리를 짚어 보았다. 부어오른 데도, 물린 자국도 없다. 피부는 매끈하고 서늘했다. 긁으면 가라앉는다. 삼십 초쯤 지나면 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