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조 명단

복도 끝 7호실에 사내가 든 것은 2026년 시월 첫 월요일이었다.

노파는 숙박부를 돌려 이름을 받았다. 이진우. 서른. 직업란에는 경비라고 적혔다. 이름을 읽고 얼굴을 다시 보니 눈매가 정순임과 같았다. 불편한 말을 하기 전에 윗입술을 한 번 훔치는 버릇까지 그랬다. 노파는 숙박부만 내려다보았다. 사내에게서는 장거리 버스 냄새가 났다. 방향제와 발밑의 기름때, 비닐 좌석에 오래 등을 붙이고 온 사람의 냄새였다.

“방값은 달로 받아요. 먼저 내고.”

사내는 군말 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1만 원짜리가 날짜별로 반듯하게 묶여 있었다. 노파는 돈을 세고 난 뒤 묶는 고무줄이 삭은 것을 보고 새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중 넉 장은 전기요금 고지서에 끼우고, 다섯 장은 보일러 기름 외상 장부에 끼웠다. 장기 손님이 흔치 않은 때였다. 명진여관은 방이 아홉이었고, 손님이 든 방은 이제 7호실 하나였다.

여관 뒤에는 삼화봉제 공장이 있었다. 부도가 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철문에 붙은 철거 예정 공고문은 지난 장마에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사내는 그 공장의 야간 경비로 왔다고 했다. 철거 전에 고철을 빼 가는 사람이 있어 밤마다 순찰을 돈다고 했다.

“저 안에 훔칠 게 남았나.”

노파가 혼잣말처럼 묻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도 지키는 게 경비 일이죠.”

노파는 7호실 열쇠를 주었다. 그 방은 복도 끝이라 조용했고 창이 남향이었다. 장롱 뒤 벽지가 조금 들떠 있었지만 볕이 잘 들면 그런 흠은 가려졌다.

사내는 저녁 7시에 나가 아침 6시에 돌아왔다. 처음 며칠은 방에서 잠만 잤다.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면도기에서 털을 털어 휴지에 싸 버렸다. 복도 세면대에 남의 수염을 흘려 두는 손님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노파는 마음이 놓였다.

돌아온 사내의 옷에서는 기름 냄새가 났다. 미싱기름과 다림질대의 증기, 눅눅한 원단 냄새. 노파는 그 냄새를 안다. 멈춘 공장에서 날 수 없는 냄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작업복을 세탁기에 넣을 때 주머니만 확인했다. 나사못 하나와, 박하사탕 껍질과, 한 번도 쓰지 않은 목장갑이 나왔다.

닷새째 아침에는 부엌 형광등이 나갔다. 노파가 의자를 가져오자 사내가 대신 올라갔다. 형광등 문제가 아니라 소켓이 삭았다며 공구를 가지러 갔다가, 전선을 잘라 잇고 검은 테이프를 감았다. 불이 들어오자 노파는 전기세가 더 나오겠다고 투덜거렸다. 사내는 의자에서 내려와 손등의 먼지를 털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그 말씀을 하십니까.”

“방값에 불도 포함됐으니 내가 고마울 건 없지.”

사내가 웃었다. 그 뒤부터 싱크대 위 찬장 문이 비뚤어진 것이나 마당 수돗물이 새는 것을 보면 말없이 고쳤다. 노파는 수리비를 깎아 주지 않았고, 사내도 깎아 달라 하지 않았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그 정도가 편했다.

스무 해 넘게 전에는 그 복도에 빨랫줄이 세 줄이었다.

삼화봉제가 여공 육백 명을 쓰던 때였다. 기숙사에서 넘친 처녀들이 명진여관에 세 들었다. 아홉 방에 열여덟 명. 아침이면 세면대 차례를 놓고 싸웠고, 쉬는 일요일에는 삶은 달걀 껍데기와 머리핀과 귤 봉지가 마루에 굴러다녔다. 누군가는 노파를 아주머니라 불렀고 누군가는 사모님이라 불렀다. 노파는 사모님 쪽이 좋았지만 고쳐 부르게 하지는 않았다.

야간조 아이들은 저녁 7시에 우르르 나가 아침 6시에 돌아왔다. 머리카락에는 미싱기름과 눅눅한 원단 냄새가 밴 채였다. 그 냄새가 문간에 먼저 닿으면 노파는 국에 물을 조금 더 부었다. 배고픈 애들은 짠 줄도 모르고 한 그릇씩 비웠다.

7호실은 정순임과 김미자가 썼다. 순임에게는 친정에 맡긴 세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월급날이면 우체국부터 다녀왔다. 미자는 적금을 부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지만, 잔액이 늘어난 날에는 시장에서 제일 작은 크림빵을 두 개 사 왔다. 하나는 순임에게 주고 하나는 베개 밑에 뒀다가 다음 날 먹었다. 부스러기 때문에 개미가 꼬인다고 노파가 잔소리를 하면 미자는 입을 다문 채 베개만 털었다.

둘은 쉬는 일요일마다 시내 돈가스집에 갔다. 돌아와서는 소스가 너무 달았다느니, 양배추를 산처럼 줬다느니 하면서도 다음 쉬는 날이면 또 갔다. 노파는 그 아이들을 예뻐했다. 그래서 미자가 사라진 뒤에도 미자의 베개를 석 달 동안 버리지 못했다.

그 시절 노파에게는 외상 장부가 따로 있었다. 월급날 전날이면 담배 한 갑, 비누 한 장, 버스비 500원 같은 것이 이름 아래 줄줄이 달렸다. 순임은 자기 외상보다 아이에게 부친 돈을 먼저 적었고, 미자는 남의 장부를 흘겨보지 않았다. 금요일 밤에는 열여덟 명이 한꺼번에 라면을 끓여 달라고 해 부엌이 엉망이 됐다. 누구는 달걀을 풀고 누구는 안 풀어서 냄비 손잡이에 고무줄을 묶어 구별했다. 노파는 나중에 그 고무줄들을 버리지 못해 한동안 못 쓰는 숟가락과 함께 서랍에 넣어 두었다.

남편은 여공들이 떠드는 것을 싫어했지만 방세 받는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관리부에서 남은 원단을 가져와 방문 커튼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순임이 쓰던 7호실 커튼은 엉성한 해바라기 무늬였다. 노파는 남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고, 말이 적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내가 여관에 든 지 열흘째 되던 새벽, 공장 쪽에서 소리가 났다.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밟는 소리였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대가 박자를 조금씩 어긋내며 도는 소리. 노파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누워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있는 일이었다. 비가 오기 전에도 났고, 맑은 날에도 났다. 처음 몇 해는 함석지붕 탓을 했다. 그다음 몇 해는 죽은 영감이 남긴 빚을 계산하느라 들을 틈이 없었다. 요즘은 들리면 라디오를 켰다.

그날 아침 사내는 밥상 앞에 앉아 국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밤에 공장이 도는 때가 있습니까?”

“바람 불면 함석이 그래요.”

“바람 없었는데.”

노파는 사내 맞은편에 놓인 빈 밥공기를 치우려다 그냥 두었다. 혼자 먹으면 밥이 잘 안 넘어가 두 사람 몫 상을 차리는 버릇이 생긴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죽은 영감 것이었고, 어느 때부터는 누구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국 식겠소.”

사내는 더 묻지 않았다. 밥은 반 공기 남겼고 멸치볶음만 다 먹었다. 노파는 남은 밥을 점심에 물 말아 먹었다.

김미자가 없어진 것도 시월이었다. 1999년 시월.

야간조가 끝나고 다들 돌아왔는데 미자만 없었다. 순임은 탈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옆에 있었다고 했다. 작업복 바지에 묻은 파란 초크 가루도 봤고, 미자가 저녁에 크림빵을 사겠다고 한 말도 들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없었다.

회사는 첫날에는 무단결근, 사흘 뒤에는 자진 퇴사라고 했다. 시골 처녀가 도시 물이 들어 도망간 거라고 관리부장이 말했다. 관리부장은 노파의 남편이었다. 그는 미자가 최근 작업반장에게 대들었다는 말도 했다. 관리부에서는 미자의 사물함을 비우고 그 자리에 다음 주 들어올 사람 이름표를 붙였다.

미자의 적금통장은 7호실 서랍에 남아 있었다. 순임은 통장을 들고 사무실과 파출소를 오갔다. 도망갈 애가 돈을 두고 가느냐고, 미자는 이번 달 만기라고 했다. 노파는 저녁마다 순임 몫의 국을 데웠다. 남편에게는 그 통장 얘기를 한 번 했다.

“회사에서 알아서 해.”

남편은 그 말 뒤에 숟가락을 놓았다. 퇴근하고 밥 먹는 사람에게 공장 이야기를 계속 꺼내면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노파는 미자의 통장을 행주로 한 번 닦아 순임에게 돌려주었다. 그날은 거기서 끝났다.

그해 겨울까지 셋이 더 없어졌다. 박영선, 최금옥, 서정애. 전부 야간조였고, 작업장에 들어간 기록은 있는데 나온 기록이 없었다. 회사는 세 사람의 퇴사일을 서로 다른 달로 잡고 사직서를 따로 만들었다. 가족들은 각자 고향 경찰서에 신고했고, 삼화봉제의 같은 작업조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 사건 기록에 모이지 않았다. 여관에는 젊은 순경 한 명이 다녀갔다. 그는 마루에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요즘 여공들이 유흥업소로 많이 빠진다고 했다. 순임이 방에서 통장과 작업일지를 들고 나오자 노파의 남편이 먼저 받았다. 회사 물건이라고 했다. 순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날 밤 순임은 노파에게 아이 사진을 맡겼다. 비닐 지갑 속에서 세 살배기가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웃고 있었다.

“혹시 방 뒤질까 봐요.”

“별일 없을 거다.”

노파는 사진을 쌀독 밑에 넣었다. 어디에 감췄는지는 순임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돌려주면 될 일이었다.

현재의 시월, 사내는 낮에도 자주 밖에 나갔다. 면사무소와 도서관이 같은 방향이라 처음에는 어느 쪽에 가는지 몰랐다. 신문 축쇄본을 보고 온 날에는 손톱 밑에 검은 먼지가 끼었다. 노파는 사내의 작업복을 빨며 주머니에서 복사 영수증을 몇 번 발견했다. 1999년 지방면 기사 한 장에 백 원. 날짜가 갈수록 장수가 많아졌다.

어느 저녁, 사내가 밥상에서 물었다.

“할머니는 그때도 여기 계셨지요.”

“여관을 내가 지었는데 어디를 가.”

“정순임이라고 기억하십니까?”

노파는 국자를 냄비에 놓았다. 손잡이가 미끄러져 국물이 상 위에 한 방울 튀었다. 행주로 닦는 동안 대답을 고를 수 있었다.

“순임이란 이름이 흔했지.”

사내는 노파가 닦은 자리를 보았다.

“제 어머니입니다.”

서른이라고 적힌 나이는 순임의 아이와 맞았다. 노파는 이름을 아는 척하면 무엇부터 물을지 두려웠다. 순임이 맡긴 사진은 아직 쌀독 밑에 있었다. 쌀독은 몇 번 바뀌었는데 사진은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기 살았다는 것까진 확인했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그 뒤 기록이 없어요.”

노파는 밥공기를 사내 쪽으로 밀었다.

“식기 전에 먹어요.”

사내는 그날도 멸치만 집어 먹었다.

다음 날은 비가 왔다. 야간 순찰을 마치고도 잠이 오지 않는다며 사내가 마루에 앉아 장화를 말렸다. 노파가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동안 사내는 지붕에서 새는 물을 받는 양동이를 두 번 비웠다. 광고가 나올 때 노파가 물었다.

“외할머니가 키웠소?”

“네.”

“순임이는 편지 안 했대?”

“공장 들어온 첫해까진요. 그 뒤엔 돈만 왔답니다. 몇 달 오다가 끊겼고요.”

사내는 장화 속에 신문지를 구겨 넣었다. 외할머니는 식탁에 딸 몫 수저를 십 년 넘게 놓아두면서도, 손자에게는 네 어미가 다른 남자를 만나 너를 버린 거라고 말했다. 사내도 오래 그 말을 믿었다. 외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 유품 상자에서 순임의 마지막 송금표와 여관 주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경비 일은 어떻게 알고 왔소?”

“공장 철거 맡은 업체에 제가 먼저 연락했습니다. 야간에 사람 필요하면 쓰라고요.”

그는 원래 아파트 설비 기사였다. 휴가를 한 달 냈다고 했다. 노파가 형광등을 고친 솜씨를 칭찬하자 사내는,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고 웃었다. 연속극이 다시 시작돼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극 중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보증을 선 사연이 끝날 때까지 양동이에 물 떨어지는 소리만 섞였다.

스무 해 넘게 전, 야간조가 없는 날에도 순임의 방에는 새벽까지 불이 켜졌다. 노파는 전기료가 걱정돼 문을 두드리러 갔다가 문틈으로 순임을 보았다. 순임은 장롱을 밀고 벽지 한 귀퉁이를 들춘 채, 시멘트에 볼펜으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종이에 쓰면 회사가 가져가고 수첩은 잃어버릴 수 있으니 벽에 남긴다고 했다.

노파는 다음 날 순임이 일 나간 사이 그 자리를 들춰 보았다.

김미자. 1999. 10. 7. 밤. 옆자리에 있다가 없어짐. 도망 아님.

박영선. 1999. 11. 2. 밤. 2번 라인. 도망 아님.

최금옥. 1999. 11. 30. 밤. 도망 아님.

서정애. 1999. 12. 24. 밤. 도망 아님.

시멘트에 눌러 쓴 글씨는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노파는 벽지를 도로 눌러 붙였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순임이 쫓겨날까 봐서였다. 그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해가 바뀌고 삼화봉제는 부도가 났다. 여공들은 밀린 월급을 못 받고 흩어졌다. 여관도 비었다. 순임만 7호실에 남았다. 받아야 할 돈이 있고 알아볼 것이 있다고 했다. 방세는 석 달 밀렸다. 노파는 한 번도 독촉하지 않다가, 네 달째 되던 날 순임의 방문 앞에 숙박부를 놓고 왔다. 거기에 밀린 액수를 적지 않았으니 독촉은 아니었다.

그해 봄 남편이 죽었다. 부도난 공장의 서류를 정리하러 밤에 들어갔다가 2번 라인 재봉틀 사이에서 발견됐다. 심장이라고 했다. 장례를 치르고 온 밤, 노파는 처음으로 재봉틀 소리를 제대로 셌다.

넷이었다.

순임이 없어진 것은 그다음 달이었다. 저녁에 공장에 알아볼 것이 있다며 나갔다. 노파는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문단속을 하고 가라고 했다. 순임은 대꾸 없이 골목을 건너갔다.

노파는 이레를 기다렸다. 7호실 문을 잠그지 못하고 매일 국 한 그릇을 들여놓았다가 다음 날 치웠다. 이레째 되던 밤에 장롱을 밀고 벽지를 들췄다. 순임이 쓰던 볼펜은 서랍 안에 있었다. 노파는 명단 아래에 한 줄을 보탰다.

정순임. 2000. 5. 19. 밤. 도망 아님.

볼펜을 떼자 공장 쪽에서 재봉틀 소리가 났다. 앞의 네 대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한 대가 더 돌았다. 노파는 순임의 이름을 쓴 일과 그 소리를 한동안 따로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현재의 시월 말, 사내가 벽지를 뜯었다.

마른 종이가 시멘트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옆방까지 났다. 노파는 라디오를 켰다가 곧 껐다. 벽 너머에서 장롱 끄는 소리, 손전등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한참 조용했다.

문이 열리고 사내가 노파의 방으로 건너왔다. 손가락에 벽지 풀이 하얗게 묻어 있었다.

“이거 누가 썼습니까?”

“옛날 애들이 낙서한 거요.”

“우리 어머니 이름이 있습니다.”

노파는 라디오 다이얼을 돌렸다. 어느 방송도 또렷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 위의 네 줄은 같은 글씨고, 어머니 이름은 다른 사람이 썼어요. 그 아래도 있어요. 열여섯 명. 전부 글씨가 달라요.”

사내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벽의 이름을 순서대로 베껴 놓은 것이었다. 2003년 고물상 남자, 2006년 화장품 외판원, 2011년 공사판을 전전하던 사내, 2015년 집을 나온 여자. 노파가 잊은 이름도 있었고 기억하는 이름도 있었다. 모두 7호실에 장기로 들었다가 어느 밤 나간 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 이름은 내가 썼소.”

“그 아래는요?”

노파는 라디오를 껐다.

순임 뒤 처음으로 7호실에 오래 묵은 사람은 고물상 남자였다. 공장 철문 안에서 누가 손짓한다고 사흘 밤을 떠들었다. 노파는 술을 끊으라고 했다. 넷째 밤 남자는 장롱 뒤 글씨를 봤다. 그리고 펜을 빌려 달라고 했다. 자기도 적어 두어야 저 사람들이 믿을 거라고, 아침에 파출소에 가져갈 거라고 했다. 노파가 펜을 주자 남자는 제 이름과 그날 날짜를 썼다. 밤에 공장으로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고물상 남자의 아들이 한 번 찾아왔다. 아버지가 또 빚을 피해 달아난 것 같다며 방에 남은 구두와 라디오를 가져갔다. 벽의 이름은 보여 주지 않았다. 이름을 보여 주면 노파가 펜을 준 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아들은 라디오의 건전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고, 구두는 신문지에 싸 달라고 했다. 노파는 두 겹으로 싸 주었다.

그다음 사람도 벽을 보았다. 그다음 사람도 먼저 공장 불빛을 봤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안에서 일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갚을 돈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노파는 병원에 가 보라고도 하고, 술을 그만 마시라고도 했다. 버스 시간을 적어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대개 펜을 달라고 했다.

두 번째부터 노파는 장롱을 벽에 끝까지 붙이지 않았다. 벽지에는 풀도 가장자리만 발랐다. 다시 바를 때마다 안쪽 글씨를 한 번씩 읽었다. 누가 오면 7호실을 주었다. 다른 방은 보일러가 먼저 고장 났고 그 방만 볕이 잘 들었다. 노파는 손님을 공장으로 데려간 적이 없었다. 떠나겠다는 사람에게는 막차 시간을 적어 주었다. 돌아오면 문을 열어 주었다. 검은 볼펜은 늘 문갑 위에 있었다.

화장품 외판원은 공장 2층에 불이 켜진 날이면 가방을 들고 철문 앞에 섰다. 야간에 일하는 여자들이면 물건을 살 거라고 했다. 노파는 저 공장에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외판원은 창마다 고개 숙인 여자들이 보인다고 했다. 그는 벽의 이름들을 본 뒤 자기 이름과 시간을 적고 물건값을 받으러 간다며 나갔다. 그날 밤에는 화장품 가방만 남았다. 노파는 비누와 크림을 몇 해에 걸쳐 썼고, 빈 병들은 마당 화단 가장자리에 세워 두었다. 겨울이면 병 안에 빗물이 얼어 금이 갔다.

집을 나온 여자는 사흘 동안 공장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이에게 전화할 때만 마당 끝으로 나갔다. 넷째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며 울다가 7호실 벽을 뜯었다. 명단 속에 아이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여자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공장에 가면 아이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노파는 파출소에 먼저 전화하자고 했지만 수화기를 들지는 않았다. 여자가 나간 뒤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집에서 자고 왔다고 했다. 노파는 그 아이에게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썼소.” 노파가 말했다.

사내는 벽을 사이에 둔 7호실 쪽을 보았다.

“할머니는 계속 이 방을 줬고요.”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들고 온 첫 달 방세는 문갑 서랍 안에 있었다. 아직 절반도 쓰지 않았다.

사내는 그날 짐을 쌌다. 노파는 터미널 가는 버스 시간을 알려 주었다. 저녁 6시 10분 막차. 사내는 서류봉투를 가방에 넣고 골목을 나갔다. 노파는 대문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멸치 대가리를 떼며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내가 서 있었다. 가방 끈 한쪽이 끊어져 있었다.

“방 비웠는데요.” 노파가 말했다.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7호실로 갔다. 다음 날 아침에야 버스에서 내렸다는 말을 했다. 창에 어머니가 비쳤다고 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유리에는 작업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고 했다. 여자는 사내를 보지 않고 자기 옆의 빈자리를 내려다봤다. 사내가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는 읍내에서 한참 벗어난 국도였다. 걸어오는 동안 가방 끈이 끊어졌다. 철거 업체에는 서울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해 그날로 경비 일을 그만뒀다.

노파는 쌀독 밑의 사진을 꺼내 주었다. 비닐 지갑은 누렇게 변했고, 아이가 먹던 수박의 붉은색만 남아 있었다. 사내는 사진 속 순임을 오래 보았다. 왜 이제 줬느냐고 묻지 않았다. 노파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뒤로 사내는 낮에는 읍내를 돌았고 밤이면 7호실 창가에 앉았다. 어떤 밤에는 공장이 캄캄하다고 했고, 어떤 밤에는 2층 작업장에 불이 켜졌다고 했다. 불이 보이는 날에도 재봉틀 수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마다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노파는 국에 물을 덜 부었다.

낮에는 사내가 여관 일을 거들었다. 떨어진 처마를 못질하고, 마당 배수구에서 비닐봉지와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방세를 돌려주겠다고 하면 서울 가는 날 차비로 달라고 했다. 노파는 봉투를 문갑 안쪽에 따로 넣었다. 어느 날은 둘이 장롱을 원래 자리로 밀다가 해바라기 무늬 커튼을 떼어 빨았다. 천이 삭아 세탁기 안에서 한쪽 귀퉁이가 찢어졌다.

사내는 사진을 밥상 맞은편에 세워 두었다. 노파가 두 번째 밥공기를 놓자 사진을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앉았다. 둘이 마주 보고 밥을 먹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사내는 순임이 매운 것을 잘 먹었느냐고 물었고, 노파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돈가스를 좋아했다는 말은 해 주었다. 사내가 어머니는 양식을 좋아했구나, 하며 웃어서 노파는 소스가 달다고 욕하면서도 매번 갔다는 말까지 했다.

저녁을 치우고 나서 노파는 쌀독 밑이 빈 것을 몇 번 확인했다. 사진이 밥상 위에 있으면 먼지가 묻을 텐데 비닐을 새로 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 가져갈 물건이었다.

사내가 돌아온 뒤 엿새 동안은 밤마다 공장 쪽에서 재봉틀 소리가 났다. 엿새째 되는 밤, 그 소리가 뚝 끊겼다. 냉장고 모터와 수도관 우는 소리만 남았다. 노파는 잠이 오지 않아 문갑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새벽 한 시쯤 사내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수를 하고 면도까지 한 얼굴이었다.

“펜 좀 빌려주세요.”

“내일 아침에 서울 가요.”

사내는 문갑 쪽을 보았다. “사진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가지고 가야지.”

“엄마가 맡긴 거잖아요. 할머니한테.”

노파는 사진을 사내 가방에 넣어 주려고 일어났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문갑을 짚었다. 손 가까이에 숙박부와 검은 볼펜이 있었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복도 전등이 두 번 깜빡이는 동안 기다렸다.

노파는 볼펜을 쥐었다. 지난번 숙박부를 쓴 뒤 심을 새것으로 갈아 둔 펜이었다. 사내 손에 건네기 전에 뚜껑을 한 번 눌러 닫았다.

“이름 적는다고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오.”

“알아요.”

사내는 펜을 받아 고맙다고 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 7호실 문이 닫히는 소리, 장롱이 밀리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잠시 뒤 볼펜 심이 시멘트를 긁기 시작했다. 순임이 쓰던 때와 같은 벽이었다. 노파는 문갑 앞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만 쓰라고 말하려면 문을 열고 몇 걸음만 걸으면 됐다. 대신 사내의 방세 봉투를 꺼내 다시 세었다. 아직 보름치가 남아 있었다.

글씨 쓰는 소리가 멎었다.

아침에 7호실은 비어 있었다. 가방과 신발은 사라졌고 사진만 방바닥 가운데 놓여 있었다. 노파는 장롱을 밀었다. 명단 끝에 마르지 않은 글씨가 한 줄 늘어 있었다.

이진우. 2026. 11. 6. 밤. 도망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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