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모 일지
장마가 들 무렵의 한내 지하보도에서는 물비린내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도로 밑으로 스물몇 계단을 내려가면 셔터 내린 구둣방과 열쇠 가게가 마주 보고 늘어선 좁은 복도가 나오는데, 콘크리트가 겨우내 머금었던 물을 도로 뱉어 내는 냄새와 곰팡내, 구석 어딘가에 오래 밴 지린내가 형광등 불빛 아래 한데 고여서 사람이 지나가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유월 첫 월요일 아침, 곽 주임은 발령장이 든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그 계단을 내려갔다.
관리실은 복도 한가운데, 죽은 가게들 사이에 문패도 없이 끼여 있었다. 문을 열자 이번에는 아교 냄새와 묵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쳤는데, 그것은 지하의 축축한 냄새와는 결이 다른, 오래된 서고에서나 맡을 법한 마른 냄새였다. 백 소장이라 불리는 전임자는 예순을 한참 넘긴 노인으로, 이 방에서 서른두 해를 보냈다고 했다. 책상 하나, 캐비닛 둘, 캐비닛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검정 표지의 장부들. 인수인계라고 해 봐야 열쇠 꾸러미와 장부를 넘기고, 복도로 나가 기둥 하나를 보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B4라고 페인트로 적힌 기둥이었다. 어른 눈높이쯤에 부적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누런 한지에 붉은 글자 — 라기보다는 글자가 있던 자리라고 해야 옳았다. 붉은 물감으로 눌러 쓴 획들은 핏물 빠진 것처럼 바래어 윤곽만 남았고, 겉면은 수만 명이 수십 년을 엄지로 쓸고 지나간 문지방처럼 반들반들하게 닳아 모서리가 둥글었다. 곽 주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백 소장이 손목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놓지도 않았다.
「한내지하보도 시설물 관리 지침」 (1961. 10. 제정, 발췌) 一. 계측은 매일 오전 아홉 시에 한다. 二. 부적에 손을 대지 않는다. 三. 마모를 막으려 하지 않는다. 덧바르거나 덮지 않는다. 四. 계측 결과는 마모 일지에 적고 본회에 보고한다. 五. 부적의 글자를 소리 내어 읽지 않는다.
닳는 건 못 막아요, 하고 백 소장은 말했다. 우리는 세는 사람이오. 그러고는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 돌아서서 한마디를 보탰다. 냄새가 변하거든 그날로 본회에 전화하시오. 무슨 냄새냐고는 묻지 마시오. 맡으면 아오.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지상의 빛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지하보도에 내려오지 않았다.
아홉 시의 복도는 지린내가 가장 짙은 시간이었다. 곽 주임은 날마다 그 시간에 기둥 앞에 서서 투명 격자판을 대고 사진을 찍고, 바랜 면적을 백분율로 셈해 장부에 적었다. 인수 당시 마모율은 61.24퍼센트. 장부는 1961년 가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하루 0.002에서 0.003, 일 년에 1퍼센트 남짓, 육십 년 가까이 무서우리만치 한결같았다. CCTV를 며칠을 돌려 봐도 부적에 손대는 사람은 없었다. 손은커녕 눈길조차 닿지 않았다. 행인들의 시선은 그 종이 위에서 기름 위의 물방울처럼 미끄러졌다. 아무도 만지지 않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종이는 만져진 것처럼 닳아 갔다. 장부 매 권의 끝장에는 잔여 면적 소진 예상 시각을 적는 칸이 있어서, 곽 주임은 날마다 연필로 지우고 새로 적었다. 처음 적었을 때 그 칸에는 사십 년 뒤의 날짜가 들어갔다.
유월이 다 가기 전에 숫자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루 0.008, 이튿날 0.011. 곽 주임은 장부 열두 권을 책상에 펴 놓고 육십 년 치 수치를 모눈종이에 옮겨 그렸다. 자로 그은 듯 뻗어 오던 선이 한 지점에서 슬쩍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2019년 가을. 그 무렵 본회에서 내려온 공문이 캐비닛에 있었다. 관리 문서 일체를 전산화하여 본회 서버에 등재하였으니 이후 열람은 전산으로 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산팀에 접속 기록을 요청해 받은 것이 칠월 초였다. 그날 밤 곽 주임은 관리실에 남아 두 개의 숫자 기둥을 나란히 놓고 밤새 대조했다. 날짜별 마모 증가분. 날짜별 문서 누적 열람 횟수. 두 계단은 층층이 포개졌다. 문서가 많이 열린 주에 종이가 많이 닳았고, 연휴로 아무도 열지 않은 주에는 증가분이 옛날 수치로 내려앉았다. 종이 시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본회 서고의 낡은 대출 대장, 그러니까 누가 언제 마모 일지를 꺼내 봤는지 적어 둔 기록을 옛 곡선에 겹치자 잔주름 하나까지 들어맞았다. 육십 년 동안 이 종이를 갉아먹은 것은 지하의 습기도 세월도 아니었다. 읽는 눈이었다.
곽 주임은 확인을 했다. 자정 넘어 서버에 접속해 문서를 열고, 닫고, 다시 열기를 열 번 반복하고 잠들었다. 이튿날 아홉 시, 격자판 너머의 숫자는 평소 증가분에 정확히 0.004를 더 얹고 있었다. 한 번 여는 데 0.0004. 그날 이후 문서를 열지 않았고, 계측치는 장부에만 적었으며, 장부를 펴는 제 손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장부도 결국 문서였다.
서면 보고를 올리자 본회는 검토위원회를 꾸렸다. 위원 열두 명이 보고서에 첨부된 문서를 저마다 제 자리에서 열어 보았고, 몇 번씩 다시 열어 보았고, 그 주에만 마모율이 0.7퍼센트 급했다. 문서를 서버에서 내리고 종이 원본만 남기자는 곽 주임의 요청은 한 달 걸려 절반쯤 받아들여졌다. 접근 권한이 잠기자 곡선은 잠시 옛 기울기로 누웠다. 복도의 곰팡내마저 순해진 것 같은 두 주였다.
유출은 칠월 하순이었다. 나라에서 숨기는 진짜 괴문서, 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지침의 스캔본, 격자판 사진, 일지 몇 장이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첫날 조회수 삼천. 사흘째 십일만. 누가 올렸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본회가 지워 달라 요청하는 사이 사본이 세 군데로 옮겨붙었다. 마모율은 하루에 몇 퍼센트씩 무너졌다. 아침마다 기둥 앞에 서면 남은 붉은 기가 물에 푼 것처럼 옅어져 있었고, 종이는 강바닥에서 건진 돌처럼 매끈해서, 만져 보지 않아도 그 미끈함이 눈에 만져졌다.
그 주 어느 아침, 지린내와 곰팡내 밑에서 다른 냄새가 올라왔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가는, 마르고 검은 냄새였다. 곽 주임은 백 소장의 말대로 본회에 전화했다. 담당자는 한참 서류 넘기는 소리를 내더니, 예상 시각을 갱신해서 보고하라고만 하고 끊었다. 백 소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으나 받지 않았고, 며칠 뒤에 부고가 먼저 왔다. 주무시다 가셨다고 했다.
캐비닛 맨 아래 칸, 노끈으로 묶인 첫 권에서는 좀약 냄새가 났다. 지하보도가 생기기 전 이 자리는 전쟁 때 파다 만 방공호 굴이었고, 굴을 파던 인부들이 잇달아 죽어 나갔는데 하나같이 어둠 속을 오래 들여다보던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이 첫 장에 있었다. 불려온 장님 판수가 부적을 써 붙이며 남긴 말이 세로로 받아 적혀 있었다. 이 종이가 대신 눈을 받소. 사람이 어둠을 들여다본 눈도, 어둠이 사람을 들여다본 눈도, 죄 이 종이로 오요. 종이는 눈을 받은 만큼 닳소. 다 닳으면 그동안 받아 둔 눈들이 저마다 임자를 찾아가오.
첫 권 뒤쪽부터는 이름이었다. 장부 어디에도 명단을 적으라는 지침은 없는데, 필체가 제각각인 이름들이 잉크의 결도 제각각으로 빼곡했다. 만년필로 쓴 장, 볼펜으로 쓴 장, 그리고 최근 몇 달 치는 이 방의 누구도 쓴 적 없는 가는 붓글씨로 하루 수백 명씩. 백 소장의 이름은 서른두 해 치가 수천 번 되풀이되어 있었다. 그리고 칠월 초의 어느 날짜 밑에, 곽 주임 제 이름이 열 번, 나란히 적혀 있었다. 자정 넘어 문서를 열고 닫기를 열 번 반복하던 그 밤의 날짜였다.
명단의 첫 장부터는 이름 위로 먹줄이 그어져 있었다. 지난달 처음 명단을 넘겨 봤을 때는 없던 줄이었다. 줄은 앞장에서부터 차례로, 들여다볼 때마다 조금씩 더 내려와 있었다. 백 소장의 수천 개 이름 위에도 빠짐없이. 곽 주임은 줄이 내려오는 속도와 남은 이름의 수를 사흘에 걸쳐 셈했고, 줄이 명단의 끝에 닿는 시각을 얻었다. 그것은 제가 날마다 연필로 지우고 새로 적어 온 그 칸의 숫자와 분 단위까지 같았다. 마모율 100퍼센트 도달 예상 시각, 팔월 이일 새벽 세 시 사십일 분.
그 새벽의 지하보도는 물비린내가 이상하리만치 얕았다. 밤새 비가 왔는데도 복도에는 먹 냄새만 가득해서, 곽 주임은 관리실 문을 열어 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시계만 보았다. 세 시 사십일 분에 복도로 나갔다. 기둥의 종이에는 붉은 기가 한 점 남아 있었고, 그 한 점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물에 잉크 풀리듯 잦아들었다. 종이는 찢기지도 떨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로, 닳을 대로 닳은 채로, 기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관리실로 돌아오니 덮어 두고 나간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명단의 마지막 장들 위로 먹줄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붓도 손도 없이, 젖은 줄이 이름 위에 한 줄 한 줄, 사람 숨 쉬는 속도로 그어졌다. 모르는 이름만 가득한 장이 수백 장이었고, 넘기는 손도 없이 장이 넘어갔다. 마지막 장에 제 이름 열 개가 있었다. 줄이 아홉 개째를 지날 때 먹 냄새가 목덜미에서 났다. 곽 주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것도 없이, 냄새는 이제 앞에서도 나고 있었다. 열 번째 이름 위로 줄이 지나갔다. 그 아래 빈칸에 젖은 글씨가 천천히 돋았다.
다 읽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지하보도로는 우산을 접은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왔다. B4 기둥에는 갓 바른 아교 냄새가 나는 새 부적이 붙어 있었는데, 붉은 글자가 채 마르지도 않았을 종이가 벌써 모서리부터 조금 닳아 있었다. 관리실 문은 잠겨 있었고, 두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각에도 어느 게시판에서는, 괴문서라는 제목 아래에서, 조회수가 한 번에 몇씩 올라가고 있었다.
― *판수: 점치고 경(經) 읽는 일을 하던 눈먼 사람.
해설 — 다 읽은 뒤에 펼치세요
한 줄로 요약하면 '부적은 만지는 손이 아니라 읽는 눈에 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하보도 기둥의 부적은 어둠을 들여다본 사람의 눈, 그리고 어둠이 사람을 들여다본 눈을 대신 받아 두는 그릇이고, 그 부적에 관한 문서를 열람하는 것조차 '들여다보는 일'로 집계됩니다. 그래서 관리 문서가 전산화된 2019년부터 마모 곡선이 슬쩍 고개를 들었고, 인터넷에 유출된 뒤에는 하루 몇 퍼센트씩 무너진 거죠. 놓치기 쉬운 장치가 몇 개 있습니다. 백 소장이 남긴 '냄새가 변하거든 전화하라'는 말 — 물비린내가 먹 냄새로 바뀌는 건 부적이 다 닳아 '받아 둔 눈들이 임자를 찾아가는' 신호였습니다. 장부 뒤쪽의 명단은 이 문서를 들여다본 사람들의 목록이고, 이름 위로 내려오는 먹줄은 눈을 돌려받을 차례를 지우는 줄입니다. 백 소장의 부고가 그 줄과 겹치는 것, 곽 주임의 이름이 정확히 열 개인 것(실험 삼아 문서를 열 번 열었던 그 밤)도 다 계산된 복선입니다. 마지막의 '다 읽었다'는 문장은 곽 주임이 장부를 다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부적이 — 혹은 그 안에 갇혀 있던 무언가가 — 곽 주임을 다 읽어 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 부적이 벌써 모서리부터 닳고 있고, 어느 게시판에서는 조회수가 계속 오르고 있다는 마지막 장면. 이 순환은 끝나지 않았고, 방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우리도 이미 어딘가의 명단에 한 줄 적혔을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