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동행생활기술 파산정리팀 위탁 현장 기록]

접수번호: 2041-대-0417 대상: 생활동반형 추모단말 〈이웃〉 3세대 접수 내용: 밤에 등록되지 않은 말을 함. 사용자 메뉴에서 초기화되지 않음. 방문자: 세림전자서비스 서부권 기사 1명 사용자: 고(故) 정우섭의 배우자, 71세 방문 당시 날씨: 흐림, 강수 없음

이 기록은 기사의 작업용 단말이 자동으로 옮긴 것이다. 현장에서 재생한 학습 원음은 [원음], 추모단말의 합성 음성은 [이웃]으로 표시한다.

기사: 전원부터 볼게요.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사용자: 장마 들고부터. 낮에는 멀쩡해. 밥 먹었냐, 약 먹었냐, 그런 소리만 해. 밤에 비가 오면 옛날 말을 꺼내.

기사: 고장 나기 전에도 계속 켜 두셨고요?

사용자: 끄면 집이 너무 조용해서. 저녁 먹을 때만이라도 켜 놨어.

[이웃] 밥 먹었어? 오늘은 된장. 마당은 내가 쓸게.

사용자: 저런 건 그이 말이 맞아. 아침 6시면 마당부터 쓸었어. 우리 집 앞만 한 게 아니라 골목 끝까지 갔지. 눈 오면 건너편 노인 문 앞을 먼저 치웠고. 남한테는 참 부지런했어.

기사: 설치가 재작년 9월로 나오네요. 당시 농촌 가구 시범사업이었습니다.

사용자: 그이가 신청했어. 먼저 갈 사람을 미리 배워 두면 남은 사람이 덜 외롭다고. 나한테는 다 해 놓고 말했지. 벽에 센서 박을 때 처음 알았어.

기사: 학습 기간이 12개월인데, 11개월째에 사망 등록이 됐습니다. 그 뒤 자동으로 추모 모드로 넘어갔고요.

사용자: 우물에 빠졌어. 비 오던 밤에 뚜껑을 보러 나갔다가. 나무가 삭아서 발이 빠진 거라고 했어. 새벽에 내가 신고했고, 소방서 사람들이 건졌어.

기사는 단말 옆 장식장을 앞으로 당겼다. 뒤판에는 먼지 없는 네모가 남아 있었고, 그 안으로 가는 전선 셋 중 하나가 벽지 속에 묻혀 있었다.

기사: 본체만 뽑아서는 안 꺼집니다. 마당 센서와 현관 중계기에 보조 전원이 있어요. 초기화는 제가 할 수 있는데, 먼저 오류 구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용자: 목소리는 안 없어지지?

기사: 전체 초기화를 하면 없어집니다. 고인 음성도 다시 만들 수 없고요. 회사가 문을 닫아서 원본 서버가 없습니다.

사용자는 약 봉투를 식탁 한쪽으로 밀었다. 비닐 아래에는 읍내 마트 전단이 끼워져 있었고, 장식장 손잡이에는 접은 빨간 우산이 걸려 있었다.

기사: 밤에 한다는 말이 어떤 겁니까?

사용자: 우산을 찾아. 우물을 덮으러 가자고도 하고. 내가 그런 걸 가르친 적은 없어.

기사: 학습 중에 들어간 생활 소리가 문장으로 섞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 오는 날만 그렇다면 날씨 신호하고 특정 원음이 잘못 묶였을 수 있고요.

사용자: 기계가 비도 알아?

기사: 처마 센서가 있습니다. 빨래 알림 때문에 달아 놓은 거예요.

기사가 진단 화면에서 날짜별 막대를 내렸다. 대부분의 막대는 초록색이었고, 남편이 죽은 날만 회색으로 남아 있었다. ‘화자 분리 실패’라는 글자 옆에 23분짜리 원음이 붙어 있었다.

기사: 이 구간이네요. 사고 난 날 맞습니까? 8월 19일, 밤 11시 4분부터.

사용자: 날짜는 몰라. 비가 많이 왔어.

기사가 소리를 줄여 재생했다.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먼저 나왔고, 철문이 한 번 끌렸다. 고무 슬리퍼가 진흙에서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마당 쪽으로 멀어졌다.

[원음] 정우섭 추정: 우산 두고 가. 금방 보고 올게.

그 뒤로 발소리가 하나 더 겹쳤다. 먼저 나간 발보다 가볍고 빨랐다. 빗물이 마이크를 덮으면서 두 소리는 금세 뭉개졌다.

사용자: 저건 빗소리야.

기사: 그럴 수 있습니다. 야외 음원이라 분리 정확도가 낮아요.

사용자: 그날은 그이 혼자 나갔어. 나는 부엌에 있었고.

기사: 예. 사고 조사는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왜 이 소리가 합성 음성에 섞였는지만 볼게요.

기사는 원음을 멈추고 ‘학습 제외’를 눌렀다. 화면에 경고창이 떴다. 해당 구간을 지우면 그 구간에서 배운 억양과 어휘도 함께 손실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기사: 부분 삭제도 목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네요. 남편분 음성 자료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사용자: 그이는 집에서 말을 많이 안 했어. 밖에서는 잘도 웃더니.

[이웃] 우산 샀다. 빨간 거. 당신 거야.

사용자는 장식장에 걸린 우산을 내려 무릎에 눕혔다. 손잡이의 투명 비닐은 벗겨져 있었고, 천을 묶는 끈만 새것처럼 팽팽했다.

사용자: 집 계약을 해 놓고 저걸 사 왔어. 내 도장을 반닫이에서 꺼내 계약서에 찍어 놓고는, 도시 가면 비 오는 날도 좋다면서. 우산이 고우면 비가 반갑대.

기사: 집은 안 파신 것 같은데요.

사용자: 자식들이 계약금을 물어 줬어. 그이는 죽었고, 나는 도장 찍은 적 없다고 했지. 집은 남았어.

사용자는 우산을 무릎에 둔 채 안경을 찾았다. 안경은 약 봉투 밑에 깔려 있었다.

기사: 이어서 조금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사용자: 빨리 해.

원음은 11시 9분부터 거의 빗소리뿐이었다. 멀리서 양철 대야가 굴렀고, 개 한 마리가 두 번 짖었다. 기사는 재생 속도를 낮췄다가 다시 올렸다. 사용자는 그동안 냉장고 위의 벽시계를 세 번 보았다.

[원음] 정우섭 추정: 들어가라니까. 뚜껑만 얹고 갈 거야.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짧게 겹쳤다.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빗물이 배수관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다.

[원음] 정우섭 추정: 비 맞잖아. 펴든가. 왜 뒤에 서 있어.

사용자: 꺼.

기사가 정지를 눌렀으나 원음은 2초쯤 더 흘렀다. 젖은 나무가 비틀리는 소리, 무엇인가 우물 벽을 한 번 치는 소리, 물소리가 차례로 났다. 마지막에는 우산살이 바닥을 긁는 듯한 가느다란 마찰음이 남았다.

방 안에서는 냉장고 모터만 돌았다.

기사: 정지됐습니다.

사용자: 저게 비 오는 밤마다 말을 보태. 그이는 못 한 말을. 발소리가 둘이었다느니, 내가 뒤에 있었다느니.

기사: 원음과 합성 결과가 뒤섞인 겁니다. 단말이 상황을 이해해서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사용자: 이해도 못 하는 게 왜 없는 말을 해.

기사: 앞뒤 소리를 이어서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기계니까요.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사용자: 그럼 저 말도 틀린 거야?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단 화면에는 두 번째 화자의 신뢰도가 54%라고 표시돼 있었다. 마당에서 현관으로 돌아온 움직임은 1회였다.

기사: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 날짜만 지우면 평소 목소리도 달라질 수 있고, 전체 초기화를 하면 야간 발화는 확실히 멎습니다. 그냥 두면 같은 오류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고요.

사용자: 날짜만 지워.

기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가 남편분처럼 안 들릴 수도 있어요.

사용자: 그러면 하지 마.

기사: 야간에 계속 재생돼도요?

사용자: 낮에는 밥 먹었냐고 물어. 약도 챙기라 하고.

기사: 그 기능만 있는 새 단말로 바꿔 드릴 수 있습니다. 일반 음성으로요.

사용자: 그건 그이가 아니잖아.

기사는 작업 취소 동의서를 꺼냈다. 사용자는 ‘원음 보존’ 칸과 ‘개인화 음성 유지’ 칸에 각각 표시하고 서명했다.

기사: 처리하지 않고 닫겠습니다. 다음에 마음이 바뀌면 접수번호 말씀하세요.

사용자: 다음 장마에도 올 수 있어?

기사: 그때 이 팀이 남아 있으면요.

기사는 벽에서 빼 두었던 선을 다시 꽂았다. 단말 앞면에 불이 들어오자 사용자는 빨간 우산을 장식장 손잡이에 걸지 않고 단말 옆에 세웠다.

[이웃] 여보. 비 와. 우산 펴.

사용자: 아직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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