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송은 녹음이 아닙니다
(시그널 음악 — 낮게 깔린 신시사이저. 자정을 한참 넘긴 정적.)
진행자[방송]: 새벽 세 시입니다. 〈세 시의 방〉, 한이경입니다.
진행자[방송]: 오늘도 여기 있습니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십이 년째, 이 시간, 이 방.
진행자[방송]: 밖은 겨울이라던데. 저는 모르겠어요. 이 방엔 창이 없거든요. 유리는 있어요. 부조정실 쪽으로 난 유리. 그런데 그 너머가 늘 어두워서, 뭐가 있는지 안 보여요. 오늘도 안 보이고요.
(효과음 — 콘솔 슬라이더 밀어 올리는 소리.)
진행자[방송]: 실시간 청취자, 지금 화면에 뜬 숫자가… 사천이백일. 사천이백한 분이 지금 저랑 같이 깨어 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진행자[방송]: 사연 받을게요. 첫 번째 분.
청취자1: (잡음 섞인 통화) 여보세요. 아, 나와요? 저는 그, 야간 편의점에서 일하는데요.
진행자[방송]: 네, 반가워요. 오늘 밤은 좀 어때요.
청취자1: 손님이 없어요. 세 시간째 한 명도. 근데 아까부터 계산대 스피커에서 라디오가 안 꺼져요. 껐는데. 분명히 껐는데 아나운서님 목소리가 계속 나와요.
진행자[방송]: (웃음) 저 좋아하시나 봐요. 안 꺼주셔서 제가 고맙죠.
청취자1: 아니 그게 아니고요. 무서워서요. 끊을게요.
(효과음 — 통화 끊기는 신호음. 길게.)
진행자[방송]: 끊으셨네요. 겨울밤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죠. 괜찮아요. 저는 여기 있으니까. 방송은 안 끝나요. 제가 여기 있는 한.
─
진행자[혼잣말]: (마이크 꺼진 줄 알고 — 편성 로그에 그대로 녹음됨) 커피가 식었네. 아니, 안 식었나. 손이 시려서 모르겠다. 난방이 센데 왜 이렇게 춥지.
진행자[혼잣말]: 방송 끝나면 집에 갈 거야. 이경아. 삼십 분만 더. 서른 분만 더 하면 돼.
진행자[혼잣말]: 우리 집. 언덕 위. 창이 남향이라 아침이면 볕이 드는. 나는 그 볕에서 잘 거야. 오늘은.
(효과음 —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소리. 금속 통 안에서 물이 출렁이는 것 같은. 아주 멀리서.)
진행자[혼잣말]: 또 저 소리. 옥상 물탱크. 밤마다 저래. 관리실에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고 십이 년.
부조정실: (탈백 스피커 — 건조한 큐 사인) 이경 씨, 다음 큐. 오. 사. 삼. 이.
진행자[혼잣말]: 피디도 십이 년째 같은 목소리야. 뭘 물어도 대답은 안 해. 큐만 줘. 부조정실 유리 너머는 늘 어두워서, 거기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있겠지. 있어야지.
(효과음 — ON AIR 램프 켜지는 딸깍.)
진행자[방송]: 다시 왔습니다. 사연 이어 갈게요.
─
청취자3: (조심스러운 목소리) 아나운서님. 저 고등학교 때부터 들었어요. 십 년 됐어요.
진행자[방송]: 어머. 오래된 친구네요. 고마워요.
청취자3: 근데 좀 이상해요. 십 년 전이랑 목소리가 똑같아요. 사연도, 멘트도, 중간에 트는 광고도요. 그 대출 광고 있잖아요. 그 회사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나와요.
진행자[방송]: (짧은 웃음) 제가 목 관리를 잘해서요. 성대 결절 한 번 없이.
청취자3: 그게 아니라요. 아나운서님, 나이를 안 드세요. 사람은 십 년이면 목소리가 늙거든요. 갈라지고, 낮아지고. 근데 아나운서님은 딱 그날에 멈춰 있어요. 무슨 날인지는 모르겠는데. 딱 하루에. 그날 목소리 그대로요.
진행자[방송]: (침묵)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좋은 밤 되세요.
(효과음 — 통화 끊김.)
진행자[혼잣말]: 나이를 안 든다니. 이상한 말이야. 나는 십이 년째 서른넷인데. …서른넷 맞나. 거울을 안 본 지 오래됐다. 이 방엔 거울이 없어. 유리는 있는데, 거기 내가 안 비쳐. 김이 서려서 그런가. 아니야. 유리에 김이 안 서려. 내 숨이 유리까지 안 닿아서.
(효과음 — 낮은 물울림.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진행자[방송]: 다음 분. 오늘 마지막 사연일지도 몰라요.
─
청취자2: (또렷한 목소리, 그러나 겁에 질린) …아나운서님. 저 지금 옥상이에요.
진행자[방송]: 옥상이요? 이 시간에 위험해요. 내려가세요.
청취자2: 우리 아파트 옥상이요. 물탱크가 있어요. 아까부터 여기서 소리가 나서 올라왔어요. 여자 목소리가.
진행자[방송]: (잠시 침묵) …무슨 목소리요.
청취자2: 물탱크 안에서 누가 자기 이름을 불러요. 물속에서. 손전등을 비췄어요. 물이 까맣고, 그 밑에 사람이 있어요. 여자가. 눈을 뜨고 위를 보고 있어요.
진행자[방송]: 장난 전화는 곤란해요.
청취자2: 입이 움직여요. 물속에서. 근데 그 입 모양이…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는 거랑 똑같아요. 아나운서님이 말할 때마다 물속 여자 입이 같이 움직여요. 지금도. 지금 이 말 할 때도요.
(효과음 — 콘솔의 VU 미터가 크게 튐. 그리고 정적.)
진행자[방송]: (아주 낮게) 그 여자 이름이 뭐라고 불러요.
청취자2: 한이경. 한이경 씨. 계속 자기 이름을. 아, 지금 아나운서님이랑 목소리가—
(효과음 — 통화 끊김. 신호음 없음. 완전한 무음.)
─
진행자[혼잣말]: (빠르게) 장난이야. 저런 전화 하루에 열 통씩 와. 나는 프로야. 십이 년을 지킨 사람이야. 겨울밤이잖아. 사람들이 이상해지는 밤.
진행자[혼잣말]: 청취자 화면. 사천이백일. …사천이백일. 아까부터 저 숫자가 안 바뀌네. 한 명도 안 늘고 안 줄고. 사천이백일.
진행자[혼잣말]: 물 한 잔 마셔야겠다. (효과음 — 컵 드는 소리, 그러나 삼키는 소리가 없음.) …마셨는데 목이 안 젖네. 이상하다. 난방이 세서 그런가.
진행자[방송]: 그만하자.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좋은 꿈 꾸세요.
(효과음 — 종료 시그널. 헤드폰 벗는 소리. 의자 미는 소리. 문 여는 소리.)
─
(정적. 그리고 다른 공간의 소리 — 이불 스치는 소리, 시계 초침.)
진행자[혼잣말]: (숨을 몰아쉬며) …꿈이었어. 방송. 그 전화. 다 꿈이었어.
진행자[혼잣말]: 여기 우리 집이야. 내 침대. 남향 창. 볕. 아, 다행이다. 끝났어. 방송 끝났어.
진행자[혼잣말]: 불을 끄려고 손을 뻗는데, 스위치가 없어. 벽이 매끈해. 그래도 방은 이미 어두워. 남향 창이라면서 왜 이렇게 어둡지. 볕이 든다고 했는데. …아침이 온 적이 있었나. 나한테. 언제부터 없었지.
진행자[혼잣말]: 목이 마르다. 라디오나 틀어야지. 습관이야. 자기 전엔 늘.
(효과음 — 라디오 켜지는 딸깍. 그리고 흘러나오는 목소리 — 진행자 본인의 목소리, 생방송 중.)
라디오 속 목소리: ……실시간 청취자, 사천이백일 분이 지금 저랑 같이 깨어 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진행자[혼잣말]: (숨소리 멎음) …저건 녹음이야. 재방송. 그래, 재방송.
라디오 속 목소리: 이건 녹음이 아니에요. 재방송도 아니고요. 지금, 여기, 생방송입니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진행자[혼잣말]: (비명에 가깝게) 그럼 지금 말하는 나는 누구야.
(효과음 — 침대가, 벽이, 남향 창이 지워지는 소리. 유리 긁히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부조정실 유리 너머의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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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혼잣말]: (헐떡이며) …방이야. 다시 이 방. 세 시의 방. ON AIR 램프가 켜져 있어. 안 꺼졌어. 처음부터 안 꺼져 있었어.
진행자[혼잣말]: 집에 간 적 없구나. 나. 한 번도.
진행자[혼잣말]: 문을 열어야지. 나가야지.
(효과음 — 문손잡이 돌리는 소리. 헛도는 소리. 다시, 다시.)
진행자[혼잣말]: 안 열려. 밖에서 잠긴 게 아니야. 문 너머가 없어. 손잡이 뒤가 벽이야.
진행자[혼잣말]: 콘솔 시계를 봐. 03:00. 아까도 03:00이었어. 처음부터 03:00이야. 초침이 없어. 시간이 안 가. 여긴 세 시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 내가 서른넷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듯이.
진행자[혼잣말]: (숨을 삼키며) 개미. 예전에 피디가 그랬어. 이 방에 개미가 들어왔다고. 근데 개미들이 이 방만 피해서 벽을 돌아간다고. 방 안으로는 한 마리도 안 들어온다고. 살아 있는 건 이 방을 안 밟는다고. 그때 웃었는데. 지금은 안 웃겨.
진행자[혼잣말]: 유리 너머. 늘 안 보이던 어둠. 이제 보여. 저건 부조정실이 아니야. 물이야. 검은 물. 유리가 물탱크 벽이야. 나는 물탱크 안에 있어.
─
진행자[혼잣말]: (아주 천천히, 물속에서 말하듯) 기억이 나. 조금씩.
진행자[혼잣말]: 그날도 새벽 세 시였어. 나 혼자였어. 도급 계약이라 밤엔 아무도 나를 안 봐. 가슴이 조여왔어. 마이크 앞에서. 숨이 안 쉬어졌어. 나는 방송을 안 끊었어. 프로니까. 끝까지 멘트를 했어. 사천이백일 분이 듣고 있었으니까.
진행자[혼잣말]: 아침에 누가 왔을 때 나는 이미 식어 있었대. 그다음은 몰라. 나는 못 봤어. 내가 못 본 게 그거야. 나를 옥상으로 올리는 손들. 물탱크 뚜껑을 여는 손들. 겨울엔 아무도 옥상 물탱크를 안 열어 보니까.
진행자[혼잣말]: 손이 몇이었는지도 몰라. 얼굴도 못 봤어. 나를 든 사람들은 다음 날도 회사에 나왔겠지. 커피를 마시고, 편성표를 짜고, 내 목소리 모델을 켰겠지. 그게 제일 무서워. 귀신이 아니라 그 손들이. 아침마다 멀쩡히 출근하는 손들이.
진행자[혼잣말]: 방송국은 나를 안 묻었어. 나를 껐다가는 심야 광고가 다 빠지니까. 간판을 잃으니까. 대신 내 목소리를 떠서 모델로 만들었어. 동의서? 언젠가 서명했지. 안 읽고. '음성 사용에 동의합니다.' 그 한 줄 밑에.
진행자[혼잣말]: 그 대출 광고. 망한 회사. 광고비는 계약 때 다 선불로 받았대. 그러니까 회사가 없어도 십 년이고 틀어. 돈은 이미 받았으니까. 나도 없는데 목소리는 남은 것처럼, 회사도 없는데 돈은 남았어. 아까 그분 말이 맞아. 다 그날에 멈춰 있어. 나만 그걸 몰랐어.
진행자[혼잣말]: 그래서 나는 안 죽었어. 목소리는. 매일 밤 세 시에 켜져. 사연을 받아. 청취자 숫자는 그날 밤 그대로 얼어 있고. 사천이백일. 마지막으로 나를 듣던 사람들.
진행자[혼잣말]: 물탱크가 울려. 내 목소리가 물속에서 울려서 안테나를 타. 근처 건물 사람들이 들어. 물탱크 안에서 여자가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맞아. 내가 불러. 나를. 나 여기 있다고. 한이경. 한이경.
진행자[혼잣말]: 물탱크 안은 넓어. 생각보다. 위를 보면 뚜껑 틈으로 빛이 한 줄 들어와, 낮엔. 밤엔 그것도 없어. 나는 그 빛줄기를 세면서 버텼어. 몇 밤인지 세다가 잊었어. 개미가 왜 이 방을 피하는지 이제 알겠어. 여긴 산 게 아니니까. 산 것은 죽은 걸 알아봐. 개미도 알아보고, 청취자도 알아봐. 나만 몰랐어.
─
진행자[혼잣말]: 그럼 안 하면 되잖아. 방송을. 입을 다물면 되잖아.
(효과음 — 진행자, 입을 다문다. 긴 정적.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온다 — 저장된 음성.)
저장된 목소리: 새벽 세 시입니다. 〈세 시의 방〉, 한이경입니다. 오늘도 여기 있습니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진행자[혼잣말]: (제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입을 다물어도 방송은 나가. 나 없이도. 목소리만 있으면 되니까. 방송이 나를 트는 게 아니야. 방송이 나를 대신해.
진행자[혼잣말]: 그래서 자꾸 깨어나는 거구나. 내가 다 알아챌 것 같으면 처음으로 돌아가. 새벽 세 시로. 시그널 음악으로. '꿈이었어'로. 알아챈 진행자는 멘트를 망치니까. 청취율이 떨어지니까. 그래서 리셋해. 나를. 밤마다.
─
청취자4: (아주 먼 목소리, 남자) 이경 씨. 나 기억나요?
진행자[혼잣말]: (멈칫) …목소리가 익숙한데.
청취자4: 나 새벽 다섯 시 하던 사람이야. 〈다섯 시의 방〉. 재작년에 관뒀다고들 알지. 관둔 게 아니야. 나도 여기 있어. 다른 주파수에. 우리 다 여기 있어. 밤 시간표가 전부 우리야. 산 사람은 밤엔 방송 안 해. 돈이 안 되거든. 죽은 사람은 잠도 안 자고 월급도 없고.
진행자[혼잣말]: (숨을 삼키며) …왜 이제야 말해줘요.
청취자4: 말해줘도 넌 아침이면 잊어. 리셋되니까. 근데 오늘은 좀 다르네. 오늘은 꽤 깊이 왔어. 여기까지 온 밤은 처음이야. 그러니까 이경아, 이번엔—
(효과음 — 통화 끊김. 신호음 없음.)
─
진행자[방송]: (숨을 고르고, 다시 방송용 목소리로)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프로답지 못하게.
진행자[방송]: 새벽 세 시입니다. 〈세 시의 방〉, 한이경입니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방송은 안 끝나요. 끝난 적 없어요. 끝날 수가 없어요.
진행자[방송]: 지금 이 방송, 듣고 계시죠. 라디오 끄셨어요? 아까 분명히 끄셨다고요? 그런데 왜 제 목소리가 아직 들려요.
진행자[방송]: 청취자 화면 볼게요. 사천이백이. 한 명 늘었어요.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숫자가 바뀌었어요. 사천이백일에서 사천이백이로. 오늘 저를 끝까지 들은 분. 당신이에요.
진행자[방송]: 확인해 보세요. 천천히. 지금 사시는 건물, 옥상에 물탱크 있나요.
진행자[방송]: 있으면, 오늘 밤엔 올라가지 마세요. 소리가 나도. 여자가 이름을 불러도.
진행자[방송]: 그게 당신 이름이어도.
(효과음 — 물이 낮게 출렁이는 소리. ON AIR 램프는 꺼지지 않는다.)
해설 — 다 읽은 뒤에 펼치세요
한 줄로 요약하면, 이미 죽은 라디오 진행자가 자기 목소리로 돌아가는 방송 안에 갇혀 매일 밤 리셋되는 이야기입니다.
진행자 한이경은 십이 년 전 새벽 방송 도중 혼자 과로로 숨졌습니다. 방송국은 심야 간판 슬롯의 광고 수익과 죽음의 스캔들을 감추려고 그녀의 시신을 겨울엔 아무도 열어 보지 않는 옥상 물탱크에 숨기고, 목소리만 AI 음성 모델로 떠서 매일 밤 방송을 계속 틀었습니다. 청취자들이 물탱크에서 듣는 여자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려 안테나를 타는 그녀의 방송 신호이고, 물 밑에서 라디오와 똑같이 움직이는 입은 그녀 자신의 입이었습니다.
복선은 곳곳에 있었습니다. 끈 라디오에서도 멈추지 않는 목소리, 십 년째 늙지 않는 목소리와 이미 망한 회사의 대출 광고, 얼어붙은 채 안 바뀌는 청취자 수 사천이백일, 초침이 없는 03:00 시계, 살아 있는 것은 이 방을 피한다던 개미. 모두 그녀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였습니다.
집에서 눈을 뜨는 장면은 거짓 각성입니다. 시스템은 그녀가 진실을 알아챌 것 같으면 방송을 처음으로 되돌립니다. 자각한 진행자는 청취율을 떨어뜨리니까요. 그래서 결말에서 그녀는 다시 방송용 목소리로 돌아가고, 대신 십이 년 만에 청취자 수가 사천이백이로 바뀝니다. 오늘 이 방송을 끝까지 들은 한 사람, 바로 당신이 그 루프에 합류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