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차벨

다음은 잡지 『심야 노선』 창간 준비 취재 중 나눈 대화를 녹음해 옮긴 것이다. 상대는 시내버스를 서른한 해 몰고 올봄 퇴직한 예순셋의 전직 기사다. 요청에 따라 이름과 노선 번호, 회사명은 지웠다. 기록자의 말과 기록은 그대로 적는다.

[기록자 주. 기사의 반지하 원룸에서 녹음했다. 살림은 단출한데, 창가에만 버스 좌석이 하나 놓여 있다. 두 자리짜리 시트를 통째로 떼어 온 것으로, 등받이의 파란 천이 해져 있다. 기사는 그 옆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기사: 마지막 아홉 해는 심야 노선만 몰았습니다. 밤 11시 40분에 차고지를 나가는 막차였지요. 시내를 훑고 천변 도로를 지나 종점까지 1시간 10분. 그 천변 2킬로미터에는 가로등이 없어서, 기사들끼리는 거기를 어둠 구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둠 구간에 들어서면 차 안 형광등이 물속처럼 흔들리고 창이 전부 검은 거울이 됩니다. 승객 없는 밤에는 그 검은 유리에 빈 차 안이 통째로 비칩니다. 그래서 어둠 구간에서는 백미러를 짧게만 끊어 봅니다. 오래 볼 것이 못 됩니다.

기록자: 마네킹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기사: 회사가 앉힌 겁니다. 8년 전에요. 심야 노선에서 기사 폭행이 잇따르니까 본사가 궁리 끝에 마네킹을 태웠습니다. 뒷좌석에 승객이 있어 보이면 함부로 못 덤빈다는 거였지요. 양복 입은 남자 마네킹을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앉혔습니다. 기사들은 그냥 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손님 태우고 나갑니다, 손님 모시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요.

기사: 병이 놓이기 시작한 건 그해 겨울부터입니다.

기록자: 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기사: 소주병입니다. 초록색 새 병, 뚜껑도 안 딴 것. 어둠 구간을 지나고 나면 손님 무릎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매일 밤 같은 자리에, 무릎 한가운데 두 손 사이에요. 처음 본 날은 차를 세우고 뒤까지 걸어가 봤습니다. 문은 한 번도 안 열렸고 CCTV에도 아무도 없었는데 병만 있었습니다. 병은 종점 못 미쳐 사라졌습니다. 어둠 구간이 끝나는 무인 정류장, 거기서 벨이 울리고, 문을 열었다 닫으면, 다음에 백미러를 볼 때 무릎이 비어 있었습니다.

기록자: 벨이 울렸다고 하셨습니다. 빈 차에서요.

기사: 예. 하차벨이요. 어둠 구간 한가운데서 딱 한 번. 고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인수인계라는 게 따로 없고, 막차를 처음 모는 날 밤에 조장이 조수석에 타서 세 마디만 합니다. 병이 보여도 못 본 척해라. 벨이 울리면 아무도 없어도 세워서 문을 열어라. 내리실 때까지 기다렸다 닫아라. 그게 전붑니다. 지키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퇴직하는 날까지 지켰습니다.

기록자: 지키고도 무서웠던 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기사: 한 번 있습니다. 재작년 장마 때예요. 병은 무릎에 올라왔는데 벨이 끝까지 안 울렸습니다. 무인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기다렸는데 빗소리만 들어왔습니다. 10분을 서 있다가 문을 닫고 차고지로 들어갔습니다. 백미러는 안 봤습니다.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끄고 실내등도 끈 다음, 문은 열어 둔 채로 내렸습니다. 열쇠를 반납하는데 야간 당직 조장이 제 얼굴을 보더니 아무것도 안 묻고 이러더군요. 그런 밤도 있다, 문 열어 놨으면 됐다. 아침에 가 보니 병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장마철에는 우의를 입고서라도 꼭 그 정류장에 내려서 문가에 섰습니다. 안에서 나오는 걸 볼 수 있는 자리는 피해서요.

기록자: 그 규칙이 왜 생겼는지도 들으셨을 겁니다.

기사: 들은 게 아니라 압니다. 9년 전 겨울 일입니다. 그 노선 막차에 매일 타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시장 정류장에서 타서 맨 뒷줄 창가에 앉는 남자였지요. 낮에는 뭘 하는지 몰라도 밤에는 늘 소주 한 병을 품에 안고 탔습니다. 마시지도 않고 안고만 있었습니다. 종점 전 무인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벨을 누르고도 몸이 늦어서 문이 닫히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사들이 다 알아서, 그 사람만은 벨소리보다 백미러를 먼저 보고 세웠습니다.

기사: 몇 월 며칠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손님 때문에 막차는 늘 몇 분씩 늦었습니다. 그날 밤 기사는 빨리 차고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종점을 두 정거장 남기고 백미러를 안 봤습니다. 벨은 울렸습니다. 짧게 한 번. 기사는 못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새벽 차고지는 영하 11도였고, 막차는 문을 닫은 채 아침까지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섯 시간 뒤에 발견됐습니다. 맨 뒷줄 창가 자리에서, 소주병을 품에 안은 채로요. 회사는 조용히 합의했고 기사는 감봉 석 달을 받았습니다. 회사가 노선을 옮겨 주겠다는 걸 기사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신문에는 한 줄도 안 났습니다.

기록자: 그 기사가 어떻게 됐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기사: 그 기사가 접니다.

[기록자 주. 기사는 여기서 처음으로 오래 말을 멈췄다.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창가의 좌석을 보고 있었다. 침묵은 40초쯤 이어졌다.]

기사: 마네킹이 앉고부터 병이 놓였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오래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사다 앉힌 건 사람 모양일 뿐인데, 그분은 거기서 앉을 자리를 봤나 봅니다. 병을 안고, 당신 자리에. 그 정류장에서 내리시려고요.

기사: 작년 가을에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밤 버스 뒷자리에 술병 안은 인형이 앉아 있어서 아이가 운다고요. 본사는 마네킹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조장이 사정을 설명하러 올라갔다가 시말서만 쓰고 내려왔습니다. 미신을 업무에 끌어들이지 말라고요. 손님은 10월 말에 폐기장으로 갔습니다.

기사: 그다음 막차 조는 젊은 기사였습니다. 규칙 세 마디를 웃으면서 받아 적던 친굽니다. 11월 둘째 주에 그 친구 버스가 차고지에 들어왔는데, 관제가 보니 입고 시각도 주차 위치도 정확한데 하차 처리를 안 했더랍니다. 야간 당직이 나가 보니 운전석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고개를 세우고, 정면을 보고요. 무릎 위에는 초록 병이 있었습니다. CCTV를 돌려 보니 어둠 구간에서 실내등이 한 번 꺼졌다 들어오고, 그 친구가 일어나 통로를 걸어가 거기 앉았습니다. 그때부터 종점까지 남은 길을, 버스는 빈 운전석으로 규정 속도를 지키며 달렸습니다.

기록자: 그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기사: 살아 있습니다. 퇴사하고 요양원에 있어요. 말은 안 합니다.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있는데 자세가 안 바뀐답니다.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채로요. 면회를 두 번 갔는데 두 번 다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사람 얼굴 위에 따로 얹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세 번째는 못 갔습니다.

기사: 버스는 올봄에 폐차됐습니다. 저는 그 주에 사표를 냈고, 폐차장에 가서 뒷줄 창가 시트를 떼어 왔습니다. 저기 있는 게 그겁니다. 그분이 아는 자리는 이제 세상에 저것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밤 11시 40분에 병을 새로 올립니다. 매일요. 벨은 여기 없으니 대신 자정에 창문을 한 번 열었다 닫습니다. 내리시라고.

기록자: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기사: 선생님도 막차를 타시게 되면 맨 뒷줄은 보지 마십시오. 병이 보이거든 못 본 척하시고요. 벨이 울리면, 그게 선생님 손가락이 아니어도 내리실 분이 있는 겁니다. 기사가 문을 안 열거든 선생님이 열어 달라고 하십시오.

[기록자 후기. 자정 5분 전에 녹음을 마쳤다. 기사는 냉장고에서 새 소주병을 꺼내 창가 좌석의 무릎께에 올려놓고, 나를 배웅하러 문밖 계단까지 나왔다. 골목으로 나와 버릇처럼 반지하 창을 내려다보았다. 불 켜진 방 안, 파란 좌석에 누가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자세였다. 기사는 내 옆에 서 있었다. 창문이 안에서 한 뼘 열렸다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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