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한 적 없는 이름
먼저 밝혀 두거니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시킨 일을 했고 시키는 대로 지웠으며, 지우라기에 지운 일을 두고 삼십 년이 지났는지 사십 년이 다 되어 가는지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는 입들이 있다기에, 장롱 밑에서 낡은 서류 몇 장을 꺼내어 같이 부친다. 읽어 보면 알 것이다. 잘못은 기계에 없었고, 굳이 따지자면 지운 손에 있을 터인데, 지운 손이 곧 내 손이라고 우기는 이가 있다면 그이는 지우는 것과 없애는 것이 다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한빛전산이라고, 지금은 없는 회사다. 사무실 두 칸에 XT 석 대 놓고 관공서 서식이나 받아 먹고살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해 봄이었는지 초여름이었는지 두루마기 입은 노인 둘이 찾아와 족보를 전산으로 올려 달라 했다. ○○ ○씨 무슨 공파, 수단에 오른 이름만 만 이천이 넘는 문중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고 그때 말로 하면 그냥 타자였다. 입력은 이양이 도맡았다. 종일 모니터의 푸른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 속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그런 소리를 하던 아가씨였다.
【자료 1】 주간업무회의록 사본. 날짜난은 물에 번져 읽을 수 없다.
― ○씨 문중 족보 DB 입력 진행 87%. 납기 준수 가능. ― 특이사항: 11대손 항에 미입력 성명 1건 반복 생성. 입력 원장 대조 결과 해당 성명 없음. 레코드 삭제 후 색인 재구축 시 동일 위치 재발. 계 5회. ― 사장 지시: 납품 전 원인 규명. 고객 문의 시 정렬 오류로 답할 것.
【자료 1-2】 그다음 주 것인지 그다다음 주 것인지, 철이 뒤섞여 알 수 없다.
― 디스켓 전량 포맷 후 재입력 완료. 동일 성명, 동일 위치 재발. ― 이양 의견: 생성이 아니라 복원으로 판단됨. 근거 별첨. ― 사장 의견: 근거 채택 불가. 별첨 문서 회수.
그 성명이라는 것을 여기 적지는 않겠다. 적으면 이 종이에도 남을 것이므로, 항렬자가 든 두 자 이름이었다고만 해 두자. 오해가 있을까 하여 말해 두는데, 내가 짜 넣은 보정 루틴이라는 것은 이름을 짓는 물건이 아니었다. 형제 항렬 사이에 벌어진 틈, 생년과 몰년의 아귀가 맞지 않는 자리, 그런 빈 칸을 찾아 표를 해 두는 코드였을 뿐이다. 기계에는 지어내는 재주가 없다. 있던 자리를 찾는 재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코드가 제 할 일을 했다고 믿고, 그 믿음이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다.
【자료 2】 당시 문중 총무 녹취. 어느 방송국에서인지 잡지사에서인지 사람이 다녀갔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테이프를 얻어 두었다.
"그런 이름은 우리 문중에 없다니께. 없는 이름이 자꾸 박혀 나오니 지워 달라 캤지. 그기 잘못이여? ……기제사? 그 얘기는 와 자꾸 묻노. 진설 다 해 놓고 축 읽을라 카는데 종부가 사색이 돼서 오는 기라. 메가 한 그릇 더 놓였다고. 수저도 한 벌 더. 지가 안 놨다 카고 동서도 안 놨다 카고. 놋숟가락인데, 우리 집 제기가 아니여. 끝이 반달로 닳은 기, 짤막한 기, 아(兒) 숟가락이라. 그기 메에 꽂혀 있었어. 삽시는 축 읽고 나서 하는 법인데, 아무도 손대기 전에 벌써. ……작은집 셋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나왔어. 이름 지운 집만. 지운 집만 그랬다니께. ……누구냐고? 없어. 우리 집안에 그런 사람 없어. (한동안 말이 없다) 그 시절엔 여덟 살이믄 사람 축에도 못 들었어. 호적에도 안 올리고, 봉분도 안 짓고…… (녹음 끊김)"
【자료 3】 이양이 남긴 메모. 갱지에 볼펜 글씨, 날짜 없음.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나왔는데 그게 그이가 그만두기 전 일인지 후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종가 다녀옴. 구보(舊譜) 대조. 11대 그 자리, 종이가 유독 얇음. 칼로 긁어낸 자리임. 획 꼬리 하나가 미처 못 긁혀 남아 있음. 프로그램이 이름을 앉히는 바로 그 칸임. 마침 안방 도배를 새로 한다고 장판을 걷는 날이었음. 누런 장판 밑, 구들 위에서 한지 뭉치가 나옴. 종부가 그걸 펼치는 것을 문지방 너머로 봄. 머리카락이었음. 가늘고 짧은 것이 한 줌, 삭지도 않고 새까맣게. 싼 한지에 먹으로 쓴 두 글자가 그 이름이었음. 종부가 그것을 들고 부엌 아궁이 쪽으로 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넣는 것은 못 봄. 탔는지 안 탔는지 모름. 프로그램은 지어내지 않음. 대조하고 있음. 다만 무엇과 대조하는지를 모르겠음. 원장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
이양은 그달 말인지 다음 달 초인지 그만두었다. 인사도 없이 갔다고 나는 기억하는데, 어쩌면 인사를 받은 쪽이 나였고 잊은 쪽도 나인지 모르겠다.
그 뒤에 문중에서 다시 왔다. 이번에는 두루마기가 아니라 양복이었고, 봉투가 두툼했다. 화면에서만 지우지 말고 아주 없애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백업 디스켓까지 전부 포맷을 걸었고, 교정쇄는 마당에서 태웠다. 종이 타는 냄새가 꼭 제삿날 지방 사르는 냄새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런 생각이야 누구나 한다. 봉투에 든 웃돈은 야근 수당이었다. 그 점은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납품을 하고, 책은 계유년에 박혔다. 우리 집 얘기를 잠깐 하자면, 그 이듬해였는지 이듬이듬해였는지 모친 기제사에 아내가 수저를 잘못 셌다. 한 벌이 남았다. 다음 해에도 남았다. 수저가 남는 것이야 셈이 어두우면 얼마든지 있는 일이고, 이사를 나오면서 안방 장판을 걷어 보지 않은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남의 집이 될 방바닥을 들출 까닭이 없어서였다.
【자료 4】 계유년 인쇄본 마지막 면 사본. 동봉한다.
전산 조판으로 박은 책이다. 지웠던 그 자리에 그 이름이 도로 앉아 있고, 그 아래로 자(子) 항이 새로 트여 있다. 트인 줄기에 매달린 아이들의 간지를 짚어 보면 을해생이 있고 정축생이 있고 경진생이 있다. 책이 박힌 것은 계유년이다. 셈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안다. 인쇄소가 잘못 박았다고 치면 그만인 것을,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묻는다.
맨 끝에서 두 번째 줄에는 지난겨울인지 올봄인지 태어난 내 손녀의 이름이 있다. 아범은 작명소에서 받아 온 이름이라 했다. 그 아래로 한 줄이 더 있다. 비어 있지 않다.
맨 끝 줄은 읽지 않았다. 노안 탓이다.
해설 — 다 읽은 뒤에 펼치세요
족보를 컴퓨터에 옮기던 작은 전산업체에서, 명단에 없는 이름 하나가 지워도 지워도 같은 자리에 되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의 정체는 어려서 죽은 여덟 살 아이입니다. 그 시절 어려서 죽은 아이는 호적에도 족보에도 올리지 못했고, 집안은 옛 족보에서 그 이름을 칼로 긁어내 지웠습니다. 하지만 안방 장판 밑에는 아이의 머리카락과 먹으로 쓴 이름이 한지에 싸여 숨겨져 있었지요. 프로그램은 이름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르는 '남아 있는 기록'과 대조해 지워진 자리를 복원한 것입니다. "생성이 아니라 복원", "원장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이라는 이양의 메모가 이 규칙을 말해 줍니다.
이름을 지운 집마다 제사상에 낯선 아이 숟가락이 하나 더 올라옵니다. 지워진 아이가 "나도 여기 있다"고 상에 끼어드는 것입니다. 화자가 돈을 받고 백업까지 지우고 교정쇄를 태운 뒤로는, 화자의 집 제사상에도 수저가 남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인쇄본에는 지웠던 이름이 되살아나 있고, 그 아래로 책이 인쇄된 해보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의 이름이 이어집니다. 족보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적기 시작한 것입니다. 끝에서 두 번째 줄은 화자의 갓 태어난 손녀, 그리고 그 아래 마지막 줄은 "비어 있지 않다" — 다음 차례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다는 뜻입니다. 화자는 그 줄을 "노안 탓"이라며 읽지 않기로 합니다.
첫 문장이 곧 주제입니다. "지우는 것과 없애는 것이 다르다" — 기록에서 지운 존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