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한 적 없는 이름
먼저 밝혀 두거니와, 나는 시킨 일을 했다. 지우라기에 지웠고, 지운 뒤에는 다시 나오지 않게 해 달라기에 백업까지 손을 보았다. 그때는 그게 납품 조건이었다. 이제 와서 이름 하나가 어디서 생겼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 한빛전산 때 서류 가운데 남은 것을 날짜가 맞는지 안 맞는지도 따지지 않고 묶어 보낸다. 그때 작업일지에는 삭제라고 적었다.
한빛전산은 지금은 없는 회사다. 사무실 두 칸에 XT 세 대, 프린터 한 대 놓고 관공서 서식이며 상가 명부 같은 것을 받아 먹고살았다. 어느 해 봄인지 초여름인지, 두루마기 입은 노인 둘이 ○○ ○씨 무슨 공파 족보를 전산으로 올려 달라며 수단을 내려놓았다. 이름만 1만 2천 건이 넘었다. 우리야 데이터베이스라고 했지만 고객들은 그저 입력이라 불렀다.
입력은 이양이 맡았다. 점심이면 보리차 병을 모니터 옆에 세워 두고 식은 밥을 말아 먹었으며, 다 먹고 나면 수단에 찍힌 먼지를 지우개 가루 털듯 손등으로 털었다. 푸른 글자를 오래 보면 눈 안쪽에 강물이 흐른다던 아가씨였다. 쓸데없는 소리 같아도, 그이는 같은 칸을 여섯 번 잘못 칠 사람이 아니었다.
【자료 1】 주간업무회의록 사본. 날짜 칸은 물에 번져 읽기 어렵다.
― ○씨 문중 족보 DB 입력 진행 87%. 납기 준수 가능. ― 특이사항: 11대손 항에 원장에 없는 성명 1건 생성. 삭제 후 색인 재구축 시 동일 위치 재발. 누계 5회. ― 입력 담당 의견: 앞뒤 형제의 항렬자와 일치하나 생몰년 칸 없음. ― 사장 지시: 고객 문의 시 정렬 오류로 답할 것. 원인 확인 전 해당 화면 출력 금지.
회의록의 사장 지시는 내가 받아 적은 게 아니다. 그 무렵에는 총무 겸 경리를 두었고, 그이가 내 말을 요약하다 보면 말이 세게 적힐 때가 있었다.
【자료 1-2】 다음 주 것인지 그다음 주 것인지 철이 뒤섞여 있다.
― 원본 디스켓 교체, 신규 파일 생성 후 재입력. 동일 성명 재발. ― 성명 필드를 공란 처리하면 자(子) 항이 한 칸 아래로 밀림. 저장 후 재실행하면 원위치. ― 입력 담당 의견: 공란 처리 때마다 하위 자 항의 끝줄이 늘어남. 신규 파일에서도 같음. 근거 별첨. ― 사장 의견: 근거 불충분. 외부 반출 금지. 별첨 회수.
그 이름은 여기 옮기지 않는다. 항렬자가 든 두 자 이름이었다고만 해 둔다. 내가 짜 넣은 보정 루틴은 족보를 읽는 물건이 아니었다. 형제 항렬 사이에 벌어진 틈이나 생년과 몰년이 맞지 않는 칸에 경고 표시를 띄우는 정도였다. 기계가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그래서 맞지 않는다. 이양도 처음에는 오류라고 했다. 다만 무엇을 보고 빈 칸을 맞추는지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자료 2】 문중 총무의 말. 어느 잡지사 사람이 다녀갔다기에 테이프를 구해 받아 적었다. 질문은 겹치는 부분만 남겼다.
“그런 이름은 우리 문중에 없다 안 카나. 없는 게 자꾸 박혀 나오니 지워 달라 캤지. 그기 잘못이가?”
“기제사 얘기는 와 자꾸 묻노. 진설 다 해 놓고 축 읽을라 카는데 종부가 부엌에서 뛰어나왔어. 메가 한 그릇 더 놓였다는 기라. 수저도 한 벌 더. 끝이 반달로 닳은 짤막한 놋숟가락인데 우리 집 제기가 아니었어.”
“작은집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작은집 셋에서. 수단 고칠 때 그 칸에 도장 찍은 집들만 그랬다 카더라. 내가 본 건 종가뿐이니 나머지는 몰라.”
“그 이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없다.”
“옛 족보에는 있었습니까?”
“그 시절 여덟 살이면 사람 축에도 못 들었어. 호적도 없고 봉분도 없고. 내 그 집 어른도 아닌데 어찌 아노.”
그 뒤로 테이프에는 의자 끄는 소리와 문 닫는 소리만 들어 있다. 녹음이 끊긴 것은 아니다. 질문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한동안 기계만 켜져 있었던 모양이다.
【자료 3】 이양의 메모. 갱지에 볼펜 글씨. 날짜 없음.
“종가 다녀옴. 구보 대조. 11대 해당 자리 종이가 유독 얇음. 칼로 긁은 자국, 획 꼬리 하나 남아 있음. 프로그램이 이름을 놓는 칸과 같음.
안방 도배와 장판을 함께 새로 하는 날이었음. 구들 위 한지 뭉치에서 짧은 머리카락 한 줌 나옴. 먹으로 두 글자 적혀 있었음. 종부가 아궁이로 가져가는 것까지만 봄. 태우는 것은 못 봄.
내가 만든 파일을 새 디스켓에 복사하지 않았는데도 이름이 돌아옴. 빠뜨린 복사본이 있는지 다시 확인할 것. 없는 이름을 새로 만든다기보다 빈 칸을 어디에 맞추는 것 같음. 무슨 자료를 보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음.”
이양은 그달 말인지 다음 달 초인지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랍에 월세 독촉장이 두 장 남아 있어 밀린 월급을 보내려 했으나 적힌 주소가 이미 비어 있었다. 내가 떼먹었다는 뜻은 아니다. 우편환은 돌아왔고, 한동안 경리 서랍에 보관했다.
며칠 뒤 문중 사람들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두루마기가 아니라 양복이었고, 이름을 화면에서만 지우지 말고 아주 없애 달라고 했다. 그쪽에서 먼저 봉투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잔금이 밀려 있으니 일을 끝내야 한다고 내가 말했고, 그들이 밀린 돈과 수고비를 한꺼번에 가져왔다. 이름을 지운 뒤 조판용 디스켓을 새로 만들었고, 시험 출력에는 빈 칸만 남은 것을 나도 보았다. 그 디스켓을 인쇄소에 넘기고 사무실 원본과 백업은 포맷했다. 교정쇄는 마당에서 태웠는데, 재가 담을 넘어가 옆집 빨래에 붙는 바람에 주인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납품본은 계유년에 인쇄됐다. 그 이듬해였는지 이듬이듬해였는지, 우리 집 모친 기제사에 수저가 한 벌 남았다. 아내는 내가 상 차리는 사람 옆에서 자꾸 개수를 세니 헷갈린다고 했다. 다음 제사에는 내가 아예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작은 수저 하나가 메에 꽂혀 있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섞여 온 물건이라며 찬장 맨 아래에 넣었다. 이사할 때는 보이지 않았다. 안방 장판을 걷지 않은 것은 잔금 날에 맞춰 집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자료 4】 계유년 인쇄본 마지막 면 사본.
지웠던 자리에 그 이름이 다시 앉아 있다. 그 아래로 자(子) 항이 새로 트였고, 줄기에 매달린 아이들의 생년에는 을해와 정축과 경진이 차례로 적혔다. 책을 찍은 해보다 뒤다. 인쇄소의 조판 실수라고 하기에는 이름과 생년이 한 칸씩 맞는다.
끝에서 두 번째 줄에는 지난겨울인지 올봄인지 태어난 내 손녀의 석 자 이름과 음력 생일이 함께 적혀 있다. 우리 집은 그 문중과 성도 다르고, 아범은 작명소에서 받아 온 이름이라고 했다. 생일까지 같은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 아래 한 줄은 오래 접힌 금에 걸려 있었다. 금을 펴면 읽을 수 있었겠지만, 사본은 받은 모양대로 다시 접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