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일기
3월 2일 (월)
정림빌라 관리실 열쇠를 받은 첫날이다. 계단은 나선형이라 3층까지 오르는 동안 숫자를 두 번 헷갈렸다.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다고 부동산 아저씨가 말했는데, 복도 벽지 무늬로 보면 그보다 백 년은 더 된 것 같다. 벽지 밑으로 물이 스며 나온 자국이 지도처럼 퍼져 있다.
관리실은 1층 계단 밑, 우편함 옆에 있다. 그 옆에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세입자들이 나가기 전에 매무새를 고치라고 예전 관리인이 달아둔 것 같다. 유리 가장자리가 검게 얼룩졌고, 나무 액자는 손을 대면 축축했다. 첫날이라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오늘부터 일지를 쓰기로 했다. 인수인계 서류가 부실해서, 뭐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다음 사람이 나처럼 헤맬 것 같아서다.
3월 9일 (월)
201호 할머니가 매일 아침 여섯 시에 계단을 쓴다. 다리가 불편해서 한 계단씩 쓸고 한 계단씩 내려간다. 도와드리겠다고 했더니 손을 저으며 “이건 내 일이야” 하셨다. 남편이 몇 년 전에 이 건물 지하에서 일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말을 흐리셨다.
지하 창고에 곰팡이가 심하다는 신고가 두 건 들어왔다. 내려가 봤는데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고 열쇠 꾸러미 어디에도 맞는 게 없다. 부동산에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별관 딱지가 붙은 문이 몇 개 있는데 다 그렇단다.
3월 15일 (일)
201호가 없어졌다. 아침에 계단이 쓸려 있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낮에 아들이라는 사람이 와서 짐을 다 빼갔다. 이사 간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라고 물었더니 남자는 “원래 그런 분이에요” 하고 웃었다. 웃는 방식이 이상했다. 입만 웃고 눈은 나를 안 보고 있었다.
방을 정리하다가 벽장에서 낡은 편지 뭉치를 찾았다. 수취인이 다 201호로 되어 있는데 보낸 사람 이름이 없다. 버릴까 했는데, 왠지 관리실 서랍에 넣어두었다.
3월 22일 (일)
오늘 처음으로 그 거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우편함 앞에서 머리를 넘기는데, 거울 속의 내가 손을 올리는 게 나보다 반 박자 느렸다. 손거울처럼 얇은 유리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302호 남자한테 물어보니 자기도 예전에 느꼈다고 했다. “낡은 거울은 다 그래요.” 그는 야간 근무를 나가는 사람답게 늘 얼굴이 창백하다. 오늘도 그랬다.
3월 29일 (일)
302호 우편함에 지난주 것부터 우편물이 쌓여 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부동산에 연락했더니 “아, 그분 나가셨어요” 한다. 언제, 라고 물으니 서류에 사인은 지난달로 되어 있단다. 지난달이면 내가 이 건물에 온 것보다 전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이번 주 화요일에도 복도에서 마주쳤다. 인사도 나눴다. 서류에 뭐가 잘못됐냐고 물었더니 부동산 사람은 “그런가요” 하고 대충 넘겼다.
이 건물에서 사람이 없어지는 방식이 뭔가 이상하다. 계약서는 다 정리되어 있는데, 정리된 시점이 실제보다 늘 앞서 있다.
4월 3일 (금)
지하 창고 문을 열었다. 열쇠공을 불러 땄는데, 사실은 잠긴 게 아니라 문틀이 습기에 부풀어 붙어 있던 것뿐이었다. 안에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선반에 관리 장부들이 연도별로 꽂혀 있고, 맨 아래 칸에 표지가 벗겨진 공책 한 권이 따로 놓여 있었다.
첫 장에 “관리인 일지”라고 적혀 있다. 날짜는 3년 전 3월 2일부터 시작한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날짜와 같다.
4월 4일 (토)
밤새 그 공책을 읽었다.
첫 장의 문장은 이렇다. “정림빌라 관리실 열쇠를 받은 첫날이다. 계단은 나선형이라 3층까지 오르는 동안 숫자를 두 번 헷갈렸다.” 내가 일지의 첫 줄에 쓴 문장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관리인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걸 느끼고 비슷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계속 읽을수록 우연이라 부를 수 없는 지점들이 나왔다. 201호 할머니가 남편 얘기를 하다 말을 흐린 것, 302호가 “낡은 거울은 다 그래요”라고 대답한 것, 심지어 내가 편지 뭉치를 버릴까 하다 서랍에 넣어둔 것까지 — 날짜와 표현이 거의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필체를 오래 들여다봤다. 처음엔 낯선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ㄹ’을 쓸 때 마지막 획을 위로 살짝 튕기는 버릇이 내 것과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쳐지지 않은 버릇이다. 다른 사람이 이걸 흉내 낼 방법은 없다.
4월 5일 (일)
계속 읽었다. 3년 전 일지는 4월 초에서 문장이 점점 짧아지고, 날짜 간격이 좁아진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필체가 흔들린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오늘 날짜를 찾았다.
찾았다. 오늘 날짜, 4월 5일. 거기 이렇게 적혀 있다.
“지하 창고 문을 열었다. 열쇠공을 불러 땄는데, 사실은 잠긴 게 아니라 문틀이 습기에 부풀어 붙어 있던 것뿐이었다.”
내가 어제 쓴 문장이다. 그런데 이건 3년 전 공책에 이미 적혀 있다. 나는 페이지를 더 넘겼다. 오늘 이후의 날짜에도 글이 있다.
다음 장, 그러니까 아직 내가 살지 않은 날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밤새 그 공책을 읽었다. 필체를 오래 들여다봤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나는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관리실 벽의 거울을 봤다.
4월 5일, 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펜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미 손을 내려놓은 채로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 속에서는 손끝이 아직 종이 위에 있었다. 1초. 어쩌면 그보다 짧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1초 동안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자기 할 일을 계속했다. 펜을 마지막 획까지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얼굴이 나를 보며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마치 처음 웃는 표정을 연습하는 사람처럼.
나는 뒷걸음질쳤다. 거울 속의 나도 뒷걸음질쳤는데,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나보다 늦게 들렸다. 탁, 하고. 내 발소리가 먼저 나고, 그다음에 거울 속에서 탁, 소리가 났다. 두 소리 사이의 틈이 너무 선명해서 그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그 틈이 좁아졌다. 뒷걸음질을 반복할수록 소리 사이의 간격이 줄었다. 세 걸음째에는 거의 동시였다. 네 걸음째, 거울 속의 나는 나보다 반 걸음 먼저 멈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뛰어서 관리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손이 떨려서 자물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 소리를, 자물쇠가 걸리는 그 짧은 쇳소리를, 문 반대편에서 누군가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아주 조금 늦게.
4월 6일
밤새 관리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창고에서 가져온 공책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장, 3년 전 공책의 마지막 장을 찾았다.
필체가 거의 뭉개져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뛰어서 관리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손이 떨려서 자물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 소리를, 자물쇠가 걸리는 그 짧은 쇳소리를, 문 반대편에서 누군가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아주 조금 늦게.”
어제 내가 겪은 일과 완전히 같다. 그런데 이 공책은 3년 전에 쓰였다. 이 문장 다음 장은, 오늘 아침에 처음 봤을 땐 비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잉크가 아직 젖어 있는 것 같은 색으로.
“이 공책을 누군가 지하 창고에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손으로 이 문장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노트, 내가 처음 관리실에서 사서 쓰기 시작한 이 낱장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비어 있어야 할 그 페이지에, 오늘 날짜와 함께 이미 다음 문장이 적혀 있다.
“나는 지금 이 노트, 내가 처음 관리실에서 사서 쓰기 시작한 이 낱장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방금 내가 생각한 문장 그대로다. 나는 이 문장을 아직 쓰지 않았는데, 종이에는 이미 있다. 나는 펜을 들었다. 손끝이 종이에 닿기 전에, 잉크는 이미 마른 채로 거기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둡다. 관리실 문 밖 복도, 우편함 옆 거울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자물쇠 소리처럼, 아주 조금 늦게.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 거울 속에서는, 아직 이 문장을 쓰고 있지 않다.
해설 — 다 읽은 뒤에 펼치세요
한 줄로 요약하면 '일지가 나보다 먼저 쓰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관리인이 지하 창고에서 3년 전 전임 관리인의 일지를 발견하는데, 그 일지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나날의 기록입니다 — 문장까지 그대로, 심지어 아직 살지 않은 날짜까지.
규칙은 이렇습니다. 이 건물에서는 기록이 현실보다 앞서 갑니다. 302호 세입자의 퇴거 서류가 실제보다 한 달 앞서 정리되어 있던 것, 사람이 사라져도 계약서는 이미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는 것 — 전부 같은 규칙의 복선입니다. 서류가, 일지가, 기록이 먼저 쓰이고 사람은 그걸 뒤따라 삽니다.
거울 속 1초의 지연도 같은 어긋남입니다. 처음엔 거울이 늦게 따라오지만(현실이 앞),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간격이 좁아지다 어느 순간 거울이 먼저 멈추고, 먼저 웃고, 먼저 기다립니다. 현실의 그가 '기록보다 늦은 쪽'으로 밀려나는 과정이 거울로 보이는 거죠.
3년 전 일지의 필체가 자기 글씨라는 대목이 핵심 단서입니다. 'ㄹ'의 마지막 획을 튕기는,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버릇까지 같으니까요. 전임 관리인은 남이 아니라 이 루프의 이전 회차, 즉 그 자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 자기가 새로 산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방금 머릿속으로 생각한 문장이 이미 마른 잉크로 적혀 있습니다. 그가 쓰는 게 아니라, 쓰인 것을 그가 살아내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문장 "거울 속에서는, 아직 이 문장을 쓰고 있지 않다"가 뒤집힌 공포의 완성입니다. 이제 늦은 쪽은 거울이 아니라 현실의 그이고, 거울 속의 무언가가 그의 자리를 먼저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3년 뒤, 다음 관리인이 이 일지를 발견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