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일기

2026년 3월 2일 (월)

정림빌라 관리실 열쇠를 받았다. 관리비 고지서를 돌리고, 공동 현관이 닫히는지 보고, 계단 전등이 나가면 갈아 주는 일이다. 한 달에 35만 원. 대신 103호 월세를 20만 원 깎아 준다. 보증금도 석 달에 나눠 내기로 했다. 건물주에게 임대와 관리를 위임받았다는 부동산 소장은 오래 버티는 사람이 없어서 조건이 좋은 거라고 했다.

건물은 3층인데 계단이 중간마다 꺾여서 올라가다 보면 층수를 놓친다. 현관 우편함 옆에는 사람 하나 겨우 비추는 거울이 걸려 있다. 나무 테두리가 물을 먹어 검게 부풀었다. 떼어 내겠다고 하자 소장이 그냥 두라고 했다. 못 자국이 크게 남는단다.

인수인계 서류가 영 엉망이다. 누구에게 뭘 받았는지 나중에 또 말이 달라질 것 같아서 공책을 샀다. 첫 장에 날짜를 쓰고 오늘 받은 열쇠 수를 적었다. 현관 1개, 옥상 1개, 빈집 2개. 세대별 비상 열쇠는 관리실 벽의 열쇠함에 따로 있었다. 지하 창고 열쇠는 없다.

3월 4일 (수)

보일러 기사가 오후에 온다더니 오전에 왔다. 301호는 문 앞에 귤 상자를 내놨고, 202호는 고지서에 자기 성을 또 틀렸다고 관리실까지 내려왔다. 수정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볼펜으로 고쳐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점심은 관리실에서 컵라면으로 때웠다. 전기포트 뚜껑이 끓을 때마다 들썩여서 영수증 뭉치를 그 위에 올려 눌렀다. 소장은 비품을 새로 사려면 먼저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8천 원짜리 포트에도 절차가 있었다.

저녁에 양말 한 짝이 없어졌다. 세탁기 안에 붙었겠지.

3월 9일 (월)

201호 할머니는 아침 6시면 계단을 쓴다. 다리가 성치 않은데도 한 계단 쓸고 내려가서 다시 한 계단을 쓴다. 손잡이를 놓지 않으니 빗자루질보다 내려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월세 깎인 만큼만 일하라고 했다.

남편이 전에 이 건물 일을 했다고 한다. 관리인이었냐고 묻자 지하에서 장부를 정리했다고만 했다. 지하 문이 안 열린다고 하니 빗자루를 세워 놓고 나를 한 번 봤다.

“그 문은 열쇠로 여는 문이 아니야.”

문틀이 틀어졌다는 말인 줄 알았다.

3월 12일 (목)

소장이 201호 퇴실 확인서의 관리인 확인란에 사인해 달라고 했다. 퇴실일은 2월 28일로 적혀 있었다. 아직 살고 계신다고 하니 아들이 요양원 자리를 알아봤고 서류만 먼저 정리하는 거라고 했다. 이 건물은 곧 매물로 내놓을 거라 빈방 숫자가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나는 사인하지 않았다. 소장은 그러면 이번 달 관리 수당 지급이 늦어진다고 했다. 보증금 분납 얘기까지 꺼내지는 않았는데도 괜히 그 말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3월 15일 (일)

점심 무렵 201호 아들이 와서 여름 이불과 작은 서랍장을 가져갔다. 할머니는 복도 의자에 앉아 자기 물건이 내려가는 걸 보고 있었다. 이사 가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나더러 관리실에 소화제 있느냐고 했다.

아들은 “원래 물건을 못 버리세요”라고 웃었다. 어머니가 들을 만한 거리였다.

저녁에 201호 우편함에서 발신인 없는 봉투 하나를 꺼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봉투 안에는 오래된 관리비 영수증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수납인 칸의 동그란 도장이 번져 이름은 안 보였다. 할머니는 한 장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장은 내게 버려 달라고 했다. 관리실 휴지통에 넣었다가, 물 묻은 음식 봉투가 위에 놓여 있어 다시 꺼냈다. 이유는 모르겠다. 서랍 맨 아래에 넣었다.

3월 22일 (일)

거울이 늦었다.

우편함 위에 떨어진 광고지를 주워 들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는데, 거울 속 손이 내 손보다 조금 뒤에 올라왔다. 아주 짧아서 눈이 피곤했나 싶었다. 다시 해 보니 똑같이 움직였다.

마침 내려오던 302호에게 거울 이야기를 했다. 야간 경비를 한다는 사람이라 오후에도 눈이 충혈돼 있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고 우편함만 열었다.

“낡은 거울은 다 그래요.”

거울이 어떻게 늦느냐고 묻자 택배 상자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올라갔다. 상자 밑이 젖어 셔츠 옆구리에 네모난 자국이 남았다.

3월 25일 (수)

싱크대 배수관을 뚫었다. 잃어버린 양말은 침대와 벽 사이에서 나왔다. 오늘 거울은 멀쩡했다.

201호가 김이 빠진 사이다 두 병을 줬다. 아들이 당뇨에 안 좋다며 냉장고를 비웠다고 했다. 한 병은 버리고 한 병은 관리실 창틀에 뒀다. 저녁에는 302호에서 드릴 소리가 났지만 10분쯤 지나 멎었다. 가구라도 조립하는 줄 알았다.

3월 29일 (일)

302호 우편함에 독촉장이 쌓여 있어 소장에게 연락했다. 그 사람은 2월에 나갔다고 했다. 해지 서류 사진도 보내 왔다. 302호 서명 아래 날짜가 2월 19일로 적혀 있었다.

지난주에도 봤다고 하자 소장은 짐을 덜 가져갔나 보다고 했다. 퇴거 뒤에도 비밀번호를 안 바꾼 건 자기 잘못이니 괜히 일을 키우지 말라고 했다.

302호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문고리 옆에는 택배 상자를 끌며 생긴 듯한 검은 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날 밤 공동 현관 CCTV 녹화 영상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내가 광고지를 줍는 모습만 나왔다. 302호가 내 옆을 지나간 시각, 거울 앞에 선 사람은 나 하나였다. 영상이 끊긴 흔적은 없었다.

소장에게 메시지를 쓰다가 창을 닫았다.

4월 3일 (금)

지하에서 물이 올라와 열쇠공을 불렀다.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문틀이 습기를 먹고 붙은 것을 둘이 어깨로 밀어 열었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안에는 페인트통, 깨진 우편함 문짝, 연도별 관리 장부가 있었다. 장부는 3년 전 것까지만 있고 그보다 오래된 것은 아래쪽이 물에 잠겨 붙어 있었다. 선반 맨 끝에 표지가 벗겨진 공책 한 권이 따로 놓여 있었다.

첫 장에는 ‘관리인 일지’라고 쓰여 있었다. 첫 날짜는 3년 전 3월 2일이었다.

방으로 가져오지 않고 관리실 책상 위에 뒀다. 지하에 다녀온 옷에서는 빨아도 축축한 종이 냄새가 났다. 저녁을 먹다 말고 두 번 내려가 표지만 보고 왔다.

4월 4일 (토)

새벽까지 그 공책을 읽었다.

첫 줄은 이렇다.

‘정림빌라 관리실 열쇠를 받았다.’

그다음에는 계단을 오르다 층수를 놓친 일, 거울 테두리가 검게 부푼 것, 받은 열쇠가 현관 1개와 옥상 1개와 빈집 2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쓴 문장과 조사 몇 개만 달랐다. 3월 4일에는 202호가 고지서의 성을 고친 일과 잃어버린 양말이 나왔다. 그 공책에서는 양말을 세탁기 뒤에서 찾았다고 되어 있었다.

내 양말은 침대 옆에서 찾았다.

그 차이가 반가워서 표시까지 해 뒀다. 나와 무관한 사람이 우연히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같아졌다. 201호가 소화제를 찾은 말, 발신인 없는 봉투, 302호 셔츠에 남은 젖은 네모까지 차례대로 나왔다.

3월 29일 항목은 내 공책보다 짧았다.

‘보증금 두 번째 돈을 아직 못 냈다.’

나는 그 문장을 어디에도 쓰지 않았다.

필체를 비교했다. ‘ㄹ’의 마지막 획을 위로 튕기는 버릇, 숫자 2의 밑을 길게 긋는 버릇이 같았다. 그래도 내 글씨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사람 글씨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공책을 덮고 열쇠 꾸러미를 세 번 세었다.

다시 펼쳤을 때 4월 5일 날짜 아래에도 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서부터는 읽지 않았다. 읽으면 그 문장에 맞춰 행동하게 될 것 같았다.

4월 5일 (일), 오전

계단이 쓸려 있지 않았다. 201호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났고 대답은 없었다.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오늘 오후에 어머니를 모시러 갈 거라고 했다. 소장은 이참에 퇴실 확인서도 처리하자며 5시에 오겠다고 했다.

관리실 서랍을 열다가 201호 영수증이 손에 걸렸다. 버리려던 한 장의 수납 날짜는 3년 전 4월 6일이었다. 수납인 칸에는 이름 대신 ‘관리인’이라는 도장만 찍혀 있었다. 그런데 금액 옆에 내가 어제 공책에서 본 것과 같은 숫자 2가 있었다. 밑줄이 유난히 길었다.

지하 공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201호에게 영수증을 보여 줬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찾지도 않고 한참 들고 있었다.

“그 사람도 썼어. 쓰고 나면 적힌 대로 안 할 수가 없다고.”

남편도 지하 공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영수증을 반으로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자기 공책을 썼고 보여 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아들이 오면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했다. 요양원이 싫은 거냐고 하자 이번에는 내 겨드랑이에 낀 지하 공책을 가리켰다.

“너는 뭘 봤니.”

아직 안 본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4월 5일 (일), 오후

소장이 오기 10분 전에 201호 아들이 먼저 왔다. 문을 두드리며 병원 예약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안에서는 라디오만 들렸다. 그는 내게 비상 열쇠를 달라고 했다.

관리실 열쇠함의 201호 비상 열쇠는 입주자 안전을 확인해야 할 때 쓸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넘기는 열쇠는 아니었다. 안에서 대답이 없다면 경찰이나 119와 함께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소장에게 전화했더니 아들에게 주라고 했다. 퇴실 서류에 사인하면 밀린 관리 수당도 오늘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관리실로 내려가 지하 공책을 펼쳤다.

읽지 않으려던 오늘 날짜 아래에 네 줄이 있었다.

‘5시 12분, 비상 열쇠를 건넸다. 201호 퇴실 확인. 열쇠 2개 회수. 잔존 물품 없음.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시계는 5시 8분이었다.

마지막 줄의 ‘문’이 201호인지 관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는 아들이 문고리를 잡아 흔들었다. 나는 비상 열쇠를 손에 쥔 채 201호로 올라갔다.

할머니는 안에서 걸쇠를 채워 놓고 있었다. 문틈으로 내 손의 열쇠를 보더니 아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그 종이에 내가 나갔다고 쓰면, 나는 정말 나간 사람이 돼.”

아들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치며 휴대전화를 문틈 가까이 들이밀었다. 화면은 금세 꺼졌고, 할머니는 보지 않았다. 걸쇠를 풀 생각도 없어 보였다.

5시 12분이 되었다.

나는 열쇠를 건네지 않았다.

4월 5일 (일), 밤

아들은 경찰과 다시 오겠다며 갔다. 소장은 끝내 오지 않았고, 전화로 내일 새 관리인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밀린 수당에서는 열쇠공 비용을 빼겠다는 말도 했다. 관리실에 돌아와 지하 공책을 확인했다.

첫 줄은 달라져 있었다.

‘5시 12분, 비상 열쇠를 건네지 않았다.    퇴실 확인. 열쇠 2개 회수. 잔존 물품 없음.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둘째 줄에서 ‘201호’가 있던 자리는 종이만 얇게 벗겨져 있었다. 지운 가루가 책등 안쪽에 끼어 있었다.

관리용 열쇠 꾸러미를 책상 서랍에 넣고 거울 앞으로 갔다. 손을 들자 거울 속 손이 늦게 올라왔다. 손을 내리자 이번에는 거울 속 손이 먼저 내려갔다.

한 번 더 해 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열쇠 2개를 꺼내 우편함 위에 올려놓았다. 현관 열쇠와 103호 열쇠였다. 내 주머니 안에서는 금속이 서로 부딪혔다. 내 뒤의 관리실 문은 닫혀 있었는데, 거울 안에는 불 켜진 책상이 보였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낮에는 없던 새 퇴실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 퇴실 대상은 201호, 퇴실일은 4월 6일로 인쇄돼 있었다. 관리인 확인란은 비어 있었다.

서랍에서 아까 넣어 둔 열쇠 꾸러미가 손등에 걸렸다. 손잡이에 붙은 종이표가 살을 긁었다. 201호라고 쓴 글씨는 손때에 번져 있었다.

나는 퇴실 확인서의 201호에 두 줄을 그었다. 그 옆에 관리인이라고 썼다. 확인란에는 임대차 계약서에 썼던 내 이름을 적었다.

4월 6일 (월)

소장은 아침 9시에 새 관리인과 오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관리 일을 그만두면 감액이 끝난다는 특약대로 다음 달부터 원래 월세를 받겠고, 밀린 보증금은 계약 위반으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나는 문자를 세 번 읽고 옷장부터 비웠다.

옷은 여행 가방 하나와 비닐 가방 둘에 다 들어갔다. 전기밥솥은 중고 거래 앱에 올렸고, 집주인이 사 준 매트리스는 두고 간다. 관리실 창틀의 사이다는 201호 문 앞에 놓았다.

지하 공책의 다음 장에는 오늘 날짜가 생겨 있었다.

‘현관 1개, 103호 1개. 열쇠 2개를 우편함 위에 둔다. 공책은 지하 선반 맨 끝에 놓는다.’

관리용 열쇠 꾸러미는 서랍에 둔 채, 표지가 벗겨진 공책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선반 맨 끝에 세웠다. 페인트통에 걸려 기울어진 것을 한 번 바로잡았다.

올라왔을 때 201호 문 앞의 사이다가 없어져 있었다. 계단에는 빗자루를 끌고 내려온 가는 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관 열쇠와 103호 열쇠를 우편함 위에 놓았다. 거울에는 우편함과 열쇠 2개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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