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제위께

[정리자 주 — 아래 기록은 2011년 전라북도 김제의 한 폐농가를 철거하던 중 반닫이 밑에서 나온 1926년(병인년) 속기첩을 풀어 쓴 것이다. 표지 안쪽에는 ‘경성신문사 사회부 백승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로 두었다.]

속기 제1호. 병인년 6월 10일 밤.

순종 인산과 학생 시위로 선배들은 모두 거리와 경찰서에 나가고, 나는 편집국에 남아 독자 편지를 추린다. 장마가 일러 벽지가 눅어 들뜨고 활자 상자에서는 쇳내와 곰팡내가 함께 오른다.

금일 편지 3통이 눈에 걸린다. 부안, 나주, 해남에서 온다. 필적도 종이도 다른데 내용이 같다. 논두렁에 낫 1자루가 꽂힌다. 자루에는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고, 날에는 사흘 뒤 날짜가 먹으로 적혀 있다.

부안 편지에는 죽은 사람 이야기도 있다. 낫이 선 논의 주인은 면서기를 지낸 노인이다. 그는 날짜가 되기 전날 낫을 뽑아 아궁이에 넣는다. 자루는 타지만 날의 먹글씨는 남는다. 이튿날 새벽 노인은 자기 논 물꼬에서 죽는다. 물은 발목에도 못 미치는데 입과 코에서 검은 흙물이 나온다고 한다.

나주 편지의 낫자루에는 ‘임병오’, 해남 편지에는 ‘이학수’가 새겨져 있다. 둘 다 그 고장에서 들어 본 노인이 없다는 말이 붙는다. 봉투 3개에서는 뻘내보다 석유와 쇠 닦는 가루 냄새가 짙다.

한 부장은 시위 기사 틈에 반 칼럼이면 좋겠다고 한다. 경찰이 기사를 들어내면 이런 것이 빈 지면을 막는다고 한다. 나는 ‘장마철 논에 괴이한 낫’이라는 제목으로 세 고장을 싣고 말미에 한 줄을 붙인다.

이와 같은 일을 목도한 독자 제위는 낫자루의 이름과 그 논의 내력을 본사로 기별하여 주시기 바란다.

속기 제2호. 6월 16일.

6일 만에 편지 27통이 온다. 전부 호남이다. 죽은 이는 아직 첫 편지에 적힌 부안의 전직 면서기 하나뿐이다. 그는 얕은 물에서 죽고 손목에는 젖은 볏짚 자국이 남는다.

첫 기사 뒤 협박을 받은 집에는 신문 오린 것이 먼저 도착한다. 내 기사의 제목과 독자 제위께라는 마지막 줄을 붉은 먹으로 둘러 놓은 것이다. 뒷면에는 낫자루의 이름을 신문사에 해명하고, 융희 3년의 토지문서를 사흘 안에 내놓으라고 적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논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있다.

한 부장은 그 대목을 기사에서 뺀다. 살인자가 우리 신문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경찰이 윤전기를 봉한다고 한다. 대신 독자통신란을 반 면으로 늘린다. 광고부에서 비누와 고무신 광고가 붙는다.

나주에서 두 번째 편지가 온다. 임병오는 융희 3년 가을 일본군 토벌대에 끌려간 자작농이다. 제사에는 지금도 지방을 쓰지만 관청 기록에는 죽은 날이 없고 시신도 없다. 그의 논은 토벌 뒤 헌병보조원 문 씨에게 넘어간다. 문 씨 집에 간 협박장에도 임병오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한다.

나는 ‘낫 임자를 찾음’이라는 작은 기사를 쓴다. 임병오의 이름을 그대로 싣고, 유족이나 옛일을 아는 사람은 본사로 오라고 한다.

기사는 이튿날 아침 나간다. 나주 지국에서 그날 밤 전보가 온다. 문 씨가 자기 논에서 죽고, 그의 주머니에서는 낮에 배달된 우리 신문이 나온다. 살인자는 지면을 확인한 뒤 움직인다.

속기 제3호. 6월 21일.

남행 열차를 타고 나주로 간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임병오의 며느리 최 씨다. 남편은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죽었고, 최 씨 혼자 제삿날을 지킨다. 그는 나를 보자 인사보다 먼저 임병오라는 활자가 찍힌 신문을 펼친다.

낫이 꽂혔던 묵은 논은 수리조합 공사장 아래에 있다. 물꼬 옆 흙이 새로 파였고, 낫자루가 들어갔던 구멍 곁에는 사각 못이 박힌 구두 자국이 남는다. 농부들이 신는 짚신 자국과 다르다. 수문 자물쇠에는 긁힌 흔적이 없으니 열쇠로 열었다.

최 씨는 작년에 수리조합 인부들이 물길을 넓히다 뼛조각을 꺼냈다고 한다. 조합 감독은 소뼈라며 다시 묻게 한다. 그 뒤부터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 마을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융희 3년 일을 묻는다. 이름은 모른다. 조합에서 나왔다고만 한다.

융희 3년, 벼를 베던 남자 13명이 낫째 불려 나온다. 6명은 앞줄, 7명은 뒷줄에 무릎을 꿇는다. 마을 서기가 이름을 부르면 순사가 한 사람씩 물꼬 너머로 데려간다. 총소리는 해가 진 뒤 난다.

무엇보다 먼저 적어 둘 것. 최 씨는 직접 보지 못한다. 그때 일곱 살이었다. 마을에는 다른 기억도 있다. 잡혀간 이들이 실제 의병에게 쌀을 댔다는 사람, 산으로 달아났다는 사람, 만주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물꼬 아래의 뼈를 제대로 조사한 사람은 없다.

문 씨의 아들이 협박장을 보여 준다. 타자기가 아니라 철필로 눌러 쓴 글씨다. ‘임병오의 죽음을 폭도 도주로 적은 원본을 경성신문사 백승하에게 보내라.’ 끝에는 사흘 뒤 날짜가 있다. 문 씨는 문서를 태우고 경찰에도 알리지 않는다. 토지대장을 다시 뒤질까 두려웠다고 아들이 말한다.

봉투 소인은 전주다. 문 씨가 죽기 이틀 전 오후에 찍힌다.

속기 제4호. 6월 26일.

전주에서 수리조합 기사로 일하는 최윤재를 찾아간다. 전문학교 시절의 지기다. 그는 내가 보여 주기도 전에 문 씨 논의 수문 번호를 안다. 그 구간 보수는 자신이 맡았다고 한다.

최 기사는 군별 수리계획도와 토지대장, 토지조사부를 빌리고 유족에게서 구문기 사본을 받아 밤새 겹쳐 본다. 낫이 나온 논은 모두 융희 3년 뒤 주인이 바뀐다. 사라진 자작농의 땅을 면서기나 보조원, 그 친족이 헐값에 넘겨받는다. 죽은 사람은 그때 새 소유자로 오른 사람과 겹친다.

그는 토벌 때 없어진 사람 13명의 이름을 모으고 있었다고 한다. 수로 공사에서 뼈가 나왔고, 관청이 다시 묻으라고 한 뒤 개인적으로 조사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제삿날을 알아도 죽은 장소와 문서를 모른다. 협력자 집에는 서류가 남아 있다. 조합에서는 그에게 호남선 연변 수문을 점검하는 출장을 자주 맡긴다.

낫을 누가 꽂느냐고 묻는다. 최 기사는 수문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논에 들 수 있다고 답한다. 그의 책상 밑에는 수로 점검 때 신는 장화와 사각 못을 박은 작업화가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논에 남은 구두 자국을 말하지 않는다.

속기 제5호. 6월 30일.

나는 낫자루의 이름을 한꺼번에 싣지 않는다. 한 호에 한 사람씩 ‘농구 임자 찾음’으로 싣는다. 이름 아래에는 고장만 적고 토벌과 죽음은 쓰지 않는다. 검열계가 볼 때는 유실물 기사다.

두 번째 이름은 박진수다. 기사가 나간 날 부안의 또 다른 전 면서기 집에 낫이 선다. 면서기는 협박장을 들고 경찰서까지 갔다가 문 앞에서 돌아선다. 3일 뒤 논의 배수로에 묶인 채 죽는다. 세 번째 이름은 이학수다. 해남의 지주는 토지문서 대신 돈을 신문사로 보낸다. 돈은 도착하고, 그는 그날 밤 수문 아래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죽은 노인들의 집안 싸움으로 처리한다. 유족도 토벌 문서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빼앗은 땅을 다시 내놓아야 할까 겁내기 때문이다. 한 부장은 우리 이름이 협박장에 적힌 사실을 끝까지 지면에서 뺀다.

나는 넷째 이름을 싣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아무도 죽지 않는다.

8일째 되는 아침, 내 책상에 낫 1자루가 놓여 있다. 자루에는 이름 대신 내가 난 마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날에는 7월 20일이라고 적혀 있다. 편집국 문지기는 새벽에 최 기사가 다녀갔다고 한다. 지방 지도를 돌려주러 왔다고 했다.

한 부장은 경찰을 부르자고 한다. 나는 낫을 신문지로 싸서 한 부장 금고에 넣는다. 경찰이 오면 먼저 내 아버지 이름부터 물을 것이다.

속기 제6호. 7월 8일.

같은 날 김제에서 편지 1통이 온다. 발신인 이름은 없다. 봉투 안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있다.

마당에 아버지가 앉고 어머니와 형, 누이가 선다. 열 살의 나는 앞줄에 있다. 맨 왼쪽에는 흰옷 입은 사내가 반 걸음 물러나 서 있다. 그의 한 손이 내 어깨에 얹혀 있다. 나는 그 손을 어머니의 손으로 기억한다. 사진 속 어머니의 두 손은 치마 앞에 모여 있다.

흰옷 사내 곁에는 내 또래 사내아이가 서 있다. 사진 끝에 반쯤 잘려 얼굴은 없고, 왼손만 아버지의 소매를 잡는다. 사진 뒤에는 아버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다.

박석주. 야학 선생. 윤재. 박석주의 아들. 외가 최씨에게 보냄.

행리 밑바닥의 토지문서를 뜯는다. 얇은 미농지 한 장이 나온다. 일본군 임시파견대가 마을 서기에게 의병에게 식량을 댄 혐의자 13명을 적어 내라고 한 문서다. 마지막 이름은 박석주이고, 끝에 아버지의 지장이 찍혀 있다.

나는 열 살 그날을 조금씩 기억한다. 군인들이 사랑채에서 아버지에게 빈 종이를 내민다. 이름을 쓰지 않으면 집집마다 남자를 하나씩 데려가겠다고 한다. 박 선생이 나를 부엌 뒤로 숨긴다. 군인 하나가 아이까지 데려가면 열셋을 채우겠다고 웃는다.

그 뒤는 기억과 사진이 다르다. 나는 아버지가 박 선생을 썼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확인서의 마지막 이름은 아버지 글씨다.

박 선생의 논은 토벌 뒤 우리 집으로 넘어온다. 아버지는 그 논을 팔아 형의 혼사와 내 경성 유학을 치른다. 남은 한 마지기는 지금도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

최윤재는 전문학교에서 자기 고향을 묻지 말라고 했다. 졸업 뒤에는 수리조합을 택했다.

속기 제7호. 7월 14일.

최 기사의 하숙방에 간다. 주인은 그가 사흘 전 짐을 빼 김제로 갔다고 한다. 빈 방에는 수문 열쇠를 찍은 밀랍, 신문사별 발송 시간표, 사라진 13명과 현재 소유자를 맞춘 토지 등기 초본이 남아 있다. 죽은 4명의 이름에는 붉은 점이 찍혀 있다. 조합 출장부에서 뜯은 장에는 부안·나주·해남의 점검일이 각 사망 전날로 적혀 있다. 밧줄과 볏짚을 꼬아 만든 손목 고리도 있다. 맨 밑에는 최초 세 고장의 편지 초고가 있다. 서로 다른 지방말과 필체를 베낀 흔적이 여백에 남는다. 모두 문을 열면 바로 보이도록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가 내게 찾히려고 남긴 방이다.

책상 서랍에서 보내지 않은 협박장 1장을 찾는다.

‘백승하는 박석주의 이름, 토벌 명단, 백씨 집안이 받은 토지를 7월 20일자 신문에 밝힐 것. 혼자 와서 확인서 원본을 박석주의 논 물꼬에 둘 것. 경찰을 데려오면 내가 가진 명단과 토지문서를 태우고 지금 논을 부치는 사람으로 열셋째 자리를 채울 것.’

아래에는 윤재라고만 적혀 있다. 사진 뒤에서 본 이름이다. 아버지 성은 버리고 외가 성을 붙였다. 최윤재.

나는 증거를 그대로 들고 경찰서로 가지 않는다. 먼저 밀랍과 협박장, 등기 초본을 베껴 한 부장에게 맡긴다. 내가 21일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내고, 현재 소작인은 그 전에 친척 집으로 피신시키라고 한다. 지금 경찰에 토벌 명단을 넘기면 살인 증거보다 금지된 옛 기록부터 없어질 것이다. 최윤재가 가진 13명의 신원 자료와 다른 협박 대상의 이름을 확보하려면 약속한 논에 들어가야 한다.

해설 기사를 쓴다. 융희 3년 토벌, 사라진 농민 13명, 물꼬에서 나온 뼈, 토지 이전, 최윤재의 협박과 살인을 전부 적는다. 검열계에서 붉은 줄이 돌아온다. 4단 가운데 남는 것은 낫 사진과 사람 이름뿐이다.

한 부장은 이번 호를 비우고 지금 경찰을 부르자고 한다. 나는 지면에서 잘린 13명의 이름만 ‘농구 임자 찾음’ 아래 넣어 달라고 한다. 최윤재의 이름도 열넷째 줄에 쓰고, 그 밑에 ‘김제 박석주의 논 한 마지기는 경성신문사 백승하 명의임’이라고 붙인다. 한 부장은 그 한 줄까지 쇠활자로 짠다. 원고 전문은 사본 2부로 만들어 한 부장과 변호사 사무실 급사에게 나눠 준다.

속기 마지막 장. 7월 20일 밤.

고향 논에는 낫 13자루가 꽂혀 있다. 6자루는 앞줄, 7자루는 뒷줄이다. 최 씨가 말한 토벌 직전의 대열을 그대로 옮긴 모양이다. 논 가장자리에는 낫을 나른 손수레 자국과 최윤재의 사각 못 구두 자국이 남아 있다.

나는 가족사진과 확인서를 꺼내 물꼬에 둔다. 최윤재는 사진 속에서 잘려 나간 제 왼손을 한동안 본다. 그의 곁에는 죽은 4명의 집에서 꺼낸 토지문서가 기름종이에 싸여 있다.

그는 첫 면서기를 죽여 신문사로 편지가 가게 했다고 한다. 뒤의 세 명에게는 먼저 문서를 내놓고 신문에 사실을 밝히라고 했다. 돌아온 것은 욕설, 돈, 경찰에 보낼 고발장뿐이다. 나머지 이름 옆에는 아직 날짜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관청에 낸 진정은 접수 도장과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신문을 골랐다. 한 장을 없애도 같은 이름이 수백 장에 남고, 죄지은 집에서는 자기 이름이 활자가 되는 것을 문서보다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이름까지 신문에 실었다고 말한다. 최윤재는 그 지면을 보기 전에는 믿지 않는다. 새벽 첫차로 신문이 오기까지 한 시간이 남는다.

그가 마지막 낫 앞에 별지와 붓을 놓는다. 박석주의 논이 우리 집으로 넘어온 경위와, 내가 그 돈으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내 손으로 쓰라고 한다. 쓰면 살려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확인서 원본을 곁에 펴 두고 별지에 내 이름을 쓴다. 최윤재가 붓을 받아 그 아래 증인란에 제 이름을 쓴다.

논 건너 철길에서 새벽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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