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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행MIDNIGHT G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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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요가 찾아왔다

예전부터 참을성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갓 태어났을 때는 밤에 우는 일이 적어 어머니가 한결 수월했다고 한다. 여동생이 생기자 오빠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참아야 했다. 초등학교 때는 배구 서브를 잘 넣지 못해 방과 후까지 특별 훈련을 계속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같은 반 불량배들이 시비를 거는 일도 있었지만, 끈기 있게 반응하지 않고 버티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재단에 소속된 뒤에는 여러 연구 때문에 각지를 전전했다. 참을성이 많아 어떤 환경에 보내도 성과를 낸다는 평가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 결과 중요한 자리를 맡는 일이 드물어 승진 코스에서 벗어났다. 부하였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를 앞질러 갔다. “다음 차례까지 기다려 주게.” 그런 말을 상사에게 5번은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때는 위에도, 아래에도 거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SCP-3519. “2019년3월5일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 그 전에 자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굳게 믿게 만드는 전염성 밈이다. 세상의 종말 따위는 오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인간은 장작처럼 죽어 갔고, 그 탓에 세상은 금방이라도 다 타 버리려 하고 있다. 재단도 GOC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허무하게도 자살 밈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갔다. 아직 무사했던 우리 구역-055의 직원 몇 명은 격리된 오두막으로 피신했다. 안토니, 에텔, 고든, 토미, 카롤린, 조지, 헨리, 필립. 10명이던 구성원은 어느새 2명까지 줄어 나와 마리레츠만 남아 있었다.

오두막 생활은 지루하다. 그저 손을 놓은 채 세상의 종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컵 하나에 가득 담긴 신경안정제, 항우울제, 감정억제제, 시험 제작된 대항 밈 제제를 들이켠다. 이 약은 무력감이라는 병에는 효과가 없다. 약의 부작용으로 머릿속에는 늘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졌고,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마리레츠도 상당히 지쳐 있었던 모양인지 오두막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야 했다.

어느 날 밤 마리레츠는 “당신은 참을성이 많네요.”라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새벽녘, 총성에 잠에서 깼다. 마리레츠는 한 손에 권총을 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카펫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해서였는지, 아니면 감정억제제의 효과였는지, 나는 지극히 침착하게 마리레츠를 밖으로 옮겨 묻어 주었다. 삽을 내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다운 감정이 솟아났다. 어제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아마 그녀를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자살을 막을 만큼의 여유는 내게 없었다.

그나저나 SCP-3519의 변칙성을 알면서도 그녀는 왜 오두막에 권총을 가져왔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 왜 권총과 총알 한 발을 버리지 않고 내 책상에 남겨 두고 있는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3월5일이 찾아왔다.

해는 뜨고, 또 진다. 하지만 지상은 무척 조용하다. 어디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거리에는 말하는 사람이 없다. 수도도 전기도 끊겼다. 무인 위성에서 오는 신호도 머지않아 끊길 것이다. 나는…… 살아남았다. 전날 약 복용량을 잘못 맞춰 하루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던 모양인지, 눈을 뜨니 3월6일이었다. 나는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 자살 밈을, "그날"이 와도 끝까지 견뎌 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살했다. 어머니는 목을 맸다. 아버지는 차에 치였다. 여동생은 약물을 과다 복용했다. 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동료는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모두, 모두, 이제 없다.

그러니 이제 참을 필요는 없다.

나는 자동차 열쇠와 주위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배낭에 쑤셔 넣고 오두막에서 기어 나왔다. 뒷좌석에 배낭을 던져 넣고 액셀을 힘껏 밟는다. 엔진이 으르렁거리고 타이어는 흙을 튀긴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향하듯 높이, 높이 올라갔다. 산꼭대기에서 차를 내리니 주위에는 오직 하늘의 푸른빛만이 있다. 마을, 숲, 호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가장 위에 있는 거다.

“크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 하늘. 머리 위 아득한 곳에서 모든 것을 비추는 새빨간 태양.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적갈색 대지에는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하얀 새가 노래하며 날아오른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는 멋진 세상.

“후후후.”

그저 사람이 없을 따름이다. 그래도 세상은 이렇게나 밝게 물들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죽을 수 있다니, 나는 얼마나, 얼마나……

“아하하…… 하하…… 핫하하…… 하하하……”

3월5일에는 늦었지만, 이제 자살을 참을 필요는 없다.

“날씨 좋네.”

지구상에서 마지막 총성이 울렸고, 그 뒤에는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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