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밤을 기록합니다GLOBAL HORROR ARCHIVE
미간행MIDNIGHT GALLEY
내 서재 0

남자친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퇴근 후에 만나자는 제안은 진이 빠진다.

나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 없이 “안 돼요”라고 말하는 법을 모르고, 미안해하는 게 표정에도 드러난다. 거절하는 건 너무 어렵다.

어쩐지 좋다고 하는 편이 더 쉽다. 덜 숨 막힌다.

“네, 좋아요,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게 “사실은, 안 되겠어요.”보다 쉽다.

핑계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보다 좋다고 하는 게 쉽다.

그러니 동료인 톰이 내 책상 앞에서 나를 꼼짝 못 하게 붙잡아 놓고 “너. 나. 술. 오늘 밤.” 같은 말을 했을 때, 그냥 내가 안쓰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람처럼 들리지 않게 된 지는 오래였다.

처음에는 톰도 곁에 있었다.

그는 내 집 문 앞에 식료품을 두고 갔고, 인스타그램 메시지와 문자와 밈을 남겼고, 그러다 마침내 더없이 편안한 침묵만 남겼다. 나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어울리고 정상인처럼 느끼고 싶었다. 사람처럼.

침대에 처박혀 지내는 게 더 쉬웠다.

집에 가서, 남은 음식을 먹고, 신발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쓰러져 고장 난 휴대폰으로 암울한 게시물들을 끝없이 넘겨 보는 게… 더 나았다. “전 괜찮아요.” 목구멍 뒤에 막혀 있던 말이 겨우 나왔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이 떨렸다.

말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문자를 보내는 게 더 쉬웠다.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도 차단했다는 게 생각났다.

그 사람들은 그저 내가 괜찮은지 물었을 뿐이다.

어쩐지 나는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그 멍청한 휴대폰을 망가뜨렸다.

“라라?” 톰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파도가 내 귀 안으로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

진짜 사람과 말을 나누지 않은 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톰은 팔짱을 낀 채 내 위로 우뚝 서서 벌써부터 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순간 전까지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이 없는 그림자였고, 얼굴 대신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

옆자리의 노아는 웅웅 울리는 분홍색 살덩이 벽이었다.

“라라!” 톰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저기. 괜찮아?”

말을 나누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어떤 사이냐에 따라 물음표이거나 맥동하는 무의 덩어리였다. 톰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전에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밈을 보내 줬고, 어느 날 밤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줬다.

우리는 우버를 함께 탔다. 그가 내게 키스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싫다고 했다. 톰은 편안했다. 익숙했다. 그의 얼굴에서 “?”가 번져 사라졌고, 나는 딱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 그가 있었다. 까슬하게 자란 수염, 입술에 슬며시 걸리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마 서른 초반쯤. “우리 둘만 가는 거야, 알겠지?” 그가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걱정하지 마.” 톰이 작게 웃었다. “너한테 작업 거는 거 아니니까. 우린 그냥 친구잖아.” 그는 윙크하며 몸을 뒤로 뺐다. “최근에 알게 됐는데, 난 사실 남자랑 있는 게 더 좋더라고.”

톰은 어쩐지 내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좋아요.” 늘 그렇듯 삼켜 버리기도 전에 말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내가 상상한 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한 번 더 말했다.

아니었다. 톰은 진짜였다.

내 앞에 서서 커피를 아껴 마시듯 조금씩 홀짝였고, 가느다란 흰 김이 움직이지도 않고 맴돌았다.

“정말?” 톰의 눈이 반짝였고, 갑자기 몸이 훨씬 따뜻해졌다.

“좋아! 퇴근하고 아래층에서 만나. 밥 먹으러 가자.”

난방을 켠 모양이었다.

마리가 노트북을 들고 나를 스치며 지나갔고, 마리는 정말 마리처럼 보였다.

주황색 그림자가 아니라.

“좋아요.” 나는 웃었다. 사람이 으레 웃어야 하는 것처럼.

일을 마치고 퇴근 처리를 한 뒤, 입에 담배를 문 채 출입구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거리가 있어 모습이 조금 흐릿했다. 온몸이 완전히 렌더링되지는 않은 것처럼 윤곽이 해져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다행히 그의 모습이 번지듯 또렷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톰입니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는 게 좋았다. 이번에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라라예요.”

톰이 씩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가시죠.”

톰은 장난스럽게 깡충깡충 뛰며 나를 끌고 갔다. 나는 웃었다. 웃어 본 지 너무 오래됐다. 웃는다는 게 낯설고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톰은 저녁을 먹으러 나를 텅 빈 식당에 데려갔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 앞에서는 황홀한 보랏빛이 넘실거리는 수족관을 배경으로, 뒤엉켜 맥동하는 분홍색 벽들이 나를 산산이 부술 듯했다.

사람 크기의 그림자들은 하나하나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내 시선에 붙들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끈적한 노란 눈 하나가 나타나더니 수가 늘어났고, 꿈틀대는 살 위로 오돌토돌 돋아났다. 메스꺼움이 파도처럼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촛불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하게 빛나는 촛불.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 아무 문제 없었다. 전부 괜찮았다.

“괜찮아, 라라?” 톰의 목소리가 다시 바다처럼 들렸다.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

“넌 나를 안 보고 있어.” 톰이 속삭였다. 탁자가 덜컥 움직였고 내 잔이 넘어졌다.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톰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로 무너져 내리더니, 낮게 우르릉거렸다.

굵고 붉은 방울들이 그의 접시 위로 튀었다.

“왜 이제는 나를 안 보는 거야, 라라?”

고개를 들자, 꿈틀거리는 선홍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했다.

“라라?” 톰의 목소리였다. “너… 괜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나는 꿈틀거리는 붉은 것에게 말했다. 그 목에 걸린 줄을 잡아당기며 미소 지었다.

사무실에서 내게 잘해 준 사람은 톰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몸도 다른 사람들처럼 녹아내렸을 때, 나도 그에게 잘해 주기 시작했다. 새 머리를 찾아 줬다. 출근할 때 입던 옷까지 입혀 줬다. 다시 줄을 잡아당기자 그가 으르렁거리며 비틀비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입마개를 씌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요.” 내가 그에게 말했다. “DVD도 보고, 제가 찾아낸 수프도 좀 데워 먹어요.”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얼굴을 뒤덮어 숨을 막았다. 나는 다시 잡아당겼다. 더 세게.

그가 웃었고, 촛불이 돌아왔다. 내 얼굴 앞에서 맥동하는 붉은 덩어리 위로, 입이 쫙 벌어진 행복한 미소가 생겨났다. “좋은 생각이네.”

게시자 /u/Trash_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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