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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도포드 1023: 그란디폴리아

그란디폴리아

엘리엇 기시 지음

첫 번째에는 해야 한다는 대로 모든 것을 한다. 삭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정에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돼지 피를 담은 병을 들고 쐐기풀 화관을 쓴 채, 두피가 따끔거리는 것은 최대한 무시한다.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걷는다. 맨발 하나가 흙에 깊이 내려앉고 나서야 다른 발을 들어 올리며, 찾는 것이 나올 때까지.

나무는 제 몸을 감싸 주는 움푹한 땅에 음탕하게 드러누워, 가지를 넓고 낮게 벌리고 있다. 아메리카너도밤나무다. 창백한 나무껍질이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번뜩인다. Fagus grandifolia. 그게 학명이다. Fagus grandifolia, 큰잎 너도밤나무. 오기 전에 찾아봤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잡다한 지식으로 마음을 단단히 무장하려고 찾아봤다. 내가 여기 하러 온 짓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줄기 둘레에 조심스럽게 원을 그리며 피를 붓는다. 쐐기풀 화관이 벗겨지지 않도록 가장 낮은 가지 아래로 몸을 숙이는 데도 신경을 쓴다. 피는 간신히 모자라지 않을 정도다. 원을 다 이을 무렵에는 끈질기게 남아 있던 몇 방울만 유리 벽을 타고 흐른다.

몇 피트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자 축축한 흙 속으로 무릎이 파묻힌다. 눈을 감고, 행운을 빌며 손가락을 포갠 채, 그 말을 외우고 기다린다.

다시 눈을 뜨기도 전에 그녀가 와 있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전기 같다. 팔의 털을 곤두세우고 비틀리게 하는 전류. 한편으로는 냄새 같다. 나를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밀어내는 냄새, 옛 연인의 땀에 새 연인의 침을 섞어 놓은 냄새. 그러면서 또다시, 그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절정에 이르거나 추락하기 직전 뱃속 깊은 곳이 푹 꺼지는 듯한 낙하감처럼, 크게 휘몰아치는 전율이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피부는 달빛 같고 팔다리는 느슨하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팔의 정맥이 보인다. 푸른색 대신 초록색과 금색인 정맥이, 이끼 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 그녀는 산들바람이라도 맞는 듯 살짝 흔들린다. 알몸이다.

너도밤나무에는 수꽃과 암꽃이 피고, 암꽃은 쌍으로 싹이 튼다. 나무껍질과 잎에 병이 생기기 쉽다. 뿌리는 촘촘하고 얕게 뻗는다. 때로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일반적인 과정을 건너뛰고 뿌리에서 새 묘목이 돋아난다. 머릿속에서는 최근에 얻은 이 지식들을 미친 듯이 뒤진다.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뭐든 절박하게 찾으면서. 내 실험에 결과라는 게 있다 해도, 어쨌든 좀 더 비유적인 형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실체를 갖추고, 이토록 분명하게 거기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뭘 원하지?” 그녀가 묻는다. 목소리는 그저 여자의 목소리다. 내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집에서 할 말을 준비했고, 숲을 지나오면서 작은 소리로 연습했다. 이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게 연습한 말들이 쪼그라들어 죽는 게 느껴진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다고 들었어요.”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드리아드의 얼굴은 통나무의 심재처럼 단단하다. 그녀의 나무가 가진 학명처럼, ‘드리아드’도 이번 일을 위해 배운 단어다. 엄밀히 말해 그녀에게 해당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찾은 것 가운데 그나마 가까운 말은 그것 하나다.

“그럼 너도 하나 갖고 싶다는 거겠지.” 그녀가 말한다. “뭐지? 명성? 부? 복수? 말하든가 떠나든가.”

말투를 들으니 그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게 분명하다. 말해도 되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 걸어가도 된다. 그녀에게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점이 도움이 된다. 말하기 전에 깊이 들이마신 숨도 도움이 된다.

“사랑에 빠졌어요.” 내가 말한다.

입 밖에 내놓으니 너무도 단순하게 들려서 싫다. 말이 공기에 닿기도 전에 상투적인 문구가 되어 버린다.

“사랑에 빠졌다.” 드리아드가 되풀이한다. 벌써 지루한 듯한 목소리다. “너희는 늘 사랑에 빠지더구나. 누구지?”

“여자예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는다. 천둥처럼 뛰던 맥박, 갈망에 앓으며 보내던 밤들의 기억을 막으려고. “제가 듣는 인체 소묘 수업의 모델이에요.”

드리아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의 공기는 여름을 꿈꾸는 밤의 숲이 내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웅성거림으로 서서히 차오른다.

“저는 화가가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황을 설명하고 싶다. 그녀에게, 나 자신에게. “그런데 대학 다닐 때는 재미로 그림을 그리곤 했고, 지금 하는 일이 스트레스가 정말 심하거든요. 제 직업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젓는다. 그녀가 알 필요는 없다. “퇴근하고 제정신을 유지할 만한 일을 하고 싶었어요. 목요일 밤에 주민 여가센터에서 그림 수업을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목요일에는 늘 시간이 되니까, 한번 해 보자고 생각했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드리아드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 모습에 용기가 난다.

“그래서 첫날 저녁에 들어갔는데요.” 나는 계속 말한다. “목탄이랑 새 스케치북을 챙겨서 준비를 다 하고 갔더니, 선생님이 누드를 그릴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럴 줄은 몰랐어요. 뭔가…… 글쎄요, 과일 같은 것부터 시작할 줄 알았죠. 그런데…….”

그때 그 여자가 표범처럼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연한 갈색 피부, 코와 뺨에 흩뿌려진 짙은 주근깨. 형광등 아래에서도 빛나는 회녹색 눈. 옷을 벗는 동안 움찔거리던 도톰한 입술은 이 모든 상황을 좀 우스워하는 듯했다. 내가 그린 것은 전부 그것이었다. 그녀의 입, 그녀의 미소. 선생님은 내 뒤로 다가와 그림들을 보더니 혀를 찼다.

“이건 인체 소묘예요.” 선생님이 말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은 귀걸이가 말에 맞춰 흔들렸다. “몸을 봐야 해요.”

그래서 억지로 그녀의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어느 면에서는 쳐다보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거기서 너무 많은 걸 얻고 있는 것 같았다.

매주 돌아가서 그녀를 그리고 또 그렸다. 가냘픈 팔이 그리는 유려한 곡선, 넓어지는 허벅지, 쇄골의 작은 굴곡과 그림자. 그녀가 오기 전이면 모델 단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빌었다. 그녀의 형체는 늘 내 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밝은 빛의 잔상처럼. 나는 그림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알아보았다. 한 번은 피부 위의 그림자를 재현하는 방법의 예로 다른 수강생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 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 정도면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도, 나도 보지 않았다. 그저 옷을 도로 걸쳐 입고 떠났다.

드리아드에게는 이 중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그녀의 입가가 휜다. 어쨌든 다 들었다는 듯이. 그녀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불가해함을 담아 나를 바라본다. 인간들이 행성의 표면 위를 미친 듯이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다 한 호흡 사이에 살고 죽는 동안, 수백 년을 시간 속에 가만히 서 있었던 존재의 불가해함을.

그녀에게 나는 얼마나 어려 보일까.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하찮을까.

“그 사람이 저를 알아봐 줬으면 해요.” 내가 드리아드에게 말한다. “저는 그 사람을 그렇게 오래 바라봤으니까, 그 사람도 저를 돌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딱 한 번, 그거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부탁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들은 바에 따르면 그것도 규칙 중 하나다. 절대로 ‘부탁해요’라고 말하지 말 것. 그러면 그녀가 대가를 바꿀 테니까. 하지만 부탁은 내 목소리에, 내 눈에, 흙 속에서 움켜쥔 손에 담겨 있다.

드리아드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온다. 한 손을 뻗어 내 턱을 붙잡는데, 그 접촉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움찔한다. 그녀의 피부는 서늘하고 조금 거칠다. 나무껍질처럼.

“다음에 그 여자를 보면.” 그녀가 말한다.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순간이 올 거야. 시선은 아무 목적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겠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은 채. 그러다 네 시선과 마주치면, 멈출 거야.” 그녀가 다시 미소 짓는다. 치아의 끝이 들쭉날쭉하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거야. 자,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나무와 그녀의 선물에 관해 알려 준 사람들은 무엇을 바쳐야 할지도 알려 주었다. 이번에는 그 말이 기억난다.

“기억 하나를 드릴게요.” 내가 말한다.

“어떤 기억?”

어릴 때 것으로 골라요, 그들은 말했다. 어릴 때 일이고 피가 나는 것. 그 여자는 그런 걸 좋아해요.

“맨 처음 기억이요. 저는 세 살이고, 텅 빈 주차장에 엄마와 함께 서 있어요. 엄마는 제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세요. 저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이마가 찢어져요.”

그녀가 탐욕스럽게 길게 숨을 들이마시자, 달빛이 눈에 걸려 번뜩인다. 손이 내 턱에서 머리 옆으로 미끄러져 올라간다. 쐐기풀 화관 바로 아래로. 손가락이 움찔하고, 손톱이 파고든다.

“받아들이지.” 사람들이 말한 그대로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두개골 안에 들어와 있다.

이것도 좀 더 비유적인 일일 거라고 예상했다. 이토록 아플 줄은, 뇌 속을 더듬는 그녀의 손가락이 이렇게 타는 듯할 줄은 전혀 각오하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들은 모두 드리아드가 큰 소리를 싫어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거둔다고 했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떼어 내고 싶은 충동에 맞선다.

뒤죽박죽 뒤엉킨 영상들이 눈앞에서 헤엄친다. 숨 한 번 들이마시는 시간보다도 짧은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수영장에서 다이빙에 실패했을 때의 통증. 7학년 때 입을 맞췄던 남자아이에게서 나던, 버섯을 닮은 이상한 냄새. 대학교 마지막 학년에 시험을 보러 가려고 허둥지둥 교정을 가로질러 내달리던 일. 오래전에 잊었지만 여전히 뇌의 미로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맛과 소리와 광경이, 그저 쓰레기 더미라도 되는 양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걸러져 나간다.

마침내 그녀가 무언가를 붙잡아 집는 것이 느껴진다. 거미처럼 섬세하게, 그녀는 내 안에서 기억의 실을 뽑아낸다. 내 눈에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보이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은빛 가닥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것을 검지와 중지 둘레에 조심스럽게 감는다. 입이라는 검은 우물이 벌어지고, 그녀는 손에 감긴 기억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단맛에 압도되기라도 한 듯 잠깐 눈을 감는다. 그날을, 자전거에서 떨어졌던 일을 떠올리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구멍이 있다. 지하실 바닥에 깔린 것 같은 어둠이.

드리아드가 뒤로 물러난다. 뺨과 가슴에 옅은 홍조가 오른다.

“가.” 그녀가 말하고 돌아선다. 머리가 쑤시는 가운데 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녀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두 번째에는 쐐기풀 화관을 잊는다. 삭이 되기 이틀 전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걷고, 돼지 피가 든 병을 가져간다. 혹시 모르니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피를 붓는 손이 떨린다. 그 말을 외울 때는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떨린다.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구나.” 드리아드가 말한다. 머리카락이 부러진 잔가지처럼 몸 둘레로 뻗쳐 있다. 그녀의 음부는 달빛 속에서 기수처럼 탁하다. “또 부탁할 게 있니?”

나는 흙바닥에 자리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대가가 더 커진다는 건 알겠지.” 그녀가 말한다. “두 번째는 언제나 그래.”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린다. 내 머릿속으로 신이 나서 파고들던 그녀의 손가락을 생각한다. 그 손가락을 빨려고 쩍 벌어지던 입을.

“그 여자가 널 알아봤지, 그렇지 않니?” 이번에는 드리아드가 조금 덜 지루해 보인다. 정말 답을 알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그랬어요.” 나는 침을 삼키며 말한다. “다음 수업에 갔더니 그 여자가 거기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어요. 한쪽 발을 받침대에 올리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든 채로요. 손가락에 명암을 넣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나를 봤어요. 당신이 말한 그대로요.”

그 회녹색 눈이 내 눈과 마주쳤고, 나는 그림 그리기를 완전히 멈췄다. 연필 끝이 스케치북에서 한 밀리미터 떨어진 곳에 떠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시선을 붙들려고, 이젤 너머로 눈을 맞춘 채 있으려고 애썼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에 쏘이기라도 한 듯 움찔하면서.

“그다음에는?” 드리아드가 묻는다. 목소리에 조롱이 조금 묻어난다. “넌 아무것도 안 했겠지?”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좌우할 힘이 얼마나 큰지 너무도 잘 안다. 깊게 숨을 쉬자, 깊게.

“그날 그 여자는 수업이 끝난 뒤에 선생님과 얘기하려고 남았어요.” 내가 대답한다. “나는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짐을 챙기고, 그 여자가 나올 때까지 복도에서 서성거렸어요. 그리고 이름이 뭐냐고 물었어요.”

“레이철.” 그녀가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아귀는 단단했고 피부는 서늘했다.

“술 한잔하러 가자고 했어요.” 눈을 감고 기억에 몸을 맡기며 말을 잇는다. “좋다고, 달리 갈 데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문화 체육 센터 근처 술집에서 마신 술. 그녀는 위스키, 나는 하우스 레드 와인. 첫 잔을 마시며 나눈 예의 바른 대화. 나는 그녀의 목선과 낮고 거칠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두 번째 잔에는 더 환한 미소, 더 편하게 터지는 웃음, 전 애인과 함께 갔다가 엉망이 된 푸에르토리코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내 손목을 만지던 그녀의 손. 세 번째 잔을 마신 뒤에는 슬며시 그녀 쪽으로 더 다가가 다리를 맞붙이고, 술 냄새로 달콤한 숨결을 얼굴에 느꼈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다.

네 번째 잔은 없었다. 우리는 비틀거리며 그녀의 아파트로 돌아가 침대 위로 발라당 쓰러졌다.

“너 떨고 있어.” 그녀가 내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 그랬다.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냄새, 얼굴 위 그림자가 모양을 바꾸는 모습에 압도되어 있었다. 나는 밤새 계속 떨었다. 그녀가 잠든 뒤에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후광처럼 헝클어져 퍼진 곱슬머리, 꿈을 꾸며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입가를 일그러뜨리는 희미한 찡그림을.

“원하는 걸 얻었구나.” 하지만 드리아드의 눈은 다 안다는 듯 빛난다. 이번에도 그녀는 내 머릿속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번에도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기억하는지 알고 있다. 말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말한다.

“다음 날 일찍 나를 깨웠어요.” 내가 말한다. “출근에 늦었다고, 이제 가야 한다고 했어요. 전화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냥 어깨를 으쓱했어요. 막상 전화했더니……”

“있잖아.” 레이철이 말했다. 전화 때문에 일그러진 목소리에서도 짜증이 또렷이 전해졌다. “재미있었지만, 우리 사이가 더 발전할 것 같지는 않아. 그냥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어. 너도 그렇지?”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번 드로잉 수업에는 다른 모델이 있었다. 남자였고, 나는 빠르고 난폭하게 선을 내리그어 그의 형체를 그렸다.

드리아드가 킥킥거린다. 그녀에게는 농담이다. 추악하고도 기막힌 농담. 그러니 나는 더 말하지도, 그녀에게 부탁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 여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요. 미칠 것 같아요. 그날 아침에……” 나는 말을 멈춘다. 정말 이것까지 말해야 할까 싶다가도,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아침, 그 여자가 깨기 전에 욕실에 들어갔는데 세면대 옆에 칫솔이 있었어요. 나는…… 그걸 입에 넣었어요. 이를 닦으려던 게 아니에요. 그냥 맛을 보려고요. 그 여자의 맛을. 병적인 짓이었어요. 그 여자도 그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 여자도 병들길 바라니?”

“그 여자가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고요!”

나는 내 마음속에서 말리는 소리를 누르며 외친다. 그 말이 숲속에 울려 퍼지자 무언가가 덤불 사이로 바스락거리며 달아나고, 나는 움찔한다. 그녀는 큰 소리를 싫어한다.

드리아드는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집에 돌아가거든,” 그녀가 말한다. “차를 한 잔 따라. 네 빨간 안락의자에 앉아 거실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걸 보렴. 문 두드리는 소리를 기다려. 네 레이철이 거기 있을 거야. 흠뻑 젖은 채 갈망으로 떨면서. 안으로 끌어들여 네가 원하는 만큼 깊이 입 맞추렴. 그 여자는 너를 원할 거야. 너를 원하는 마음이 멈추지 않을 거야.” 그녀가 미소 짓는다. “자.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니?”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중 두 번째로 찾아갔다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기억이 적당할지 전혀 모르겠다. 또 다른 종류의 첫 경험이어야 할까? 어린 시절의 무언가? 피가 흐르는 일?

“가장 끔찍한 기억이요.” 한참 만에 내가 제안한다. “열세 살 때예요. 학교에서 생리가 시작됐는데 청바지에 피가 배어 나와 의자까지 묻을 때까지 몰라요. 칠판에 나온 수학 문제를 풀려고 일어서자 교실이 난리가 나요. 다른 애들이 웃고 비명을 질러요.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해요. 나를 계속 칠판 앞에 세워 놓고 그 방정식을 끝까지 풀게 해요. 사타구니에 핏자국이 번지는 동안요. 반 애들은 정신을 못 차려요. 애들은 내가 역겹다고 생각해요. 나도 내가 역겹다고 생각해요.”

그 대목에서 목이 조금 멘다. 이 기억은 없어져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피가 새지는 않았나 가게 유리창에 나를 비춰 볼 때마다 이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된대도 싫지 않을 것이다.

“네 대가를 받아들이마.” 드리아드가 말하며 앞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움켜쥔다. “자, 가만히 있으렴.”

두 번째에는 더 아프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날 밤 집으로 걸어가며, 달을 가리는 두꺼운 비구름을 곁눈질하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준 기억을 떠올리려 한다. 그것은 가지런한 이 사이에 난 틈이다. 무언가가 버려져 나간 빈자리다.

세 번째에는 달이 어떻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나무 밑동 둘레에 돼지 피를 서둘러 쏟아붓는다. 원 모양도 간신히 만들고, 그 말을 할 때는 무릎 꿇는 것도 잊는다. 그래도 눈은 감는다. 그 정도 분별은 남아 있다.

“또 너구나.” 드리아드가 말한다. 세차게 부는 밤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목소리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지만, 나를 보니 반가운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흥미롭기는 한 듯하다. “이번에는 대체 뭘 원할 수 있지?”

“있잖아, 별일도 아니잖아.” 레이철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한 시간째 그녀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설명하고,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여자는 싸움이 시작되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살금살금 나갔다. 옷을 주워 모으면서 우리 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그냥 한 사람하고만 사귀는 건 안 해. 알겠어? 너 좋아해. 정말 좋아한다고……” 거기서 말끝이 흐려졌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정확히 왜 나를 좋아하는지 떠올리려는 것처럼.

“나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하고 떡은 치겠다는 거야?” 두 손은 눈물과 콧물로 젖었고, 소매에는 은빛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나도 괜찮지만 체온만 있으면 누구라도 똑같이 좋다는 거야?”

“아, 진짜.” 레이철이 눈을 굴렸다. 발가벗은 그녀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섹스의 열기로 가슴이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집에 있는 내 침대로 달려가 쪼그라든 껍데기가 될 때까지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과 마주치리라는 걸 알았다. 베개 위에 흩어진 그녀의 머리카락, 땀 냄새가 밴 시트. “넌 왜 맨날 울어야 해?”

나는 그녀가 일어나 커피를 만들러 부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아한 알몸이었다. 이불 위에 젖은 얼룩이 있었다.

나는 굳이 입 밖에 내지도 않는다. 그녀가 안다는 걸 안다.

“그 여자가 너를 원하게 해 달라고 했지.” 드리아드가 말한다. “다른 사람을 원하는 건 싫다고 하지는 않았잖니.”

“당연히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았으면 좋겠죠! 아니면 내가 왜 다시 왔겠어요?”

드리아드가 오늘 아침 레이철처럼 눈을 굴린다. 내 두 손이 주먹으로 말린다.

“넌 어리석은 생물이구나.” 그녀가 말한다. 배관공이 물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가리킬 때 쓸 법한 말투다. 여기 문제가 있는데, 알아차리셨나요? “이게 사랑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니? 그 여자는 처음에 널 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너만을 원하겠니?”

그녀가 우리 집 문 앞에 나타났던 날 밤, 우리는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팔 위에 몽롱한 무늬를 그렸다. 공기에는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젖은 것, 침, 땀 냄새가 났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눈은 벌써 가물가물 감기고 있었고, 눈꺼풀은 무거워 보였으며 멍처럼 짙었다. “그때 한 말은 진심이었어.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를 바라봤다. “오늘 밤 갑자기 네 생각이 나기 시작했어. 설명을 못 하겠어. 널 봐야만 했어.”

나는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네 생각을 해.”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솔직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언제나. 네가 그 수업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그녀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시트가 몸에서 흘러내렸다. 벌떡 일어나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로 다가갔다. 불빛이 그녀의 피부에 온기를 입혔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어깨 너머로 바라봤다. 연기처럼 짙은 곱슬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어서.” 그녀가 말했다. “이 자세로 한 삼십 분은 있을 수 있어. 길어야 한 시간.”

나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 앉았다. 그녀의 우아한 형체와 단단한 다리, 척추가 이루는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며 스케치북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나는 말을 꺼내다 잠시 눈을 감는다.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피가 맥박친다. 이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줄곧 진정으로 원했던 것. 나는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여자가 나만 원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한다. “다른 누구도 말고. 다른 무엇도 말고. 내가 그 여자를 필요로 하듯 그 여자도 나를 필요로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 여자를 안고 만지고 싶은 만큼 그 여자도 필사적으로 나를 안고 만지고 싶었으면 좋겠어요.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나였으면 좋겠고,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도 나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 여자에게 느끼는 것을 그 여자도 나에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나는 그럴 수 있다.

드리아드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어리석구나.” 그녀가 다시 말한다. 잠깐, 그 말이 해 주지 않겠다는 뜻인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숲을 터덜터덜 되짚어 가야 하는 건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는다.

“내일 아침, 네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 마실 것을 주문하고 구석에 앉아 기다려. 그녀가 문으로 들어와 너를 보면, 그 얼굴에는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햇빛이 네 얼굴 위로 쏟아지고, 그녀의 표정은 녹아내리듯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뀔 거야. 눈이 부시고 경이로움에 가득 찬 얼굴이 되겠지. 태어나 처음 하늘을 보는 여자처럼 너를 바라볼 거야. 네 맞은편에 앉아 네 두 손을 잡고, 네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전부 해 줄 거야.”

그녀는 무언극을 하듯 손을 뻗어 내 두 손을 잡는다. 내 손가락 사이에 끼어든 그녀의 손가락은 너무나 가늘고, 너무나 강해서 그 감촉이 싫다.

“자, 이제.” 그녀가 말한다. “내 대가를 주렴.”

레이철은 그림을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머리가 내 머리에 거의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녀는 아직 옷을 챙겨 입지도 않은 상태였다. “좋네.”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응. 정말 나처럼 보여. 있잖아, 그 수업에서 그린 그림들을 보는 게 싫었어.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맞게 그렸어도 나를 닮은 그림은 하나도 없었거든.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를 그리다가, 어쩌다 내 눈이랑 가슴이랑 머리카락을 채워 넣은 것 같았어.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나를 보지는 않았던 거지.” 그녀가 미소 지었다. 평소와는 다른 미소였다. 더 천천히 피어나고, 더 부드러웠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나를 나답게 그려 줬어. 네 그림이 제일 좋았어. 너는 나를 봐 줬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 가장 좋은 기억.” 그렇게 말하고는 그런 말을 한 나 자신을 증오한다. 그 기억은 진짜다. 어쩌면 레이철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 중 유일하게 진짜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나무를 찾아오기 전부터 그녀는 내 그림을 좋아했다. 그 기억을 내주고 싶지 않다. 잊고 싶지 않다. “그냥 가져가 줘, 제발. 서둘러.”

드리아드의 손가락이 내 두개골 속으로 파고든다. 그 부드럽고 천천히 피어나던 미소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대낮에 숲을 달린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틈틈이 그 말들을 비명처럼 내지른다. 피도, 쐐기풀 관도, 무릎을 꿇는 일도 없다. 눈조차 감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드리아드가 나타나는 모습은 보지 못한다. 한순간에는 나 혼자였는데, 다음 순간에는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흙처럼 검고 자작나무처럼 하얀 그녀는 내가 감히 대낮에 자신을 깨웠다는 사실에 격분해 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양팔을 움켜쥐고 흔들어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한다.

“바로잡아 줘야 해.” 내가 말한다. 나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고, 그만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미안해. 미안해. 잘못이었다는 거 알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되돌려 줘. 전부 되돌려 줘.”

이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 그 기쁨과 잔혹함을 잘못 읽을 여지는 없다. “되돌려 달라고?” 그녀가 되묻는다. 즐거움으로 목소기에 온기가 돈다. “이제 그녀는 무엇보다도 너를 원하지 않니?”

커피숍에서 만난 그날 이후, 레이철은 내 아파트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나를 꼭 곁에 붙들어 둔 채 매달렸고,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직장은 어쩌느냐고 묻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친구와 동료, 가족들이 연락을 시도하면서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울렸다. 그녀는 문자와 음성 메시지를 모조리 지웠고, 걸려 오는 전화도 전부 끊어 버렸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자 배터리가 나갔다. 그녀는 충전하려 들지도 않았다.

출근했다 돌아오니 그녀는 내가 떠날 때 있던 그대로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트는 소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함께 먹을 음식을 배달시키고, 수프와 머핀을 직접 만들고, 밖에 나가 저녁을 먹자며 그녀를 끌어내 보려 했다. 그녀는 먹기를 거부했다. 음식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하는 것은 나 하나라고 했다.

나는 학회에 참석하러 사흘 동안 다른 도시로 떠났다. 돌아왔을 때 그녀는 쇠약해져 있었고 탈수 상태였다. 나를 끌어안으려고 뻗어 올리는 두 팔이 눈에 띄게 가늘어져 있었다.

“뭐 좀 먹었어?” 나는 몸을 뒤로 빼며 다그쳤다. “물은 마셨어? 세상에, 레이철, 잠은 잔 거야?”

그녀가 이미 얼굴 깊숙이 움푹 들어가기 시작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피부는 소름 끼치도록 얇았고 광대뼈는 터무니없이 도드라졌다. 미소를 짓자 아랫입술의 메마른 피부가 갈라졌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턱을 타고 느릿느릿 흘러내렸다.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그녀가 말했다. “네가 있잖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내가 말하지만,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드리아드는 벌써 고개를 젓고 있다.

“정확히 네가 원한 거야.” 그녀가 대답한다. “‘나만’이라고 했잖니. 다른 무엇도 없이. 다른 누구도 없이.”

“내가 틀렸어. 멈춰 줘. 네가 멈춰 주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거야.”

드리아드는 자기 팔뚝에서 내 손을 떼어 내고 한 걸음 물러선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린다. 그 모습은 세상을 연인으로 삼으려 널찍한 가지를 뻗은 등 뒤의 나무를 어느 때보다도 닮았다.

“대가를 받아야겠어.” 그녀가 경고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든지. 전부 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그녀를 도와주기만 해. 제발.”

제발이라고 하지 말 것. 규칙 중 하나인데, 나는 그걸 어기고 있다. 상관없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반 시간 뒤에.” 그녀가 말한다. “레이철은 평생 느껴 본 적 없을 만큼 심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며 네 침대에서 깨어날 거야. 주변이 낯설겠지. 네가 그린 자기 그림들을 발견하면 어리둥절하고, 조금은 무서울 거야. 너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왜 네 아파트에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밤새 술을 진탕 마시고 기억이 끊겨 낯선 사람의 집에서 잠들었다고 생각할 거야. 어떻게든 네 부엌까지 몸을 끌고 가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먹으며 기운을 차린 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겠지. 버스는 그녀를 멀리, 그녀의 진짜 삶으로 데려갈 거야. 너에게서 멀리. 영원히.”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본다. 이끼 빛이 도는 갈색 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없다. “받아들일 수 있겠니?”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흔들린다. 갈망은 여전히 거기 있다.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피 흘리던 그녀의 입과 시트에서 나던 지린내를 떠올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드리아드의 미소가 더 넓어진다. 햇빛 아래서 보니 그 들쭉날쭉한 이빨은 어쩐지 더욱 끔찍하다.

“무릎 꿇어.” 그녀가 명령한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손을 뻗어 직접 그녀의 두 손을 내 머리에 얹는다. 무릎 아래의 흙은 햇볕을 받아 따뜻하다.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도 돼.”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어떤 기억이든.”

드리아드가 나를 내려다본다. 손가락 하나가 내 뺨을 간질이더니 나머지 손가락들과 함께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어리석은 것.” 그녀가 움켜쥐어 모으기 시작하며 말한다. “전부 가져갈 거야.”

진행자 해설

편집자라면 누구나 그런 날이 있습니다. 게재 거절에 따지는 작가들, 때로는 어차피 자기 작품을 싣게 할 생각도 없다고 선언하고는 홱 돌아서 나가 버리는 작가들을 만나는 날 말이죠. 그들은 “그래요, 나가다가 문에 부딪히지나 마세요”라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으레 속으로는 해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말이니까요. 투고 기준에 전혀 근접하지도 못하는 원고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작품 게재를 복권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응모권을 충분히 많이 확보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어떻게든 ‘당첨’되리라고요.

그런 식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작품 선정은 무작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좋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좋습니다.

실은 이 작품이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반드시 실어야 한다는 걸 알았고, 끝까지 읽었을 때도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저는 좋은 첫 문장을 좋아합니다. 편집자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결정을 많이 내려야 할 때는 첫 문장부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걸 분명히 보여 주는 작가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건 탁월한 첫 문장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정해진 방식대로 한다.”

이 문장은 열한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 단어들에서 다음을 알아냈습니다. 주인공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어떤 행위, 공포물이니 아마도 의식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한 번 넘게 하게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단계들을 제대로 따르지 않게 될 겁니다. 거의 틀림없이 끔찍하게 잘못될 겁니다.

훌륭합니다. 능숙한 이야기꾼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정확히,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점점 더 좋아집니다. 우리는 그 어리석음이 눈에 보입니다. 거의 비명을 지를 지경입니다. 안 돼, 하지 마! 또 하는 건 절대로 안 돼.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우리는 번갈아 매혹되고, 즐거워하고, 경악하고, 손가락 틈으로 읽고, 불편해하면서도, 이 망할 이야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 작품의 기교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중심에 놓인 문제도 있습니다. 사랑의 마법. 묘약이든 주문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틀림없이 최악의 공포에 속할 거라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입니다. 누군가에게서 그걸 빼앗고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일. 그저 그 사람의 몸을 곁에 독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서 생각을 훔치는 일……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아니라 소유하는 물건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끔찍합니다. 정말로 끔찍합니다.

드리아드도 그걸 압니다. 하지만 어리석고 성가시며 잠깐 살다 가는 티끌 같은 인간에게 그런 것을 설명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인내심이 있었던 적이 있다 해도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아니죠. 그녀는 장단을 맞춰 주면서 당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밖에 모르며 한심한지를 보여 준 다음, 고통스러운 대가를 받아 낼 겁니다. 그 대가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신이 지불하겠다고 동의했잖아요.

사랑의 마법에는 손대지 마세요. 그리고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요정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려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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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을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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