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 199 - "게임 플레이어"
⚠️ 콘텐츠 경고 ⤴
음식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푸짐한 식사의 냄새가 작은 부엌을 가득 채웠다.
헤일리는 자신과 빅터가 먹을 저녁 식사인 닭고기 브로콜리 볶음을 만드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빅터는 임시로 마련한 식탁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가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내는 것을 보고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요리를 마친 그녀는 그릇 두 개에 음식을 담아 식탁으로 가져오면서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표정을 알아차린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니, 빅터?”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빅터는 의자에서 몸을 뒤척이고는 잠시 말없이 용기를 끌어모아 물었다. “제가 짐이 되나요?”
“아이고, 얘야… 왜 그런 생각을 하니?”
“그, 그게, 아까 힘들어 보이셔서요…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빅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븐 장갑을 낀 손을 그의 뺨에 얹었다. “넌 짐이 아니야. 약속할게. 제발 그런 생각 하지 마. 네가 있든 없든 요리는 해야 하잖니. 그렇지? 게다가…” 그녀는 그의 턱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에 새겨진 미소를 더 뚜렷하게 드러냈다. “네가 곁에 있으면 즐겁단다.”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래도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제게 곁에 둘 만한 가치가 어디 있어요? 전 그냥—”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냈다. “쉿…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네가 왜 소중한지 아니? 바로 네 얼굴의 그 미소 때문이야. 첫술을 뜰 때마다 짓는 그 더없이 기쁜 표정, 네 웃음소리… 넌 참 사랑스러운 아이야, 빅터.”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내게 없던 아들 같은 아이.”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그릇 하나를 그에게 밀어 주었다.
“어서 먹으렴, 얘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걸 만들었어!”



아,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가려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익숙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안전한 곳으로. 운이 좋다면 조용하기까지 한 곳으로.
그러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래, 익숙한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모퉁이만 돌면 무엇과 마주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용한 곳도 결코 아니었다. 조명에서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평소보다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이상하게도 머리가 아플 때마다 목소리들은 더 커지기만 했다. 늘 쓸데없는 소리였다. 나는 평소처럼 그 소리를 차단하고 무시하려고 했다. 기억 속에서는 전부 흐릿하게 뒤섞여 있지만, 분명 이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어디 가니, 빅터?” “저기 저건 뭐야?” “그 웅덩이 밟지 마!” “너무 시끄러워!” 아니면 대충 비슷한 말들이었거나.
더 어두운 구역으로 들어서자 그나마 조금 평온해졌다. 손전등은 배터리가 다 된 지 꽤 되었기에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눈이 어둠에 익자 속도를 높였다.
이곳은 언제나 내게 정말 버거운 곳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일 확률은 늘 50/50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면 내 손이 그 사람을 그대로 통과한다.
또 어떤 때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미소가 보인다. 끔찍하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웃음을 지은 채 나를 노려보는 미소가.

나는 그것도 또 다른 환각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눈을 비비면 사라지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나는 무언가에게 쫓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이곳에서 꽤 운 좋게 지낸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마 몇 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머릿속의 무리가 한 가지에 동의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뻔한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벽과 기둥에 셀 수도 없이 부딪혔다. 그나마 매번 모서리였다. 콘크리트에 머리부터 들이받아 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탓에 속도가 떨어졌고,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팔을 살짝 물어뜯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 충격에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저 앞에 빛이 조금 보였다. 더 가기만 하면 됐다. 저것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어둠과 빛이 선명하게 갈리는 경계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발톱을 휘둘러 나를 후려쳤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빛 속으로 넘어갔다.
등 전체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따뜻하고 축축한 감촉이.
나는 끝내 내 상처를 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 점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둠 속을 돌아보니 그것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그 얼굴에는 여전히 그 멍청하고 끔찍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그 경계를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도와 달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숨이 차고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직접 도움을 찾아 나서야 했다.
오래 걸을수록 주변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 발치에 고였다. 분명 뒤로 핏자국을 남기고 있었을 것이다.
온갖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날뛰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우리가 죽을 거라고 소리쳤다. 몇몇은 도망치지 못한 나를 질책했다.
몇몇은 내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내가 줄곧 바랐던 것은 어떻게든 내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혼자 죽지는 않는 것.
오래 걸을수록 살아남으리라는 믿음은 희미해졌다.

무언가 희망 같은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콘크리트 지옥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이었다. 한쪽 옆에 나 있었고, 바둑판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안으로 들어선 나는 다시 한번 소리치려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아보기 전에 쓰러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간신히 가장 가까운 벽까지 기어가 등을 기대고 앉았다.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는 동안 숨을 고르려 애썼다.
목소리들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차피 그들도 나와 함께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메리. 처음부터 줄곧 보아 왔던 그 존재.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흐릿해진 방 안에서 보이는 것은 그녀 하나였다.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늘 그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는 귀에서 울리는 소리 속으로 녹아들었다.
잠깐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공허했다. 내 영혼 자체가 끝도 없는 칠흑 같은 허공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더없이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다시 눈을 뜨자 사방이 어둠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유령처럼 흐릿하고 푸른빛이었다.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로 내가 죽었던 방이 보였다. 그 방의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고, 나는 그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방도 나처럼 온통 푸른빛이었다.
내 아래에 있는 내 시체가 보였다.
당연히 나는 공황에 빠진 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 애썼다. 사후 세계일까, 아니면 일종의 중간 세계일까? 내가 믿어 왔다고 생각한 것들이 전부 틀렸던 걸까? 이다음에도 무언가가 있을까? 어느 쪽이든 견딜 수 없이 무거운 것이 사방에서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막 과호흡이 시작되려던 순간, 내 어깨에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누구인지 알았다.
헤일리가 그곳에 나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굳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익숙한 위안과 온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서게 하고는 줄곧 나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불공평했다.
그녀는 내 흐느낌이 가느다란 훌쩍임으로 잦아들 때까지 나를 달래 주었다. 내가 충분히 진정하자 그녀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곳은 일종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있는 문으로, 그 너머에서 환하게 빛나는 흰빛이 보일 만큼만 살짝 열려 있었다.
말하자면 터널 끝의 빛이었다.
그녀는 오븐 장갑을 낀 손을 내밀며 그곳까지 함께 걸어가 주겠다고 했다.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는 다시 아래를 흘끗 보았다. 아래에 있는 내 몸을.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내 주위로 고인 피의 가장자리에 서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일기였다. 그 존재가 내 일기를 읽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당황했겠지만, 사실 내 눈에는 내 이야기를 알게 될 누군가로 보였다. 어쩌면 나를 기억해 줄 누군가로.
나는 헤일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으니 기다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옆에 앉아 한 팔로 내 등을 감싼 채 함께 지켜보았다.
그 존재는, 그러니까, 기묘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광대였고, 천장으로 곧장 뻗어 올라가는 빛나는 줄에 매달려 있었다. 인간은 분명 아니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분명 훑어 읽고 있었지만, 퍽 몰입한 듯 보였다.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헤일리는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다가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고, 내 머리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놓였다. 눈이 저절로 감겼고 나는 그녀의 품에서 쉬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쉴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녀가 나를 깨웠다. 그 존재가 읽기를 멈추고 둥실 떠서 가 버렸다고 했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지기 시작했다.
헤일리는 한숨을 쉬고 일어나 내가 일어서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내게 “이제 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그 문을 향해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아래를 보니 그 존재가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 또 다른 광대를 안고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그 품에 안긴 광대는 축 늘어져 있었고, 옷 색깔도 달랐다. 나는 헤일리를 멈춰 세우고 아래를 보라고 했다.
그 존재는 안고 있던 광대를 내려놓더니, 더는 기묘해질 수도 없을 것 같던 상황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내 몸 주위에 고여 있던 피가 사라지는 듯했다. 내 몸을 둘러싼 바닥에서 피가 다 없어지자, 그녀는 그 광대를 내 옆으로 밀어 놓고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과장된 몸짓이었다.
무언가 내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헤일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나는 갑자기 화들짝 깨어났다. 또다시. 나는 그 방으로 돌아와 있었고, 내 몸은 아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 아니,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조금 놀란 듯도, 충격을 받은 듯도 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거의 광적인 낄낄거림을 터뜨렸다.
그녀는 내 (예전) 몸을 돌아보더니, 옛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 내 새 얼굴에 다시 씌워 주었고, 가방도 똑같이 가져와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는 자신을 “게임 마스터”, 또는 “페넬로페”라고 소개하며 악수를 청하려고 나무로 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며 손을 뻗어 그녀와 악수했다. 그녀가 손을 놓자,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한동안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게임 홀”에 있으며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나를 잡아 일으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쇼핑몰에 온 신난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러 보드게임으로 가득 찬 선반을 보여 주었는데, 전부 내가 아는 게임들의 이름만 바꾼 모조품이었다. 그녀가 “배틀플레인”이라는 게임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거 그냥 배틀십 아니야?”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배틀십”이라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아니야”라고 소리친 뒤, 곧바로 평소처럼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계속 나를 끌고 다니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에 잠겨 멍해졌다. 어쩌면 여기가 사후 세계일까? 하지만 천국인지 지옥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연옥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듯, 내 주의를 끌려고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 구경을 다 시켜 주고 나서 손을 휘둘러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를 나타나게 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의자 하나에 밀어 앉혔다. 그녀도 자리에 앉더니 내가 “너무 조용했다”며 말을 좀 해 보라고 했다.
나는 잠깐 생각한 뒤 물었다. “이게 다 뭐야?”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 말에서 무슨 뜻인가를 짐작한 것 같았다. 그녀의 디지털 눈에 잠깐 이상한 기색이 어렸지만, 곧 그 활짝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내게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며, 친구가 갖고 싶어서 나를 되살렸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지금 들어 있는 몸이 오래전에 인공 친구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조종할 뿐이라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었다는 식의 말을 했다. 그녀는 내가 “더없이 좋은 기회”였으며, 지금 내 영혼이 이 몸 안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일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는 이제 내가 자기 친구라며 신나게 외치더니,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가 보드게임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나 탁자 위에 쾅 내려놓고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있지도 않은) 혀를 깨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꽤 오랫동안 게임을 했다.
나는 방금 겪은 기이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렸다. 심지어 끝날 무렵에는 우리 둘 다 미소를 짓고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이 레벨의 꽤 외진 곳에 내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비어 있는 듯한 다른 방들도 몇 개 본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나를 재촉해 그 앞을 지나갔다. 그녀가 내게 준 방에는 제법 편안한 침대와 서랍에 종이와 연필이 잔뜩 들어 있는 책상이 있다. 물감까지 있다. 내가 예술 쪽 사람이라고 짐작한 모양이다. 사실, 정확히 맞혔다.
그녀는 항정신병 약도 좀 주었지만, 당연히 나는 먹을 수가 없다. 그냥 잘해 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왜 아직도 증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몸에 관해서라면 그건 가장 덜 혼란스러운 일인 것 같다. 눈도 없는데 어떻게 여전히 볼 수 있고, 입도 없는데 말할 수 있고, 귀도 없는데 들을 수 있고, 신경도 없는데 느낄 수 있는 걸까?
…아무튼, 그 일도 이제 꽤 오래전이다. 다시 연필 쓰는 데 익숙해지고 싶어서 그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무 손으로 글씨를 쓰기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다.
사실 좀 바쁘기도 했다. 그녀가 새 게임을 시험해 보는 일을 내게 맡겼다. 그녀는 꽤나…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을 떠올린다. 가끔은 독창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원래 살던 곳에 있던 게임들을 변형한 것이다.

모든 게 참 이상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 이건 분명 두 번째 기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인간조차 아니다. 게다가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묶여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연장선에서 나도 그렇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내 영혼이 이곳의 경계 안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되살린 걸까?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내게 칭호도 붙여 주었다. “게임 플레이어.” 즉흥적으로 지어낸 건데, 그대로 굳어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빅터”라고 부르기는 한다. 그녀는 특히 내가 자기 게임에서 대부분 진다는 걸 생각하면 나한테는 우스운 이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이곳에 흘러들어 올 때마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게임 플레이어”라고, 자기를 “게임 마스터”라고 부르게 한다. 그냥 “전문가처럼” 보이려는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대체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둔다. 가끔 내 방에 들어와 잘 있는지 살피거나 게임을 하자고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지금까지도 꽤 오랫동안 혼자 지내 왔는데, 이상하게도? 이건 다른 종류의 혼자다. 아니, 밖으로 나가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내가 “혼자”라고 말할 수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세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 없이 모든 일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깨어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조금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헤일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곁에 있다는 걸 아니까. 나는 그저 그녀가 아직 저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곳을 나가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은?
나는 행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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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elPur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