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 미간행 오리지널
눈이 그친 뒤
권 소장은 우리가 밥을 남기는지 꼭 확인했다.
첫날 저녁에는 그게 버릇인 줄 알았다. 산속 관측소에서 이십칠 년을 혼자 지냈다는 사람이었다. 밥을 다 먹으면 그릇에 따뜻한 물을 부어 주었다. 세진이 배가 부르다며 손을 저었을 때도 주전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씻어 먹어. 밥알 붙었어.”
세진은 웃으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그릇을 들고 마셨다. 물에 불은 쌀알 두 개가 혀에 닿았다.
우리는 폐쇄되는 관측소의 수기 기록을 전산으로 옮기러 갔다. 캐비닛 열한 개에 삼십 년 치 강수량과 적설량이 들어 있었다. 일은 삼 주 예정이었다. 휴대전화는 진입로 아래 취수장까지 내려가야 터졌고, 인터넷은 이미 끊겨 있었다. 회사에서는 하루 한 번 관리용 무전으로 작업 상황을 알려 주면 된다고 했다.
권 소장은 밥과 난방, 연락을 맡았다.
사흘째 밤부터 눈이 왔다.
처음에는 창문 밖의 가문비나무가 예뻤다. 세진은 서울에서 가져온 귤을 창틀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는 창문 아래 절반이 흰색으로 막혔다.
권 소장이 무전실에서 나와 말했다.
“아래 길이 무너졌어.”
그날부터 밥을 작은 그릇에 주었다.
*
세진은 눈이 온 지 나흘째에 발목을 다쳤다.
발전기 쪽 처마가 내려앉는 바람에 셋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눈 아래 얼음이 있었다. 세진은 발을 헛디뎠고, 나는 삽날로 바닥을 긁다가 짧은 소리를 들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장갑 낀 손으로 꺾는 것 같은 소리였다.
권 소장은 부츠를 벗기지 못하게 했다.
“부으면 다시 못 신어.”
부츠 옆을 조금 째고 판자를 대 주었다. 진통제 두 알도 주었다. 세진은 발을 올리고 누운 채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나는 자꾸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혼자 기록을 입력했다. 일을 멈추면 무전실 문만 보게 됐다. 문은 늘 닫혀 있었다. 안에서는 권 소장의 낮은 목소리와 잡음이 번갈아 흘렀다.
그는 나올 때마다 나쁜 소식을 하나씩 보탰다.
제설차가 전복됐다. 취수장 아래 다리까지 균열이 갔다. 헬기는 다른 마을에 먼저 가야 했다.
“여긴 지붕 있고 물 있잖아. 사람이 물만 있으면 한 달도 살아.”
그는 그런 말을 할 때 세진보다 나를 보았다.
눈은 여드레째 되는 날 그쳤다.
해가 들자 지붕에서 커다란 눈덩어리가 떨어졌다. 세진과 나는 그 소리에 동시에 웃었다. 무언가 끝나는 소리 같았다.
권 소장은 웃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더 위험해. 녹으면서 내려와.”
나는 밖으로 나가 진입로를 보겠다고 했다. 그는 따라나섰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백 미터쯤 갔을 때, 길 전체를 덮은 흙더미가 나타났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이 비탈 아래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권 소장은 내 팔을 잡았다.
“한 발 더 가면 네 무게로도 움직여.”
멀리 흙더미가 끊기는 곳이 보였다. 거기까지 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두 번 주저앉았다.
그날 저녁부터 밥은 죽이 됐다.
*
열이틀째에는 세진이 귤껍질을 먹었다.
창틀에 말려 놓은 것을 오래 씹고 있었다. 내가 보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 귤은 나흘 전에 먹었다. 세진이 반으로 나누면서 작은 쪽을 내게 주었다가, 다시 가져가 큰 쪽과 바꿨다. 나는 큰 것을 먹었다.
그 뒤로 그런 일이 자꾸 생각났다.
설탕은 커피 봉지 세 개에 든 것이 전부였다. 나는 종이를 펴서 손톱으로 긁었다. 세진이 잠든 줄 알고 내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핥았는데,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화가 날 줄 알았다. 실제로는 처음 며칠만 그랬다. 나중에는 화를 낼 일이 모두 사소해졌다. 입력하던 숫자가 자꾸 겹쳐 보였다. 손끝이 차가워 키보드를 누르는 감각이 없었다. 우리는 말을 하다가도 문장 중간에 쉬었다.
권 소장은 아침마다 손목을 짚었다.
내 차례에는 초침을 보다가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썼다. 세진의 발가락도 눌러 보았다. 부츠 위로 드러난 정강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아직 괜찮아.”
그 말이 나오면 세진은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권 소장은 우리보다 멀쩡했다. 나는 산에서 오래 산 사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처음부터 말라 있었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와 닮아 가고 있었다.
열닷새째 밤,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나는 자다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불이 꺼져 있었다. 권 소장은 뒤편 연료실에서 나왔다.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무슨 냄새예요?”
“쥐가 들어갔어. 난로 안에.”
나는 그를 지나 난로 쪽으로 갔다. 재밖에 없었다. 뜨거운 쇠 냄새가 났고, 그 뒤에 다른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마늘 같았다.
권 소장이 내 어깨를 잡았다.
“배고프면 없는 냄새도 나.”
그의 손이 따뜻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세진이 누운 채 물었다.
“너도 맡았지?”
나는 쥐였다고 했다.
세진은 한참 뒤에 말했다.
“쥐라도 달라고 하지.”
*
열여드레째 아침, 권 소장이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서쪽 산불감시로로 내려가면 관리 차량이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오후에 차가 올라오기로 했다고 했다.
“거리는?”
내가 물었다.
“건강한 사람이면 두 시간.”
세진은 자기 다리를 보았다.
권 소장은 긴 장대 두 개와 담요를 가져왔다. 그것으로 들것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담요 끝을 말아 장대에 묶었다. 매듭을 세 번이나 틀렸다.
그날 저녁에는 죽이 조금 진했다. 권 소장은 남은 쌀을 다 썼다고 했다. 나는 그릇을 혀로 핥고 싶었다. 세진도 그러고 싶은지 숟가락을 오래 놓지 않았다.
잘 시간이 되었을 때 세진이 불렀다.
“혜원 씨.”
우리는 그 전까지 서로 대리님이라고 했다.
“내일 나 때문에 늦어지면 어떡하지.”
“안 늦어요.”
“차 가면?”
나는 이불을 턱까지 당겼다.
“기다리겠지. 사람 데리러 오는 건데.”
그 말을 믿고 싶어서 조금 화가 났다.
*
우리는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다.
세진을 눕힌 들것은 관측소 계단도 내려가기 어려웠다. 권 소장이 앞을 들고 내가 뒤를 들었다. 장대가 손바닥을 눌렀다. 십 분쯤 걸으면 팔이 펴지지 않았고,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올릴 때마다 세진이 눈을 감았다.
권 소장은 길이 완만해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좁아졌다.
산불감시로 입구에는 쓰러진 낙엽송이 걸쳐 있었다. 들것을 세워서 넘기다가 담요가 풀렸다. 세진이 미끄러졌고, 다친 발이 나무에 부딪쳤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세진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 뒤로 세진은 자꾸 토했다. 나오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나무 뒤 바람이 덜 드는 곳에 그를 눕혔다.
권 소장은 되돌아가 밧줄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저걸 끌어야 해. 들고는 못 가.”
그가 오던 길로 사라진 뒤, 나는 세진 옆에 앉았다. 햇볕이 나뭇가지 사이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세진의 발끝에 닿아 있었고, 나중에는 담요 가장자리에 닿았다.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나는 권 소장을 불렀다. 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입안이 마르고 목이 아팠다.
세진은 가끔 눈을 떴다. 물을 달라고 해서 보온병을 기울였는데, 입술로 조금 흘렀다. 나는 그 물이 담요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아깝다고 생각했다.
해가 나무 뒤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무서워졌다.
차는 오후에 온다고 했다. 내가 내려가지 않으면 차는 우리를 기다리다 갈 수도 있었다. 운전하는 사람은 관측소까지 올라오지 못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산에 누워 밤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나는 세진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사람 데리고 올게요.”
세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차를 잡아야 해요.”
“소장님 오시면 같이.”
나는 산 위를 보았다. 우리가 내려온 길이 벌써 어두웠다.
“금방 올게요.”
세진이 담요 속에서 손을 꺼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었다. 내 바짓단을 잡았는데 힘이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 손을 담요 안에 넣어 주었다.
그때 내 장갑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들것을 내려놓을 때마다 눈을 짚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아파서 장갑을 벗었다. 바람이 닿자 더 아팠다.
세진의 빨간 털장갑은 머리맡 배낭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꼈다.
세진은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덜 추워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금방 올게요.”
몇 걸음 내려가자 세진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했다. 그다음에도 불렀다. 나는 계속 대답하면서 걸었다. 세 번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려면 멈춰야 할 것 같았다.
*
관리 차량은 없었다.
대신 도로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걸 몰랐다. 검고 평평한 아스팔트가 보였다. 양옆으로 밀어 놓은 눈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타이어 자국이 수없이 겹쳐 있었다.
나는 도로 가운데 앉았다.
얼마 뒤 냉동 탑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나를 보고 욕을 했다. 화를 내는 줄 알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차로 데려갔다.
히터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나는 산 위에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뜬 통신사 이름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길이 언제 열렸느냐고 물었다.
“여기요? 지난주 화요일인가.”
“다리는요?”
“무슨 다리요?”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했다. 남자는 통화를 하면서 내 말을 듣다가, 나중에는 히터를 낮추고 자기 외투를 내 무릎에 덮어 주었다.
그의 차 바닥에 귤 하나가 굴러다녔다.
나는 그것을 집어 껍질째 물었다.
*
세진은 그날 밤 발견됐다.
발견됐다는 말 다음에 무엇이 붙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병실에 들어온 사람이 입을 움직이는 동안, 나는 천장 모서리에 붙은 얼룩을 보고 있었다. 얼룩은 갈색이었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권 소장은 관측소에 있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세수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부엌에는 한 사람분의 밥이 차려져 있었다.
연료실 안쪽 바닥문 아래에서 쌀 두 포대와 통조림, 냉동육, 말린 채소가 나왔다. 발전기 연료는 충분했고 냉동고도 작동하고 있었다. 무전기는 고장이 아니었다. 그는 회사에 예정대로 작업 중이라고 보고했다. 산 아래에서는 우리가 언제 나올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내게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내가 밤에 서 있던 난로가 있었다. 그 옆 연료실 문도 있었다. 바닥문이 열린 사진에서 좁은 계단이 보였다. 아래 선반에는 복숭아 통조림이 줄지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상표였다.
나는 사진을 한 장 뒤로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넘겼다.
“이게 계속 여기 있었어요?”
경찰이 그렇다고 했다.
나는 통조림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사진의 종이가 조금 휘었다.
*
권 소장이 십칠 년 전 조난 사고의 생존자라는 것은 병원에서 알았다.
그와 동료 두 명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혼자 내려왔고, 두 사람은 죽었다. 당시 기사에는 그가 구조대에게 길을 알려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 뒤의 기사에는 유족이 수사를 요구했다고 쓰여 있었다. 셋이 함께 쓸 비상 식량을 그가 가져갔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계속 부인했다.
최근까지도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고 했다. 경찰은 그 내용을 내게 읽어 주지 않았다.
대신 관측소에서 발견한 수첩에 관해 물었다.
맥박을 적던 수첩이었다.
날짜 옆에 우리가 먹은 양과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세진이 귤껍질을 씹은 날도 있었다. 내가 커피 봉지를 핥은 날도 있었다. 열다섯 번째 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냄새 확인하러 나옴. 아직 둘이 나눔.
마지막 장에는 산불감시로의 약도가 있었다. 쓰러진 낙엽송과 우리가 쉰 자리, 관측소로 돌아가는 샛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샛길에서 우리가 누워 있던 곳까지는 오십 미터도 되지 않았다.
형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본인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뭘요.”
“다른 사람도 결국 혼자 내려오는지.”
병실 밖에서 배식 카트가 지나갔다. 바퀴 한쪽이 끼익거렸다. 뚜껑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땀이 나왔다.
“거기 있었대요?”
형사가 나를 보았다.
“제가 내려올 때도?”
그는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덮었다.
나는 그 동작으로 충분했다.
*
조사는 오래 걸렸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세진의 발목, 무전실, 죽의 양, 부서진 길. 어떤 것은 말할수록 선명해졌고 어떤 것은 내 기억인지 앞서 한 진술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세진의 남편은 한 번 찾아왔다.
그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세진이 관측소에 가져갔던 보조 배터리와 안경집이 들어 있었다. 유품 중 내 것이 섞였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전부 세진의 것이었다.
그는 가방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혼자 두고 내려오기 힘드셨을 텐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 데리러 가신 거잖아요.”
그는 내가 끝내 대답하지 않아도 더 묻지 않았다. 나갈 때 병실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날 저녁 나는 식사를 전부 토했다. 간호사는 급하게 먹지 말라고 했다. 몸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배가 고팠다.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
권 소장을 다시 본 것은 법정에서였다.
그는 수갑을 차고 앉아 있었다. 산에서 입던 옷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볼에 살이 조금 붙어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오자 허리를 폈다.
나는 그쪽을 보지 않고 증인석으로 갔다.
질문은 이미 여러 번 들은 것들이었다. 식량이 없다는 말을 믿었는지. 다른 탈출로를 알고 있었는지. 구조 차량이 온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부상자를 데리고 출발했겠는지.
나는 대답했다.
마지막에 변호인이 물었다.
“피해자를 혼자 남겨 두고 이동한 시각이 대략 오후 네 시라는 거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때 피해자에게 의식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증인이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까?”
“네.”
권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밥을 다 먹은 그릇을 확인할 때처럼.
나는 그제야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법정 안의 누구도 그가 왜 고개를 끄덕였는지 묻지 않았다.
*
세진의 장갑은 겨울이 끝날 무렵까지 내게 있었다.
구급차에서 누가 벗겨 내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하얗고 손목에 작은 눈송이 무늬가 있는 장갑이다. 다 마른 뒤에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부드러워졌다.
처음에는 돌려주려고 했다.
세진의 남편이 병원에 왔을 때도 가방 안에 있었다.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가 유품을 꺼냈을 때, 내 것이 없다고 했을 때, 종이 가방을 접었을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겨울이 끝날 무렵 다시 경찰서에 갔다. 빠뜨린 진술이 있다고 했다. 형사는 나를 기억했고 따뜻한 물을 주었다. 나는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잠깐 장갑을 보다가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젖은 내 장갑을 벗은 것, 배낭 위에서 이것을 집은 것, 세진이 나를 보고 있었던 것.
형사는 말을 끊지 않았다.
나는 내가 했던 말도 그대로 전했다.
가만히 있으면 덜 춥다고.
형사는 천천히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했다. 권 소장이 만든 상황이라고 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장갑을 돌려주려 해서 받지 않았다. 보관해 달라고 했다. 형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투명한 봉투를 가져왔다.
장갑을 넣자 손가락 다섯 개가 안쪽으로 접혔다.
형사는 봉투 겉면에 날짜를 쓰고, 내가 다른 말을 더 할지 기다렸다.
나는 산에서 들은 마지막 소리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진은 세 번째에 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형사가 기다렸다.
장갑은 놓고 가.
세진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