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 미간행 오리지널
해진 곳
구멍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연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커튼 밑으로 손을 넣었다. 작업대의 매끈한 합판이 손등에 닿았다. 손바닥을 위로 돌려 구멍 바로 아래에 댔다. 그런데도 손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벨벳에 난 구멍은 콩알만 했다. 그 속에서 누런 불빛이 흔들렸다.
연희는 손을 빼고 커튼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갈색 안감이 있었다. 구멍도, 불빛도 없었다. 다시 뒤집자 누런 빛이 돌아왔다.
“정우 씨.”
무대감독은 사다리 위에서 작업등을 갈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다고요?”
“지하 창고요. 개관할 때 쓰던 거래요.”
개관한 지 육십 년 된 극장이었다. 다음 달 철거하기 전에 마지막 공연을 올릴 예정이었다. 연희는 망가진 의상 몇 벌을 고치러 왔다가 이 커튼까지 맡았다. 새 막을 빌리는 것보다 수선이 싸다는 이유였다.
정우가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연희는 구멍을 가리켰다.
“뒤에 손 대봐요.”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구멍 속 불빛 앞을 무언가 지나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숙였다.
누군가의 등이었다. 어깨가 좁고 목이 길었다. 등에는 흰 선이 가득했다. 빛에서 멀어져 가면서도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다. 작은 구멍을 통해 보는데, 어떻게인지 그 등이 자신들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우가 커튼을 움켜쥐었다. 천이 구겨지자 구멍도 접혔다. 빛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안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났다.
그는 천을 놓았다.
구멍 가장자리에 둘러져 있던 회색 실 한 가닥이 끊어져 있었다.
연희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처음에는 벌레 먹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대경을 대니 바늘땀이 보였다. 아주 작은 구멍을 수십 번 감쳐서 막아 놓은 자리였다. 오래된 실들이 삭아 떨어지고 있었다.
“영상 같은 건가요?”
정우가 물었다.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멍 속에서 뻗어 나온 흰 선이 벨벳 표면에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었다. 그녀가 핀셋으로 집으려 하자 선이 움츠러들었다.
그 끝이 갈라졌다.
둘이었다가, 넷이 되었다. 갈라진 끝들이 각각 가까운 바늘땀을 붙잡았다.
실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구멍이 손톱만 해졌다.
정우가 뒷걸음치며 작업대를 건드렸다.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속이 울리는 순간 흰 선들이 일제히 멎었다.
몇 초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다음 구멍 속 누런 빛이 꺼졌다.
무언가 빛을 가린 것이었다.
연희는 처음에 물고기의 배라고 생각했다. 희고 팽팽한 표면에 좁은 골이 여러 개 나 있었다. 골 하나가 벌어지며 안쪽의 축축한 돌기들이 드러났다. 돌기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것이 구멍에 달라붙었다.
작업대 위 커튼이 들썩였다.
정우가 연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물러나자 무거운 벨벳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구멍 난 부분만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누군가 천 밑에 머리를 넣고 일어서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접힌 천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쉰 무 냄새가 났다. 그 밑에 비린 냄새가 있었다. 연희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생선을 손질한 뒤 싱크대 배수구를 들어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던 찌꺼기가 한꺼번에 드러났을 때의 냄새였다.
“나가요.”
정우가 말했다.
그들은 작업실 문까지 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복도 끝의 초록색 비상구 표시도 보였다.
연희는 문턱에서 돌아보았다.
커튼 위로 흰 가닥 하나가 길게 뻗어 있었다. 천을 더듬던 끝이 작업대 다리에 닿았다. 갈라진 가닥들이 쇠로 된 다리를 감쌌다.
도금이 가느다란 리본처럼 벗겨졌다.
그 아래 금속도 같은 모양으로 풀려 나왔다.
연희가 소리를 내자 정우도 돌아보았다. 작업대 한쪽이 내려앉았다. 볼트가 빠진 것이 아니었다. 다리 한가운데가 젖은 솜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정우는 소화기를 가져왔다. 안전핀을 뽑을 때 손이 떨려 핀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는 욕을 한마디 하고 흰 가닥을 향해 분말을 쏘았다.
작업실이 하얗게 흐려졌다.
그 속에서 긁는 소리가 더 커졌다.
연희는 입을 가린 채 보았다. 분말을 뒤집어쓴 가닥들이 이제는 뚜렷했다. 그들은 천 위를 기어다니지 않았다. 천의 표면을 조금씩 풀어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벨벳의 검은 올과 안감의 갈색 올이 나뉘어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구멍은 이미 손바닥만 했다.
그 둘레에 남은 회색 바늘땀들이 팽팽해졌다.
연희는 문 옆 선반에서 반짇고리를 집었다.
“뭐 하시게요?”
“막아야지.”
“손대지 마세요.”
그녀도 손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작업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본 뒤로는 복도 끝 비상구를 생각할 수 없었다. 벽이나 바닥도 그것에게는 비슷할 것 같았다.
연희는 굵은 바늘에 검은 실을 꿰었다.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침으로 적신 실 끝이 자꾸 둘로 갈라졌다.
그때 커튼이 크게 당겨졌다.
두 사람은 뒤로 물러섰다.
구멍 안으로 뻗어 나왔던 가닥들이 빨려 들어갔다. 희끄무레한 표면도 물러났다. 다시 누런 빛이 보였다.
빛 아래에 얼굴이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깊은 주름으로 닫혀 있었다. 코는 없었다. 입은 턱 가까이 작게 나 있었다. 머리 양옆으로 뻗은 단단한 가지 같은 것들에 실뭉치가 감겨 있었다.
아까 등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구멍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작은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 안쪽에 짧은 이들이 촘촘했다.
정우가 소화기를 다시 들었다.
연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얼굴 옆으로 손이 올라왔다.
손가락은 너무 많았다. 관절이 굽는 방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톱은 있었다. 때가 낀 납작한 손톱 아래로, 긴 바늘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바늘 끝이 구멍의 가장자리를 찔렀다.
커튼을 뚫고 나온 끝이 연희의 발 앞에서 반짝였다.
그것은 천을 꿰매고 있었다.
회색 실이 구멍을 가로질렀다. 오래된 수선 자리에 남아 있던 것과 같은 실이었다.
연희는 무릎을 꿇었다.
“저쪽 잡아줘요.”
정우가 그녀를 보았다.
“잡아줘요. 팽팽하게.”
그는 소화기를 내려놓고 커튼 끝을 잡았다. 연희는 구멍에서 손 한 뼘쯤 떨어진 곳에 첫 땀을 넣었다. 삭은 자리는 피해야 했다. 튼튼한 천까지 넓게 잡아당겨 입구를 접어 막을 생각이었다.
첫 바늘을 빼자 저쪽의 손이 멈췄다.
닫힌 눈 같은 주름이 그녀의 손 쪽으로 기울었다.
연희는 두 번째 땀을 넣었다.
맞은편에서도 바늘이 움직였다.
두 바늘은 서로를 피해 번갈아 드나들었다.
구멍이 좁아지자 그 너머의 공간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역설적이었다. 넓게 열렸을 때는 얼굴만 보였는데, 천이 접혀 시야가 가늘어지니 멀리 있는 것들이 보였다.
누런 불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 수많은 천 조각이 늘어져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달랐다. 어떤 것은 벽처럼 높았고 어떤 것은 젖은 손수건만 했다. 그것들 사이로 비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통로에 의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비어 있었다.
가까운 의자 하나에는 실뭉치를 단 머리가 기대어 있었다. 몸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 밑으로 떨어진 바늘 끝이 천천히 흔들렸다.
연희는 손을 빨리 움직였다.
맞은편의 것도 빨라졌다.
실이 두 번 꼬였다. 그녀는 혀를 차며 매듭을 풀었다. 평생 남의 옷을 고쳤는데 이런 순간에도 나오는 소리가 고작 혀 차는 소리라는 것이 이상했다.
정우가 작게 신음했다.
커튼을 잡은 그의 오른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바닥에 남아 있던 흰 가닥 하나가 손가락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점이 얇고 긴 실처럼 들려 올라갔다.
그가 손을 떼려 하자 천이 느슨해졌다.
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부딪쳤다.
저편의 얼굴이 뒤로 돌아갔다. 머리의 실뭉치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놓지 말아요.”
연희가 말했다.
정우는 대답 없이 다른 손으로 커튼을 눌렀다. 연희는 쪽가위를 집어 흰 가닥을 잘랐다. 끊어진 가닥이 바닥에서 맹렬하게 뒤틀렸다. 그녀는 반짇고리 뚜껑으로 그것을 덮고 무릎으로 눌렀다.
이제 틈은 입술처럼 가늘었다.
저쪽 바늘이 나오는 간격이 불규칙해졌다. 두 번 빠르게 나오고, 오래 멈췄다. 다시 한 번 나왔다. 바늘에 검붉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안쪽에서 낮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연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세 땀을 더 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틈은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였다.
그 안에서 저쪽의 손이 나타났다. 손가락 여러 개가 중간에서 없어져 있었다. 잘린 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손목이 경련했다.
긴 바늘이 끝까지 나오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실이 없었다.
연희는 틈을 보았다. 손도 그녀를 기다리듯 멎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 바늘을 실이 꿰어진 채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들이 그것을 받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손끝이 닿았다는 감각만 유난히 분명했다.
바늘이 안쪽에서 천을 뚫었다. 연희는 그것을 받아 빼낸 다음, 반대편을 찔러 돌려주었다. 저쪽에서 당겼다. 다시 나왔다.
두 사람은 한 개의 바늘로 꿰맸다.
마지막 틈이 닫히기 직전, 연희는 그 손목 너머를 보았다.
누런 불 아래의 천들이 부풀고 있었다.
수십 장이 동시에, 서로 다른 높이로 솟아올랐다. 천 너머에서 밀어붙이는 것들은 모양이 모두 달랐다. 길쭉한 것, 둥근 것, 수많은 마디가 있는 것. 멀리서부터 불이 하나씩 가려졌다.
그 사이에 비어 있는 의자들이 있었다.
바늘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연희는 실을 당겼다. 단단히 묶었다. 매듭을 하나 더 만들고, 그 위에 한 번 더 실을 감았다.
커튼이 축 늘어졌다.
정우가 손을 놓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반짇고리 뚜껑 밑도 조용했다. 연희가 뚜껑을 들자 짧은 흰 실 한 조각이 나왔다. 핀셋으로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우는 응급실에 갔다. 연희는 극장 앞 계단에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전화를 받은 극장장은 새벽에 도착했다. 그는 잘린 작업대 다리와 피 묻은 커튼을 보고 경찰을 불렀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정우의 손뿐이었다. 오른손 검지 바깥쪽 살이 길게 벗겨져 있었다. 병원에서는 어떤 기계에 끼었느냐고 거듭 물었다.
커튼은 증거물 자루에 들어갔다. 연희는 접지 말라고 말했다. 적어도 수선한 부분만은 접히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경찰관은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공연은 취소되었다.
사흘 뒤 정우가 찾아왔다. 그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종이컵을 들려다가 왼손으로 바꿨다.
“누가 믿겠어요.”
그가 말했다.
연희는 작업 중이던 바지에서 손을 뗐다. 무릎이 터진 어린아이의 바지였다. 안쪽에 덧댄 천이 너무 뻣뻣해서 다시 뜯고 있었다.
“그쪽에 있던 거요.”
정우가 컵을 내려놓았다.
“우릴 도와준 걸까요?”
연희는 한참 뒤에 말했다.
“자기 쪽에서도 막아야 했겠지.”
정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돌아간 뒤 연희는 바지를 마저 고쳤다. 덧댄 천을 부드러운 것으로 바꾸고 가장자리를 꼼꼼하게 눌러 박았다. 바늘을 잡고 있으니 조금 나았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되었다.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잠이 들었다.
깨어난 것은 새벽 세 시쯤이었다.
방 안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틱.
잠시 뒤 다시 났다.
틱.
연희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았다. 형광등 옆에 바늘 끝이 나와 있었다. 도배지를 뚫고 나온 금속 끝이 잠깐 반짝이다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왔다.
희미한 회색 실이 따라왔다.
천장에는 실금이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몰랐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였다. 바늘은 그 금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연희는 일어나 불을 켰다.
바늘이 멎었다.
그녀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뒤, 바늘이 다시 나왔다.
연희는 의자를 가져왔다. 그 위에 올라가 반짇고리에서 꺼낸 실을 길게 풀었다. 이번에는 가장 굵은 실을 골랐다. 바늘귀에 끼워 금이 벌어진 자리에 끝부터 밀어 넣었다.
저쪽에서 받아 갔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기다렸다.
해가 뜨기 전에 천장의 금은 닫혔다. 끝까지 쓰고 남은 바늘이 도배지에 반쯤 꽂혀 있었다. 연희는 그것을 빼서 손바닥에 놓았다. 몹시 닳아 있었다. 하룻밤 쓴 바늘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뒤로 그녀는 잠에서 깨면 먼저 소리를 들었다.
부엌 벽에서도 들렸다. 현관문 아래에서도 들렸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틀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다.
일하는 소리였다.
그것을 듣는 동안에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연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조용한 밤이었다. 집 안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고요해지면, 그녀는 그 많은 빈 의자 가운데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자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불을 켜고, 해진 곳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