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 미간행 오리지널
겁이 없는 날
윤주는 세 번째 주사를 맞은 뒤에야 창가로 갈 수 있었다.
치료실은 십일 층이었다. 첫날에는 블라인드 틈으로 건너편 건물의 꼭대기만 보여도 무릎이 꺾였다. 두 번째 주사를 맞은 날에는 유리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까지 갔다. 세 번째 날, 윤주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횡단보도의 흰 칸 사이로 사람들이 움직였다. 오토바이 한 대가 버스와 버스 사이를 빠져나갔다. 높이는 여전했고, 떨어지면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그 사실에서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다.
이마에 닿는 유리가 시원했다.
“어때요?”
장 실장이 물었다.
“잘 보이네요.”
“뭐가요?”
“아래요.”
장 실장은 웃으며 태블릿에 무언가 적었다. 윤주는 자기도 웃어야 할 것 같아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다는 말은 조금 늦게 나왔다.
열한 달 전, 윤주는 승강기 통로에서 동료를 잃었다. 자신보다 먼저 안전 고리를 풀었던 남자였다. 추락하는 몸은 보지 못했다. 철제 공구함이 발판 끝을 긁으며 사라졌고, 아래에서 한 번 큰 소리가 났다. 그 뒤로는 공구함 손잡이처럼 생긴 물건을 보기만 해도 숨이 가빠졌다.
수입이 끊긴 뒤에는 무서운 것이 더 늘었다. 카드사의 전화, 딸의 수학여행 가정통신문, 우편함에 접혀 들어 있는 흰 봉투. 윤주는 봉투를 뜯으려다가 현관 바닥에서 토한 적도 있었다.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광고를 딸이 찾아냈다.
엄마, 여기서는 몸이 먼저 놀라는 걸 고쳐 준대.
민서는 그 말을 하고 곧바로 덧붙였다.
안 가도 돼. 그냥 보여 주는 거야.
윤주는 그 아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싫었다. 열네 살짜리가 집 안의 물건을 내려놓을 때마다 어머니를 살피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치료를 신청했다.
세 번째 주사를 맞은 날,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미납 요금 문자를 전부 열어 보았다. 액수를 더하고 다음 달에 낼 수 있는 돈을 계산했다. 숫자는 숫자였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민서가 설거지하다 떨어뜨린 접시를 함께 치웠다.
“엄마, 괜찮아?”
“접시야 또 사면 되지.”
아이는 빗자루를 들고 서서 한참 울었다.
윤주는 그것이 치료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
다섯 번째 방문 때부터는 다른 참가자들과 같은 방에서 기다렸다.
대부분 현장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윤주처럼 사고 뒤에 일을 그만둔 사람도 있었고, 아직 일하면서 잠만 못 잔다는 사람도 있었다. 치료센터에서 지급한 회색 운동복을 입고 앉아 있으면 누가 환자이고 누가 보호자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커피 기계 옆에서 한 남자가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뜨거운 물이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에 쏟아졌다. 그는 바지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다 떨어진 뒤에야 컵을 주웠다.
“안 뜨거워요?”
윤주가 물었다.
“뜨거워요.”
남자가 대답했다.
“신발 벗으셔야겠는데요.”
“아.”
그는 의자에 앉아 운동화 끈을 풀었다. 발등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간호사가 달려오자 남자는 미안하다고 했다. 기계가 컵을 제대로 잡아 주는 줄 알았다고.
간호사는 윤주에게 진료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장 실장은 그 일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통증은 느껴요. 다만 놀라서 움직이는 반응과 판단해서 움직이는 반응 사이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적응하는 동안에는 조심하셔야 해요.”
“뜨거우면 피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윤주 씨는 안 뜨거워도 피하셨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윤주는 한동안 가스레인지의 점화 소리조차 견디지 못했다.
“생활 수칙 드렸죠? 위험 표시는 꼭 읽으시고, 익숙한 작업도 순서를 생략하지 마세요. 자동으로 하던 걸 잠깐 의식해서 하시면 됩니다.”
윤주는 핸드백에서 접힌 안내문을 꺼냈다. 목욕물을 손으로 확인할 것. 횡단보도에서 신호와 차량을 각각 확인할 것. 높은 곳에서는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장 실장은 안내문을 다시 접는 윤주의 손을 보며 말했다.
“복직 생각 있으세요?”
*
센터에서 연계한 일은 철거를 앞둔 복합상가의 승강기 점검이었다.
기간은 사흘, 수당은 평소 받던 금액의 네 배였다. 복직 전 직무 적응 평가라는 명목으로 센터 직원이 동행했다. 장 실장도 첫날에는 함께 왔다.
윤주는 건물 앞에서 오랜만에 안전화를 신었다. 끈을 당기자 발목을 붙드는 감각이 반가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입구에는 다른 참가자 셋이 서 있었다. 커피를 쏟았던 남자도 있었다. 이름은 박기철이었다. 발등에 붕대를 감은 채 큰 치수의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윤주가 묻자 기철은 신발 앞코를 바닥에 툭툭 쳤다.
“넉넉해서 괜찮네요.”
상가는 십삼 년째 비어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전선 끝에 먼지가 뭉쳐 있었고, 에스컬레이터에는 빗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층층이 남아 있었다. 일행은 지하 삼 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갔다.
화물용 승강기 문 앞에 휴대용 작업등이 설치돼 있었다. 문은 이미 강제로 벌려 놓은 상태였다. 안쪽으로 검은 통로가 이어졌다.
윤주는 문턱에 무릎을 대고 아래를 살폈다. 승강기는 두 층 아래에 멎어 있었다. 지붕 위에 배관 조각과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쌓여 있었다.
“기계실부터 보겠습니다.”
윤주가 말했다.
현장 책임자라는 남자는 서류철을 펼쳤다.
“기계실은 확인 끝났어요. 아래 제어함에서 저장 장치만 빼 오시면 됩니다.”
“전원 차단하고 잠금은 누가 했어요?”
“해 놨어요.”
“제가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는 장 실장을 보았다.
장 실장은 윤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단 현장 설명을 끝까지 들어 보세요. 불안해서 확인을 반복하는 것도 예전에 말씀드렸던 증상이니까요.”
윤주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그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배 속은 평온했다. 손바닥도 마른 상태였다.
그래서 잠깐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전원 차단을 확인하려는 이유가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작업은 그런 순서로 하는 것이었다.
“잠금 장치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내려갑니다.”
책임자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기계실에 올라갔다. 주 전원은 차단돼 있었지만 차단기에는 잠금쇠가 없었다. 윤주는 자신의 공구 가방에서 잠금쇠를 꺼내 걸었다. 이름표에 날짜를 쓰는 동안 장 실장은 휴대전화로 통화했다.
“작업 기억은 정상입니다. 네. 그 부분은 오히려 아주 잘 유지돼요.”
윤주는 고개를 들었다. 장 실장은 등을 돌렸다.
*
하강용 줄에는 회수용이라는 노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윤주는 표지를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았다. 사람의 체중을 지탱하는 장비라는 인증도, 점검 날짜도 없었다. 끝에 달린 쇠고리는 짐을 끌어 올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거 사람한테 쓰는 거 아닙니다.”
“안전벨트는 따로 있잖아요.”
책임자가 말했다.
“줄이 끊어지면 벨트를 어디에 걸고 있어도 떨어져요.”
“계속 이런 식이면 오늘 작업 못 합니다.”
그 말에도 윤주는 초조해지지 않았다. 돈을 못 받으면 다음 달 월세가 밀린다는 계산은 됐다. 그런데 계산과 몸이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집이 아닌 집의 월세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기철이 나섰다.
“제가 내려가죠. 저장 장치만 빼 오면 되는 거라면서요.”
“전기 일 하셨어요?”
“아뇨. 철거요.”
“그럼 제가 같이 봐 드릴게요. 먼저 장비를 바꿔야 하고요.”
그러나 기철은 이미 벨트에 쇠고리를 걸고 있었다. 책임자가 그의 등을 잡아 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턱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렸다.
윤주는 기철의 어깨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기철이 돌아보았다. 화가 난 얼굴도, 조급한 얼굴도 아니었다. 누가 버스에서 내리려는 자신을 붙든 듯한 표정이었다.
윤주는 그를 설득할 말을 찾았다. 줄의 허용 하중, 쇠고리의 잠금 방식, 추락했을 때 구조에 걸리는 시간. 차례로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설명들을 단번에 밀어 올리던 힘이 없었다.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그 사이 책임자가 줄을 풀었다.
기철의 어깨가 윤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쇠고리가 문턱을 긁었다.
윤주는 그 소리를 들었다. 열한 달 동안 잠을 깨우던 소리와 거의 같았다. 그래도 숨은 고르게 쉬어졌다.
기철은 천천히 내려갔다. 작업화 밑창이 작업등 빛에서 사라졌다.
무전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왔습니다.”
책임자가 줄을 놓고 담배를 꺼냈다.
“거 봐요. 뭘 그렇게.”
윤주는 열린 문 앞에 누워 손전등을 비췄다. 기철이 승강기 지붕 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윤주는 지붕 가장자리의 노란색을 보았다.
안전모였다.
그 아래에 얼굴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목이 너무 길었다. 몸은 승강기와 벽 사이에 들어가 있었고, 안전모 턱끈이 턱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벌어진 입 안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윤주가 무전기에 말했다.
“오른쪽에 사람 있습니다.”
기철이 손전등을 돌렸다.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있네요.”
그가 말했다.
“사망한 것 같은데요.”
옆에서 책임자가 담배를 갑에 다시 넣었다.
윤주는 돌아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시체를 확인하려고 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전에 내려간 사람입니까?”
장 실장이 다가왔다.
“윤주 씨, 일어나세요.”
“저 사람도 센터에서 왔습니까?”
“일단 바깥에서 이야기하시죠.”
무전기에서 기철이 물었다.
“그럼 저장 장치는 그냥 두고 올라가요?”
윤주는 그 질문을 듣고 처음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시체를 발견했을 때도 알았고, 책임자가 놀라지 않는 모습을 보고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장 난 부품을 발견했을 때의 앎과 비슷했다.
기철의 질문은 달랐다.
그는 죽은 사람 옆에 서서 아직도 시키는 일을 마쳐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윤주는 자신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내려다보았다. 센터 로고 아래에 직무 복귀 지원 대상자라고 적혀 있었다.
“올라오세요.”
윤주가 말했다.
“지금 바로요.”
*
책임자는 기철을 올리기 전에 작업을 마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장 실장은 윤주를 휴대용 의자로 데려갔다. 다른 참가자 두 사람은 벽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철제 선반에서 떼어 낸 녹슨 조각으로 손톱 밑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 건물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장 실장이 설명했다.
“보상 문제 때문에 필요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족에게도 중요한 일이에요.”
“신고했습니까?”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시체를 왜 저기 둡니까?”
장 실장은 무릎을 굽혀 윤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윤주 씨. 지금 무서우세요?”
“아뇨.”
“불편하세요?”
윤주는 열린 승강기 문을 보았다. 기철의 손전등이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잠깐 쉬세요. 저희는 윤주 씨가 다시 일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가 생수병을 건넸다. 윤주는 받아서 마셨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책임자가 무전기에 대고 제어함의 위치를 설명했다. 지붕 끝으로 가면 사다리가 있다는 말이 들렸다. 기철은 사다리가 벽에 너무 붙어 있다고 대답했다.
“몸을 옆으로 틀어요. 들어가집니다.”
윤주는 병뚜껑을 닫았다.
그 통로의 규격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옆으로 선 채 내려갈 수는 있었다. 다만 승강기가 조금만 기울어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안전모를 쓴 시체의 목이 왜 그토록 길어 보였는지도 알았다.
윤주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장 실장이 손을 내밀었다.
“작업 중에는 맡겨 두기로 하셨죠.”
그때 전화가 울렸다.
민서였다.
윤주는 전화를 받았다. 장 실장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엄마, 오늘 몇 시에 와?”
“모르겠어.”
“밥 해 놓으려고. 첫날이라 힘들지?”
윤주는 물병에 붙은 상표를 엄지손톱으로 밀었다. 얇은 비닐이 하얗게 일어났다.
“민서야.”
“응.”
“여기 사람이 죽어 있어.”
전화 저편이 조용해졌다.
“엄마 어디야?”
윤주는 건물 이름과 지하 삼 층이라고 말했다. 장 실장이 한 걸음 다가왔다. 윤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다친 거야?”
“아니.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어.”
“거기서 나와.”
“아래에 사람이 하나 더 있어.”
“엄마, 그러면 경찰 불러. 나갈 수 있어?”
민서의 숨이 전화기에 부딪혔다. 아이가 뛰고 있었다. 현관 도어록 소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너는 집에 있어.”
윤주가 말했다.
“엄마 데리러 갈 거야.”
윤주는 열린 승강기 문을 보았다. 문턱까지 걸어오는 민서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이는 어머니를 발견하면 달려올 것이었다. 위험 표지를 먼저 읽거나 전원 차단을 확인하지 않을 것이었다.
가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가 여기 와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윤주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경찰에 지금 들은 걸 말해 줘. 엄마가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
장 실장이 전화기를 잡으려 했다. 윤주는 그의 손을 쳐냈다.
“어머니가 이러시면 치료가 중단돼요.”
윤주는 대답하지 않고 기철을 올리는 윈치 앞으로 갔다.
*
책임자가 윤주의 팔을 붙들었다.
“사람 내려가 있는데 함부로 만지지 마요.”
윤주는 그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이 팔 안쪽을 파고들어 아팠다. 아픈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놓으세요.”
“일단 진정하시고.”
윤주는 남자의 얼굴도 보았다. 그의 이마에 땀이 나 있었다. 시선이 윤주와 전화기와 계단을 오갔다. 입술을 자꾸 핥았다.
저 사람은 무섭구나.
윤주는 남자의 손목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젖혔다. 그가 욕을 하며 손을 뺐다. 윤주는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박기철 씨. 지붕 가운데로 와요. 줄에 매달려 있는 거 맞죠?”
“예.”
“아무것도 잡지 말고 그대로 계세요.”
윈치가 돌아갔다. 줄이 팽팽해지며 검은 통로 안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장 실장은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벽 옆에 있던 참가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 일 끝난 거예요?”
“저 사람 올라오면 같이 나가요.”
윤주가 말했다.
기철의 안전모가 보였다. 그다음 얼굴과 어깨가 올라왔다. 그는 벨트에 체중을 맡기고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윈치에서 짧은 금속음이 났다.
줄이 손바닥 한 뼘쯤 도로 풀렸다.
기철의 얼굴이 문턱 아래로 내려갔다.
윤주는 윈치 옆의 비상 제동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손잡이가 멈추지 않고 끝까지 꺾였다. 안쪽에서 볼트 하나가 떨어졌다.
책임자가 뒷걸음질했다.
윤주는 줄을 잡았다.
장갑 안에서 열이 났다. 손바닥이 벗겨졌다. 줄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윤주는 발뒤꿈치를 문틀에 걸고 등을 바닥에 붙였다.
“두 분, 줄 잡으세요.”
벽 옆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제 뒤에서요. 당겨요.”
세 사람이 잡자 줄이 멎었다. 기철이 문턱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닿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당깁시다.”
윤주의 목소리는 작업 순서를 설명할 때와 같았다.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남자들은 하나, 둘, 하는 구령에 맞춰 줄을 당겼다.
기철이 문턱을 잡았다. 윤주가 그의 작업복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다른 남자가 팔을 잡아끌었다. 기철은 배를 문턱에 문지르며 바닥으로 넘어왔다.
그가 완전히 빠져나온 직후, 윈치의 드럼이 풀렸다.
줄이 검은 구멍으로 쏟아졌다.
한참 뒤에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기철은 바닥에 앉아 안전벨트를 풀었다. 윤주는 장갑을 벗었다. 장갑 안쪽에 붙어 있던 살이 함께 당겨졌다.
“병원 가야겠네요.”
기철이 말했다.
“그러게요.”
윤주는 벗겨진 손을 다른 손으로 받쳤다.
장 실장과 책임자는 보이지 않았다.
*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기철이 몇 번이나 멈춰 섰다. 데인 발이 아프다고 했다. 윤주는 난간을 잡으라고 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일 층에서 경찰을 만났다.
윤주는 경찰에게 기계실의 전원을 켜지 말라고 먼저 말했다. 자신의 잠금쇠가 걸려 있고, 열쇠는 안전화 옆주머니에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윤주의 피 묻은 손과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다들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이에요?”
기철이 목에 걸린 사원증을 들어 보였다.
“적응 평가 왔습니다.”
구급대원이 윤주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후 햇빛이 따뜻했다. 도로 옆에 심은 은행나무에서 작은 잎들이 흔들렸다. 윤주는 구급차 발판에 앉아 손을 씻었다. 소독약이 닿자 팔꿈치까지 통증이 올라왔다.
구급대원이 아프냐고 물었다.
“많이 아파요.”
“그런데 너무 가만히 계셔서요.”
윤주는 대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민서가 도착한 것은 구급차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아이는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있었다. 경찰이 막아 세우자 엄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윤주가 고개를 내밀었다.
민서는 구급차에 올라타자마자 윤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등이 아주 빠르게 떨렸다. 윤주는 붕대가 감긴 손을 피해서 팔뚝으로 등을 받쳤다.
“엄마, 왜 그렇게 말해.”
민서가 말했다.
“뭘?”
“전화에서. 사람이 죽었다면서 왜 그렇게 말해.”
윤주는 아이의 머리 냄새를 맡았다. 급히 나오느라 덜 말린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미안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윤주는 아이가 말하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어떻게 들렸을지도 알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다시 내지 않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구급차가 출발했다. 민서는 어머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윤주의 벨트도 한 번 잡아당겨 확인했다.
*
치료센터는 그날 저녁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찰이 확보한 참가자 명단에는 사망한 남자의 이름이 있었다. 윤주는 병실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 안전모를 쓰지 않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이름 아래에는 치료 전 평가와 치료 후 평가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회피 행동 현저히 감소.
독립적 작업 수행 가능.
윤주 자신의 서류에도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며칠 뒤 다른 병원의 의사가 찾아왔다. 그는 센터에서 투여한 물질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민서는 병실 밖으로 나가 있었다. 윤주가 내보냈다. 이번에는 아이가 듣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잠은 어떠세요?”
의사가 물었다.
“잘 잡니다.”
“사고 장면이 떠오르거나, 갑자기 가슴이 뛰는 증상은요?”
“없어요.”
의사는 잠깐 펜을 멈췄다가 다시 적었다.
윤주는 그 손을 보고 있었다.
“그걸 좋아졌다고 쓰지 마세요.”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서 운동화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민서가 문밖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들어와도 되는지 묻지 않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윤주는 처음 치료실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를 생각했다. 건너편 건물, 횡단보도, 버스 사이를 달리던 오토바이. 그날 자신은 유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기까지 했다.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서였다.
“다시 무서워질 수 있습니까?”
의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윤주는 그가 침묵하는 동안에도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