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우리가 처음 그 사람을 만들었을 때는 이름이 없었다.

“육십쯤 된 남자였어요.”

상가번영회 총무인 내가 그렇게 말하자 형사는 수첩에 적었다. 나는 형사의 펜 끝을 보았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조금씩 고였다.

“입은 옷은요?”

“회색 점퍼요. 작업복 같은 거.”

그 말은 맞은편 철물점 의자에 걸려 있던 옷을 보고 했다. 팔꿈치에 검게 기름이 밴 점퍼였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피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피웠다고 했다. 담뱃불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말은 그다음에 나왔다.

불은 새벽 네 시에 났다. 상가 이층 봉제실에서 자던 여자 둘과, 여자 하나가 데리고 살던 여섯 살짜리 아들이 죽었다. 뒷계단 방화문에는 자전거용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낮마다 그 문으로 들어와 계단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잠갔다.

쇠사슬은 철물점 것이었다. 자물쇠는 내 가게 것이었다. 잠그자는 의견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회의록은 불이 난 날 아침에 찢었다.

형사가 떠난 뒤 정육점 박 사장이 말했다.

“목도리도 하고 있었지?”

아직 삼월이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보충이었다.

“밤에는 추우니까.”

나는 대답했다.

그날 오후 철물점 주인은 목도리가 남색이었다고 진술했다. 세탁소 여자는 그 사람이 뒷계단에서 자는 걸 몇 번 봤다고 했다. 박 사장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꽁초를 계단 틈에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기가 덧붙인 부분을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말이 어긋나면 안 됐으니까.

사흘 뒤 그 사람이 왔다.

상가 뒤뜰, 불에 그슬린 세탁기 옆에 앉아 있었다. 회색 점퍼에 남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작업복의 양쪽 팔꿈치가 검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신발 밑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담뱃불을 비벼 끄듯 오른발을 천천히 돌렸다. 밑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잤습니까, 내가?”

목소리가 작고 공손했다.

나는 가게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계산대 밑에 앉아 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명을 끝까지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말했다.

“나도 봤어.”

그날 저녁 우리는 내 가게에 모였다. 철물점 주인은 형사가 사람을 풀어놓은 거라고 했다. 세탁소 여자는 우리가 실제로 본 사람인데 충격을 받아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박 사장은 블라인드 틈으로 뒤뜰을 살피고 있었다.

“담배는 안 피우네.”

그 말을 듣고 나도 보았다.

남자는 빈손을 입에 가져갔다가 내렸다. 다시 가져갔다. 불붙은 것이 없는 손가락 사이로 연기가 조금 나왔다. 그는 연기를 보고 놀라 손을 털었다.

아무도 더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국밥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그때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밤사이 비가 내렸는데 점퍼 어깨만 젖어 있었다. 목도리 아래로 들어간 물은 앞섶을 따라 흘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물었다.

그는 숟가락을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집은요?”

“여기서 잤다고 하는데.”

그는 불탄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자려고 누우면 뜨거워요.”

밥은 먹지 못했다. 입에 넣으면 씹을 줄 몰랐다. 숟가락을 입술 사이에 문 채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종이컵에 물을 따라주고 돌아왔다.

점심때 박 사장이 그를 데리고 경찰서에 갔다.

우리는 박 사장이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혼자 돌아왔다. 형사에게 뒤뜰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고 알렸을 뿐이라고 했다. 목격자가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날 밤 풀려났다. 신분을 확인할 만한 것이 없었고, 불을 질렀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는 다시 세탁기 옆에 앉았다. 경찰서에서 얻었는지 흰 스티로폼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릇 안에는 잘게 씹은 밥이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먹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세탁소 여자가 그에게 밥 먹는 모습이 늘 급했다고 진술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그를 피하면서 그 사람에 관해 계속 이야기했다.

형사는 같은 질문을 조금씩 바꾸어 물었다. 언제부터 보았는지,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은 없는지, 불이 난 봉제실 여자들과 아는 사이였는지.

처음에는 전부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럿이 몇 달 동안 보았다는 사람을 아무도 모른다는 건 이상했다.

세탁소 여자가 먼저 이름을 주었다.

“오 씨라고 불렀어요. 오인식인가. 인숙인가.”

남자는 그날부터 누가 오 씨라고 부르면 돌아보았다.

철물점 주인은 젊어서 공사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것도 아마 그랬을 거라는 말로 시작했다. 다음 날 오인식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생겼다. 손가락을 펴면 두꺼운 살이 갈라졌다. 그는 그 안에 박힌 모래를 핀셋으로 뽑았다.

박 사장은 왼쪽 다리를 절었다고 했다.

“안 절던데요.”

내가 말하자 박 사장은 짜증을 냈다.

“자세히 봤어?”

우리는 창밖을 보았다.

오인식이 일어서고 있었다. 왼발을 땅에 딛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릎이 꺾인 쪽으로 바짓단이 돌아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리를 주물렀다. 한참 뒤 다시 일어섰을 때는 절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뒤뜰을 보지 않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담요를 무릎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오래 문질렀다.

“나를 많이 아십니까?”

“조금요.”

“그럼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일하다 다쳤습니까?”

그는 왼쪽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으면 높은 데 있는 것 같은데, 떨어지는 데까지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밑에 뭐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자다가 자꾸 발을 내딛습니다.”

나는 그날 밤 철물점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공사장에서 다친 것은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했다.

“형사한테?”

“아무한테나요.”

“왜.”

나는 오인식의 말을 전했다.

철물점 주인은 오래 잠자코 있었다.

“그럼 어디서 다쳤는데?”

“그냥 다친 적 없다고 해요.”

“박 사장이 전다고 했는데 나보고 말을 바꾸라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수사가 길어질수록 오인식은 구체적인 사람이 되었다.

술을 마시면 난폭해졌다. 봉제실 여자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불나기 이틀 전에는 두고 보자는 말을 했다. 가족은 없었다가, 딸 하나가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세탁소 여자가 혼자 사는 남자가 너무 많으면 경찰이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붙인 사정이었다.

“딸은 부산에 산댔어요. 아버지하고 연락 끊고.”

그 말을 하고 난 저녁, 오인식이 내 가게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문턱을 넘었다.

그는 공책을 한 권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작은 줄 공책을 주었다. 돈이 없다는 말에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딸 이름은 아십니까?”

나는 진열대의 지우개를 정리했다.

“몰라요.”

“꿈에 얼굴이 나오는데 부를 수가 없어서요.”

그가 나간 뒤 세탁소 여자에게 물으니 이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얼굴은?”

“그런 걸 내가 왜 생각해.”

나는 그 대답이 몹시 무서웠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을 그가 꿈꾸고 있었다.

이틀 후 오인식의 오른쪽 귀 위에 오래된 흉터가 생겼다. 박 사장이 예전에 싸움판에서 맞은 자국이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흉터는 처음부터 아물어 있었지만, 그는 생긴 날 저녁 내내 토했다. 세탁기 옆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대고 웅크렸다.

나는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물컵을 받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았다. 힘은 약했다.

“아주머니.”

그가 말했다.

“오늘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손을 빼지 못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눈 아래로 누런 눈곱이 흘렀다.

“미리 알면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날 밤 나는 찢은 회의록을 꺼냈다.

종량제 봉투 밑바닥에 다른 쓰레기와 섞어두었는데, 봉투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조각을 식탁에 늘어놓았다. 쇠사슬 구입비 삼천 원. 출입문 관리 담당. 참석자 다섯 명의 서명.

내 아들은 그해 가을 결혼할 예정이었다. 가게 보증금 절반을 아들 전셋돈에 보태기로 했다. 경찰서에 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이 종이 조각들이 돈이 될 것이고, 형량이 될 것이고, 아들이 장모 될 사람 앞에서 설명해야 할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알았다.

나는 조각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다음 날 오인식이 체포됐다.

봉제실 출입문 부근에서 인화성 액체의 흔적이 확인됐다는 기사가 났다. 나중에는 그 액체가 봉제 작업에 쓰던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지만, 이미 박 사장은 오인식이 빨간 기름통을 들고 가는 걸 봤다고 진술한 뒤였다.

우리는 기름통을 본 적이 없었다.

박 사장은 그것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안 끝낼 거야?”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오인식은 경찰차에 타기 전 내 가게 쪽을 보았다. 나는 계산대 아래로 몸을 숙였다. 무엇을 찾는 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첫 재판에서 나는 증인석에 섰다.

오인식은 수의를 입으니 더 작아 보였다. 목도리가 없어 목이 드러났다. 목덜미에 햇볕에 탄 선이 있었다. 공사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고 한 뒤 생긴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견딜 수 없었지만, 생각을 멈추면 그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의 변호인은 국선이었다. 젊은 남자는 서류를 뒤적이며 오인식이 위협하는 말을 직접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들었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말이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꾸민 문장을 읽는 동안 오인식은 입술을 움직였다. 뒤늦게 따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말보다 아주 조금 먼저 움직였다. 한 문장의 끝에 이르면 그는 힘을 주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다음 문장을 말할 때 다시 벌어졌다.

마지막에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오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서를 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했다. 그 설명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보호도 되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뒤 변호인이 나를 찾아왔다.

“피고인이 증인께 부탁한 게 있어서요.”

나는 도망갈 구실을 찾았다.

“가게에 공책을 두고 왔답니다. 가능하면 보내달라고 합니다.”

공책은 담요 밑에 있었다.

첫 장에는 오인식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줄마다 달랐다. 세탁소 여자의 둥근 글씨도 있었고 박 사장이 외상 장부에 쓰던 흘림체도 있었다. 중간쯤부터는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작고 반듯한 글씨로 바뀌었다.

그는 자기에게 생긴 일을 적고 있었다.

왼쪽 다리.

술 먹으면 성질이 나쁨.

이층 여자에게 돈 달라고 함.

딸 부산.

그 아래에는 물음표가 많았다.

딸 생일?

아내는 어디?

나는 원래 밥을 어디서 먹었나?

끝에서 두 번째 장에는 한 문장만 있었다.

불이 나기 전날 나는 누구와 있었습니까.

마지막 장은 편지였다. 받는 사람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밥을 잘 먹느냐고 물었고, 무릎이 좋지 않아 찾아갈 수 없다고 했고, 어릴 때 좋아하던 것이 생각나면 보내겠다고 썼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 장을 뜯었다.

공책은 나머지만 보냈다.

오인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판결이 나던 날 세탁소 여자는 가게마다 떡을 돌렸다. 무슨 떡이냐고 묻는 손님에게 고사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떡 봉지를 냉장고에 넣었다. 오랫동안 꺼내지 않아서 봉지 안쪽에 하얀 성에가 생겼다.

이듬해 봄, 변호인에게서 한 번 더 연락이 왔다. 오인식이 항소를 포기했으며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왜 저를요?”

“증인이 자기를 가장 오래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면회를 갔다.

오인식은 유리 너머에 앉았다. 귀 위의 흉터는 희어졌고 손의 굳은살은 조금 얇아졌다. 규칙적으로 밥을 먹어서인지 얼굴에는 살이 붙어 있었다. 그래도 왼쪽 다리를 접을 때는 숨을 멈췄다.

“딸을 찾으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했다. 그 표정은 내가 아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는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주소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가방 안에는 찢어낸 편지가 있었다. 일 년 동안 버리지도 돌려주지도 못한 종이였다.

“오 씨.”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 딸은 없어요.”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산에 산다는 것도, 연락을 끊었다는 것도 다 세탁소에서 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은…….”

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오인식이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내 쪽으로 펴 보였다. 경찰에게 멈추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 말은 하지 마십시오.”

“오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된 게 아니에요.”

“하지 마세요.”

그는 유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뒤에 서 있던 교도관이 쳐다보았다.

“얼굴이 없어집니다.”

그가 자기 눈썹 사이를 누르며 말했다.

“지금도 조금 없어졌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인식은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잠시 뒤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왼쪽 눈 밑에 점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아주머니도 본 적 있지요?”

그는 내 얼굴을 살폈다.

“작은 점입니다. 연한 갈색이고요.”

면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았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여자들이 모두 얼굴의 왼쪽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날 저녁 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인식에게 딸이 정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거야.”

“내가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럼 됐어. 이제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손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빈 호칭 아래로 작고 반듯한 글씨가 이어졌다. 종이를 펼치자 접힌 자리가 찢어졌다.

나는 풀을 꺼내 그 부분을 붙였다.

그 후로는 면회를 가지 않았다. 공책을 보내지도 않았다. 오인식이 무엇을 더 생각해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상가는 몇 년 뒤 새로 단장했다. 불탄 계단도 철거했다. 나는 가게를 아들에게 넘겼다. 박 사장은 병으로 죽었고 세탁소 여자는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철물점 주인은 가끔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갔지만 그 일을 이야기하는 법은 없었다.

오인식의 편지는 내 화장대 맨 아래 칸에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의 딸을 생각하게 된다. 부산 어디에 있을까. 저녁은 먹었을까.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가 미워지는 날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시작되면 나는 불을 켠다. 텔레비전을 틀고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미 있는 사람들만 생각하려고 애쓴다.

한 번은 편지를 태우려고 욕실 세면대에 놓았다. 라이터를 켜자 종이 끝이 검게 말렸다. 그때 문밖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곧바로 물을 틀었다.

그 뒤로 편지는 비닐에 넣어두었다. 호칭이 비어 있는 맨 윗줄까지 잘 보이도록, 접지 않고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