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사용량
3개 동 210세대가 다 비는 데 넉 달이 걸렸다. 마지막 세대가 빠진 날 오후에 조합 사무장과 같이 단지 입구의 제수변을 잠갔다. T자 키를 밸브 구멍에 꽂고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리자 땅 밑에서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사무장은 서류철을 덮으면서 이주 확인서는 전 세대 서명이 끝났고 현관 열쇠도 전부 반납됐다고 말했다. 반납된 열쇠에는 동과 호수를 적은 꼬리표를 달아 초소 캐비닛에 걸었다.
아침저녁으로 단지를 한 바퀴씩 돈다. 현관마다 빨간 락카로 공가 표시가 되어 있고 문틈에는 노란 테이프가 붙어 있다. 떨어진 테이프를 다시 붙이고, 우편함에 쌓이는 전단을 걷어 손수레로 초소 옆에 모은다. 놀이터 미끄럼틀에는 출입금지 현수막이 감겨 있다. 관리사무소가 철수하면서 CCTV는 떼어 갔고 세대 전기는 동별로 내렸다. 보안등과 계단참 콘센트가 물린 공용 계통은 단전일까지 살아 있다. 동쪽 펜스에는 개구멍이 하나 있다. 고물 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며 101동 지하의 동파이프를 잘라 갔는데 잘린 단면은 말라 있었다.
단수 나흘 전에 사무장이 초소로 왔다. 수도사업소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이주 완료 신고가 들어간 단지에서 물이 하루 0.4톤씩 나간다고 했다. 사무장이 보는 앞에서 제수변 뚜껑을 열고 손전등을 비췄다. 손잡이는 잠김 방향 끝까지 가 있었다. 사무장은 그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어디론가 보냈다.
다음 날 수도사업소 기사가 왔다. 아침에 인입 계량기를 읽고 저녁에 다시 읽었다. 낮 동안 지침은 그대로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0.4톤 앞으로 가 있었다. 기사는 밤에만 도는 물이라고 말했다. 청음봉을 관에 오래 대고 있다가 낮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고 했다. 세대 계량기를 표본으로 보자고 했다. 내가 103동을 맡겠다고 했고 기사는 101동과 102동을 돌았다. 계단마다 계량기함을 열고 지침을 적었다. 내가 낸 103동 검침표에는 전 세대 정지라고 적혀 있었다.
기사는 밸브가 오래되면 물이 미세하게 통과하는 수가 있고 그러면 관로 어딘가에서 땅속으로 새는 거라고 했다. 파 보려면 굴착이 필요했다. 사흘 뒤에 단수될 단지에 그 비용은 못 쓴다고 사무장이 말했고 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에 기사가 기계실 쪽을 보며 저수조 물은 안 빼느냐고 물었다. 사무장은 부술 때 같이 깨는 쪽이 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초소 앞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 사무장이 밤에만 물이 돌면 귀신이 목욕이라도 하는 거냐고 하자 기사는 웃지 않고 요금은 조합 앞으로 나간다고만 했다.
그날 오후에 사무장이 공문 두 장을 게시판에 붙이고 갔다. 한 장은 단수 안내였다. 사흘 뒤 오전 9시에 인입 계량기를 철거한다고 했다. 다른 한 장은 석면 해체 조사 안내였다. 단수 다음 날부터 조사반이 전 세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초소 캐비닛의 열쇠는 전부 조사반에 인계된다고 적혀 있었다.
밤이 되자 보안등이 켜진 길을 따라 입구까지 걸어가 제수변을 반 바퀴 열었다. 빈 관에 물이 차는 소리가 발밑을 지나갔다. 103동 3층까지 걸어 올라가 302호 문의 테이프를 결대로 떼어 문틀에 붙여 두었다. 302호 열쇠는 캐비닛에 없다. 내 주머니에 있다. 4월에 조합 사무실에서 302호 이주 확인서를 받아다 세대주 칸에 어머니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었다.
현관에는 신발이 두 켤레 놓여 있다. 계단참 공용 콘센트에서 끌어온 연장선이 문틈으로 들어와 안방까지 이어진다. 안방에는 요가 깔려 있고 베개 옆에 안경집이 놓여 있다. 문갑 위에서 충전되던 휴대전화에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25일 기초연금 342,510원 입금. 화면을 확인하고 도로 엎어 두었다. 안방을 나와 욕실로 가는 길에 부엌 벽의 달력이 3월인 채로 걸려 있었다.
욕실 문을 열면 물 냄새가 먼저 나온다. 욕조 안에 노인이 있다. 물 밖으로 나온 무릎 두 개가 희다. 피부는 눌러도 자국이 남지 않고 만지면 양초처럼 단단하다. 머리카락은 빠지는 대로 건져 배수구 덮개 위에 모아 둔다. 물 밖에 두었던 처음 며칠은 냄새가 계단까지 내려갔다. 그 층에 남은 집은 그때 이미 없었다. 물에 넣고부터는 냄새가 욕실 문 앞에서 그친다.
마개를 뽑아 물을 뺐다. 수위가 내려가는 동안 샤워기를 틀고 수온을 손목 안쪽으로 확인했다. 여름 수돗물은 미지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을 내리고 남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어머니, 물 갈아요."
새 물이 차오르자 무릎이 도로 반쯤 잠겼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눌러 닦고 욕실 불을 껐다. 새벽에 초소로 돌아가면서 제수변을 끝까지 잠갔다. 계량기함 유리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음 날 밤에 제수변을 반 바퀴 열고 302호로 올라갔다. 욕조 물을 빼고 새 물로 한 번 헹궜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담요로 쌌다. 업으니까 가벼웠고 젖은 머리가 목에 닿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세 번 쉬었다. 1층에 세워 둔 손수레에 태워 담요 끝을 여미고, 보안등 사이로 밀었다. 바퀴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기계실 자물쇠를 열고 손수레째 들였다. 저수조 점검구는 볼트 여덟 개로 잠겨 있었다. 벽에 걸린 공구함에서 스패너를 꺼내 하나씩 풀고 뚜껑을 열자 소독약과 물때 냄새가 올라왔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니 물은 절반쯤 남았고 수면은 판판했다.
담요째 안아 점검구 아래로 내렸다. 팔을 펴자 노인이 담요에서 미끄러져 발부터 들어갔다. 수면이 한 번 접혔다가 펴지고 흰 이마가 물 밑으로 내려갔다. 젖은 담요를 끌어올려 손수레에 놓았다. 뚜껑을 덮고 볼트를 조였다. 여덟 개를 다 조이고 마지막 볼트를 반 바퀴 더 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