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없음

해주는 새벽 1시 40분에 아파트 정문을 다시 통과했다. 경비실 유리창 안에서는 교대 근무자가 컵라면 뚜껑을 누르고 있었고, 1층 승강기 앞에는 낮에 본 노란 통제선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B호기는 문을 벌린 채 층과 층 사이에 멈춰 있었다. 카 바닥이 1층 승강장보다 허벅지 높이만큼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 어두운 틈은 합판으로 막아 두었다. 사고 때 끼어 있던 장바구니는 사라졌지만 바퀴 자국 두 줄이 합판 앞에서 끝났다. 해주는 고개를 돌려 A호기 버튼을 눌렀다가, 문 위 숫자가 15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며 계단 쪽으로 갔다.

관리사무소는 2층이었다. 조동문 관리소장은 불을 전부 켜 놓고 해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편의점 김밥 두 줄과 종이컵, 복사 용지 세 묶음이 놓여 있었다.

“미안하다. 아침 8시에 안전공단에서 다시 온대.”

소장은 해주에게 열쇠 꾸러미를 밀었다. 문서고 열쇠에는 흰 테이프로 `창고`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옆에 처음 보는 붉은 플라스틱 표찰이 매달려 있었다. `운행 정지. 조작 금지.` 검은 글씨가 손때에 번들거렸다.

“뭘 준비해요?”

“승강기 점검일지 3년 치. 부품 교체 내역하고 입주자대표회의 회의록도. 원본은 내가 볼 테니까 넌 복사만 해.”

해주는 코트를 벗지 않은 채 문서고로 들어갔다. 철제 선반 맨 아래 칸에 연도별 바인더가 세워져 있었다. B호기 바인더 하나를 뽑자 먼지가 손등에 내려앉았다. 평소에는 결재가 끝난 달의 서류를 다시 펼칠 일이 없었다. 유지관리업체에서 점검표와 청구서를 가져오면 해주는 금액과 계좌번호를 확인하고, 소장이 결재한 것을 월별 바인더에 끼웠다. 두 대분이 한 달에 열서너 장이었다. 3년 치를 꺼내자 팔에 다 안겼다.

복사기가 예열되는 동안 소장은 김밥 포장을 뜯었다.

“뭐라도 먹어. 저녁도 못 먹었잖아.”

“먹었어요.”

“언제?”

해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뒤 경찰과 구급대가 오가고 주민들이 관리사무소 문을 두드리는 동안, 소장은 두 번이나 해주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민수가 혼자 있지 않느냐고, 여기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혼하고 처음 이 관리사무소에 들어왔을 때도 소장이 근무표부터 바꿔 주었다. 중학생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 저녁 당직을 시켜서 뭐 하느냐며, 다른 직원들의 불평을 자기가 들었다.

그런 사람의 열쇠에 붉은 표찰이 달려 있었다.

해주는 첫 장을 복사기 유리 위에 놓았다. `정기 자체점검 결과표`. 점검자 이름은 달마다 달랐지만 글씨는 같았다. 운행 상태, 문 개폐, 제동장치, 비상통화장치. 네모 칸마다 양호 표시가 기울어진 각도까지 비슷했고, 특기사항에는 `문짝 소음. 주의 관찰`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달에는 `운행 시 진동. 주의 관찰`이었다. 그다음 달은 `도어 슈 마모. 주의 관찰`.

해주는 복사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석 달치를 나란히 놓았다. `관` 자의 아래 삐침이 길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소장이 지출결의서에 `관리비`라고 쓸 때마다 보던 글씨였다.

“소장님.”

“왜?”

“이거 기사님들이 쓴 거 아니에요?”

소장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현장에서 체크한 걸 내가 옮겨 적기도 해. 기사들이 손에 기름 묻히고 들어오니까.”

“도장은요?”

“본인들 도장이지.”

그 말은 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림승강기 기사들은 점검을 마치고 사무실에 내려와 도장부터 찾곤 했다. 도장집처럼 생긴 검은 주머니 안에 기사 이름 여섯 개가 들어 있었고, 누가 어느 현장을 돌았는지에 따라 이 부장이 골라 찍었다. 해주는 그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한 사람이 하루에 맡는 건물이 많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묻지 않았다.

황정숙은 804호에 살았다.

정숙이 처음 관리사무소에 온 것은 남편이 B호기에 40분 동안 갇힌 다음 날이었다. 잠옷 위에 조끼만 걸치고 나왔던 남편이 그 뒤로 승강기를 타지 못한다며, 8층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리라는 거냐고 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같은 질문을 답이 나올 때까지 되풀이했다. 비상벨은 왜 경비실에서 안 받았는지, 출동 시각은 왜 신고보다 18분 늦는지, 전날 교체했다는 부품 이름은 무엇인지.

소장은 따뜻한 물을 내왔고 이 부장은 노후 장비라 일시적인 신호 불량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주는 정숙의 남편이 계단을 쉬어 가며 오르다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점심시간이 지나 카드 전표를 마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숙은 왔다. 이제 갇힐 사람이 없는데 왜 계속 그러느냐고 묻는 주민도 있었다. 정숙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관리비로 고친 물건이 정말 고쳐졌는지만 보겠다고 했다. 부품 청구서 사본을 요구했고, 점검일지를 휴대전화로 찍었다. 촬영 각도가 비뚤어지면 해주에게 종이를 눌러 달라고 부탁했다.

“이 글씨, 소장님 글씨죠?”

정숙은 지난달 사진을 확대해 보며 말했다.

해주는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몰랐고, 알고 싶지 않았다. 정숙은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해주의 명찰을 한 번 보았다.

“해주 씨는 여기 오래 다닐 거죠?”

“왜요?”

“오래 다닐 거면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 말이 훈계처럼 들려 해주는 종이를 먼저 치웠다.

복사기에서 첫 장이 밀려 나왔다. 새벽의 사무실에서는 종이가 떨어지는 소리도 사람 발소리처럼 컸다. 소장은 김밥을 반 줄쯤 먹다가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해주는 점검표를 한 장씩 넘겼다.

3년 동안 B호기에는 도어 개폐 장치가 네 번 교체되어 있었다. 품목 번호가 같고 금액만 조금씩 달랐다. 비상통화 배터리는 두 번, 제동 코일은 세 번이었다. 한겨울 폭설로 차량이 오지 못했다던 날에도 제어기판 한 장이 반입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해주는 그 청구서를 기억했다. 세림승강기에서 날짜를 잘못 썼다며 수정본을 보내 왔고, 소장이 월을 넘기면 예산이 꼬인다고 해서 원래 날짜로 지출했다.

그때는 67만 원이었다. 사고가 난 뒤에 다시 보아도 67만 원이었다. 숫자는 아무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문서고 안쪽에서 2024년 회의록을 꺼냈다. 노후 승강기 전면 교체안은 그해 두 번 부결되어 있었다. 저층 세대는 분담금 산정에 반대했고, 고층 세대는 장기수선충당금이 부족한 이유부터 밝히라고 했다. 정숙이 다른 업체의 진단과 견적도 받아 보자고 한 대목 다음에는 유기철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의 답이 적혀 있었다. 지금 설비를 관리하는 업체가 상태를 가장 잘 아니 세림승강기 견적부터 검토하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었다. 회의는 그 말 뒤에 다음 분기로 미뤄졌다.

밖에서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부장님. 아직 찾고 있습니다. 오시면 같이 보시죠.”

해주는 서둘러 복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를 가지런히 맞춘 다음 천천히 덮었다. 급하게 움직이면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사고는 저녁 7시 6분에 났다. 그 시각은 구급활동일지와 경비일지, 해주의 통화기록에 각각 남아 있었다. 해주는 7시 11분에 경비원에게 전화를 받았다. 건전지를 사러 단지 밖 생활용품점에 가 있던 때였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소장이 804호에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사진 말고 원본도 있으시다면서요. 지금 내려오시면 봐 드릴게요.”

정숙이 뭐라고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소장은 통화를 끝내고 해주에게 무선 마우스 건전지와 A4 색지를 사 오라고 했다. 둘 다 다음 날 사도 되는 물건이었다. 해주는 야근수당을 30분 더 붙일 생각으로 싫다는 말 없이 나갔다.

돌아왔을 때 1층 현관은 열려 있었고 주민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유리문 밖에 모여 있었다. B호기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였으며, 카 바닥은 1층보다 80센티미터쯤 위에서 멈춰 있었다. 정숙의 장바구니 앞바퀴 두 개는 카 안에, 뒷바퀴는 승강장에 남아 비스듬히 찌그러져 있었다. 장바구니에서 나온 대파와 두부 한 모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숙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구급대원들이 세운 가림막 아래로 회색 운동화 한 짝만 나와 있었다.

누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는 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소장은 정숙이 열린 문으로 들어가 8층 버튼을 누른 순간 카가 위로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승강기 문이 열린 상태에서는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이 부장은 안전회로가 정상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여러 번 했다.

있을 수 없는 일.

해주는 사고가 난 달의 B호기 바인더에서 얇은 작업확인서 한 장을 발견했다. 다른 종이보다 폭이 좁고, 복사된 글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B호기 1층 도어 잠금 신호 간헐 오류 재현 점검.`

작업 예정 시각은 사고 당일 오후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였다. 점검하는 동안 제어기가 문을 닫힌 것으로 읽게 하는 시험 상태를 쓰며, 운행을 재개하기 전에 반드시 원상 복귀한다는 주의문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점검 중 승객 이용 금지`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세림승강기 이 부장의 서명과 조동문 소장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

해주는 종이를 들고 1층 승강기 앞을 떠올렸다. 생활용품점으로 나갈 때 B호기 앞에는 접이식 안전표지와 붉은 운행 정지 표찰이 있었다. A호기를 기다리던 택배기사가 표지를 발로 밀어 통로를 넓혔고, 해주는 넘어질까 봐 다시 B호기 문 앞에 세워 놓았다. 돌아왔을 때 표지는 관리사무소 벽에 기대어 있었다. 붉은 표찰은 지금 소장의 열쇠에 달려 있었다.

소장 혼자 옮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점검이 끝났다는 서류는 없었다. 사고 전까지 B호기를 운행해도 된다는 확인도 없었다.

해주는 작업확인서를 복사기 위에 놓았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소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건 빼.”

해주는 손을 버튼 위에 둔 채 소장을 보았다.

“왜요?”

“예정표야. 실제 작업 안 했어.”

“서명까지 했는데요.”

“미리 받아 놓은 거라고. 현장 일이 다 서류처럼 되냐?”

복사기 안에서 빛이 한 번 지나갔다. 종이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소장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낮게 울다가 멈췄다.

“해주야. 지금 다들 정신이 없어서 그래. 확인 안 된 종이 하나 잘못 들어가면 너도 조사받아. 지출한 사람 네 이름이고, 세금계산서 대조한 것도 너야.”

소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민수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근무표를 바꿔 주던 목소리였다. 해주는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만 다정했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장에게도, 이 부장에게도, 화가 난 주민에게도 소장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높이로 말할 줄 알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세림승강기 이 부장이 들어왔다. 작업복 위에 패딩 조끼를 입고, 가슴 로고를 검은 테이프로 가려 놓았다. 조사 중인 업체 직원이 현장에 드나니 주민들이 찍는다고 했다. 그는 새 바인더 하나를 소장 책상에 올렸다.

“찾으셨어요?”

“예정표를 실제 작업한 것처럼 보네.” 소장이 말했다.

이 부장은 해주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읽고 입술 안쪽을 혀로 한 번 밀었다.

“이거 취소된 겁니다. 전산에 잘못 남은 거예요.”

“그럼 이날 왜 오셨어요?”

“누가요?”

“부장님 차가 6시 22분에 들어왔어요. 주차 할인 등록 제가 했잖아요.”

이 부장이 소장을 보았다. 그 짧은 눈길 때문에 해주는 자신이 맞게 기억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부장은 낮에 방문차량 등록 문자를 보내 왔고, 해주는 생활용품점에 나가기 전에 4시간 무료 주차를 넣어 주었다.

“다른 호기 본 겁니다.”

“A호기는 그날 점검 내역이 없는데요.”

“김 주임님.” 이 부장이 말했다. “승강기 잘 모르시잖아요.”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승강기를 몰랐다. 문이 열리면 타고 닫히면 버튼을 누르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래서 문이 열린 채 움직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점검 중 이용 금지라고 적힌 B호기 앞에서 누군가 표지를 치웠고, 그 호기를 타게 될 사람을 사무실로 불렀으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이 그 시간에 같은 건물에 있었다.

이 부장이 가져온 바인더를 열었다. 3년 치 점검표가 월별로 새 비닐에 들어 있었다. 오래된 종이도 가장자리가 닳지 않았고, 모든 장에 같은 푸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고 전 넉 달의 특기사항은 해주가 조금 전 본 원본과 달랐다.

`1층 도어 잠금 접점 일시 불량. 운행 지장 없음. 주의 관찰.`

네 달 연속 같은 문장이었다. 잉크는 어느 장이나 같은 농도였다.

“이게 원본입니다.” 이 부장이 말했다. “사무실에 있던 건 작성 중인 사본이고.”

해주는 정숙이 관리사무소 공용 메일로 보낸 사진을 떠올렸다. 점검표 사본을 달라는 요청과 함께, 자기가 찍은 원본 사진 여덟 장을 첨부했었다. 소장은 답하지 말라고 했고 해주는 메일에 별표만 붙여 두었다. 그 사진 속 특기사항에는 `도어 슈 마모`라고 적혀 있었다.

해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켰고, 소장은 말없이 그 옆에 섰다.

“뭐 해?”

“사진 확인하려고요.”

“지금?”

“원본이 어느 건지는 알아야 복사를 하죠.”

비밀번호를 두 번 틀렸다. 손끝이 차서 키가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세 번째에 바탕화면이 열렸다. 공용 메일함에서 정숙의 이름을 검색하자 읽지 않은 메일 하나가 나왔다. 사고 당일 오후 5시 48분에 보낸 것이었다.

`오늘 가져갈 자료입니다. 관리소에서 없다고 할까 봐 먼저 보냅니다.`

첨부파일에는 정숙이 찍은 점검표와 부품 청구서가 있었다. 마지막 사진은 3년 치 부품 내역을 손으로 정리한 공책 두 쪽이었다. 같은 품목 번호에 동그라미가 쳐 있었고, 맨 아래에 숫자가 하나 적혀 있었다. B호기에만 3년 동안 청구된 부품비의 합계였다.

해주는 그 숫자를 계산기에 다시 두드렸다. 정숙의 합계와 12만 원 차이가 났는데, 청구서 한 장의 부가세를 빼먹은 탓이었다. 다시 넣자 같아졌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해주는 메일 전달 버튼을 눌러 수신인 칸에 낮에 명함을 두고 간 조사관의 주소를 붙여 넣고 `보내기`를 클릭했다. 첨부파일 이름들이 사라지는 것과 소장이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발송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모니터가 검어졌다.

아무도 곧바로 말하지 않았다. 복사기 냉각팬만 돌아갔다. 소장은 해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자기 열쇠를 집어 들었다. 붉은 표찰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가벼운 소리를 냈다.

“보냈니?”

해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너 챙긴 게 얼만데.”

그 말은 해주가 예상한 협박보다 오래 아팠다. 소장이 해준 일들이 한꺼번에 값으로 바뀌었다. 아들이 입원했을 때 대신 선 당직, 명절 상여를 며칠 먼저 준 일, 이혼했다는 말을 다른 직원 앞에서 꺼내지 않은 일. 해주는 그것들을 고마움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아서 해주는 한 번 더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이 부장은 새 바인더를 닫았다. 소장은 붉은 표찰을 손바닥 안에 감쥐었다. 둘은 해주를 붙잡지도, 컴퓨터를 다시 켜지도 않았다. 메일이 발송됐으면 이미 늦었고, 발송되지 않았으면 해주가 다시 보낼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셋은 잠시 같은 사무실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고요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해주는 원래 바인더와 새 바인더를 각각 다른 상자에 담았다. 작업확인서, 방문차량 등록 내역, 정숙의 메일을 출력한 종이는 원래 바인더 위에 놓았다. 소장은 결재 의자에 앉아 해주를 보지 않았다. 이 부장은 오전 현장 일정이 있다며 먼저 나갔다.

조사관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해주는 어느 쪽이 원본인지 설명했다. 설명하는 동안 지출결의서 담당자 칸에 찍힌 자기 도장도 함께 짚었다. 조사관은 해주에게 별도 진술이 필요하다고 했고, 휴대전화를 제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해주는 민수에게 학교에 잘 갔다는 문자를 받은 뒤 전원을 껐다.

그날 오후 임시 입주자대표회의는 예정대로 열렸다. 해주는 진술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회의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주민들은 사고가 난 B호기를 지나 계단으로 올라오느라 숨을 골랐고, 한 사람씩 회의실 문을 밀었다.

노후 승강기 전면 교체안은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공사비가 너무 크다는 말은 나왔지만, 이번에도 미루자는 사람은 없었다. 유기철 회장은 피해자에 대한 묵념을 먼저 하자고 했다. 조동문 소장은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세림승강기는 사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입찰에서 빠지겠다는 공문을 보내 왔다.

두 달 뒤 교체 공사가 시작되었다. 해주는 이미 관리사무소를 그만둔 뒤였지만, 마지막 급여명세서를 받으러 단지에 들렀다가 승강기 앞에 쌓인 보양재를 보았다. 선정된 업체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작업자들은 새 조끼를 입고 있었고 자재 상자에도 다른 로고가 붙어 있었다.

1층 현관에서 작업자 한 명이 출입 명부를 쓰고 있었다. 이름을 적고 서명하는 손등에 검은 기름이 묻어 있었다. 해주는 그 사람을 알았다. 세림승강기에서 도장 주머니를 들고 다니던 기사였다.

그는 해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명부의 점검 목적 칸에 `기존 설비 철거 전 상태 확인`이라고 쓴 뒤, 비고 칸에는 `이상 없음`이라고 적었다. `관` 자도, `찰` 자도 없는 짧은 네 글자였다.

해주는 휴대전화를 꺼내 명부와 새 조끼의 로고가 한 화면에 들어오게 찍었다. 작업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저 종이를 넘겨 다음 사람의 이름을 받을 자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