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

남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안 것은 손목이었다. 케이블 타이가 살을 파고들어, 맥이 뛸 때마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뼈를 눌렀다. 다음이 냄새였다. 락스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다음이 온도였는데, 등이 닿은 철제 의자는 얼음장 같았고 엉덩이 밑이 축축했다. 자기가 지린 것인지 원래 젖어 있던 자리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창문은 없었다. 형광등 하나가 천장에서 지지직거렸고, 어딘가에서 냉장 설비가 낮게 웅웅거렸다. 벽을 따라 늘어선 철제 선반에는 라면 상자와 물티슈 묶음, 유통기한 스티커가 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어느 가게의 창고였다.

맞은편 접이의자에 청년이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크고 얼굴이 물렁했다. 청년은 삼각김밥을 뜯어 천천히 먹으면서, 밥알을 씹는 내내 남자를 보았다. 급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의 눈이었다.

남자는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당장 풀라고,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비닐을 구겨 발밑에 버렸다.

남자는 손목을 비틀어 보았다. 타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발버둥을 칠수록 의자만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조금씩 돌아갔다. 그는 방향을 바꿔 그를 구슬리려 했다.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고. 처자식이 있고, 30년을 성실히 일한 사람이라고. 돈이 필요하면 통장이며 비밀번호며 다 줄 테니 이러지 말라고 했다. 청년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돈은 필요 없다고 짧게 답하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억은 목덜미에서 끊겨 있었다.

그 밤을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늘 하던 대로 그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저 지나간 것뿐이다. 골목이 어두워 발밑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목에 뭔가 따끔했다. 벌에 쏘인 것 같았다. 손을 올릴 새도 없이 다리가 풀렸고, 누군가 겨드랑이를 받쳐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게 전부다. 그는 억울했다.

다만, 하고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밤 그의 주머니에는 청테이프가 한 롤 들어 있었다. 목장갑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었다. 겨울도 아닌데 장갑이 왜 있었는지는 그 자신도 잘 설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테이프는 집에서 쓰려고 산 것을 깜빡 넣어 둔 것뿐이다.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그 정도 물건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세상이 잘못이었다.

낮의 그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견 회사의 자재과에서 30년을 일했다. 지각이 없고, 목소리가 크지 않고, 회식 자리에서 늘 먼저 일어나 상사의 신발을 찾아 주는 사람이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그의 셔츠를 다려 주었고, 그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사무실 창가에서 혼자 먹었다. 동료들은 그를 두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겸손하게 웃었다.

그 웃음 안쪽에서 무슨 생각이 도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자신도 오래 몰랐다. 그는 그저 자기가 남들보다 마음이 여려서, 무언가를 한번 마음에 들이면 그 마음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젊어서는 그 마음의 대상이 자주 바뀌었다. 옆자리 여직원의 머리핀, 딸아이 친구의 웃음소리. 그는 그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도시락 뚜껑을 닫곤 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죄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는 평생 그 문장 하나로 자신을 사면해 왔다.

그 집을 처음 안 것은 봄이었다.

버스에서였다. 그는 늘 뒷자리에 앉았다. 그날은 앞쪽에 교복 입은 여학생이 탔고, 창으로 든 볕이 그 애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그는 그 목덜미를 오래 보았다. 무언가가 오래된 우물처럼 그의 안에서 천천히 차올랐다. 다음 정거장에서 그 애가 내리자 그도 따라 내렸다. 왜 내렸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발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 애는 어느 빌라로 들어갔다. 그는 그 앞에 서서 몇 층에 불이 켜지는지 보았다. 3층 왼쪽 창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그 앞을 지나갔다.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이 나이에 가슴이 이렇게 뛰는데. 그는 그 애의 이름을 우편함에서 알았다. 우편함을 연 것은 나쁜 손이 그 애에게 못된 편지라도 넣을까 걱정돼서였다고, 그는 그렇게 정리해 두었다. 그 애를 지켜 주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세상은 위험하니까.

버스 뒷자리에는 가끔 그가 앉았던 흔적이 남았다. 젖은 자국. 그는 그것을 봄이 되어 날이 눅눅해진 탓으로 돌렸다.

여름이 되자 그는 더 가까이 갔다.

그는 그 애의 하루를 외웠다. 아침 7시 40분 버스, 오후의 학원, 밤 10시가 넘어 켜지는 3층 왼쪽 창의 불. 그 애가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그는 집으로 가져왔다. 봉투를 풀면 그 애의 하루가 나왔다. 다 쓴 치약, 손 편지의 찢긴 조각, 학원 시간표. 그는 그것들을 서랍에 정리했다.

한번은 그 애가 골목에서 뒤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의 얼굴에 스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것을 그는 부끄러움으로, 혹은 첫사랑을 들킨 아이의 설렘으로 번역했다. 실은 그것이 공포였다는 것을 그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 애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봉투에서 한 권 나왔다. 반납일이 지나 있었다. 그는 그 책을 반납하지 않았다. 반납하면 그 애와 자기를 잇는 실이 하나 끊기는 것 같아서였다. 책은 지금도 그의 방 책상 서랍에 있다. 연체료가 매일 붙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둘 사이가 매일 깊어지는 증거처럼 여겼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평생 그를 사면해 온 문장이 처음으로 힘을 잃었다. 여름의 끝에 그는 결심했다. 딱 한 번,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고 그는 우겼다. 다만 이야기를 나누려면 조용한 곳이 필요했고,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을 뿐이다. 테이프와 장갑은 그래서 주머니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준비라고 불렀지 납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 밤, 목에 바늘이 꽂혔다.

창고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청년이 일어났다. 그는 선반 아래에서 종이상자 하나를 꺼내 남자의 발치에 놓았다. 상자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남자가 그 집 앞에 서 있는 사진, 우편함에 손을 넣는 사진, 쓰레기봉투를 들고 골목을 빠져나오는 사진, 버스에서 여학생의 뒷목을 보는 사진. 날짜가 구석마다 찍혀 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남자는 그 청년을 그제야 알아보았다. 그 집 앞 편의점의 야간 알바였다. 남자가 그 집 앞을 서성이던 모든 밤, 길 건너 편의점 유리 안에는 늘 이 청년이 있었다. 남자는 매일 밤 그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하나씩 샀다. 잠복의 긴 밤을 버티려고 산 것이었다. 계산대의 청년과 눈이 마주친 적도 많았다. 그때 청년은 늘 웃으며 봉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남자는 물었다. 왜 이러느냐고. 원하는 게 뭐냐고. 그 애 때문이냐고, 그 애를 지키려는 거냐고.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한테는 관심 없다고 했다. 자기가 반년 동안 매일 밤 지켜본 것은 그 애가 아니라 남자였다고. 남자가 어떻게 걷는지, 어느 손으로 우편함을 여는지, 몇 시에 그 집 앞을 떠나 어느 버스를 타는지. 청년은 남자의 하루를 남자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그 애를 수집한 반년 동안, 이 청년은 남자를 수집하고 있었다.

남자는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떨렸다.

그는 청년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여자를, 아니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특히 남자한테는. 자기는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는 멀쩡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이러지 말라고, 자기는 게이가 아니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 말만은 또렷하고 다급했다.

청년은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러고는 상자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반납일이 지난 도서관 책이었다. 남자의 책상 서랍에 있어야 할 그 책이, 청년의 손에 있었다. 청년은 남자의 방에도 다녀온 것이었다.

청년은 남자에게 물었다. 이 책의 주인이 당신더러 빌려 가도 좋다고 한 적이 있느냐고. 그 여학생이 당신에게, 나를 봐도 좋다고, 따라와도 좋다고, 내 쓰레기를 뒤져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있느냐고.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됐다고 청년은 말했다. 자기도 허락 같은 것은 구하지 않겠다고.

남자가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다시 외치자, 청년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 집 앞 편의점에서 봉투가 필요하냐고 묻던, 그 물렁하고 친절한 웃음이었다.

청년은 물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느냐고.

남자는 그 문장을 어디서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반년 동안 그 자신이 매일 밤 그 집 앞에서 속으로 되뇐 문장이었다. 내가 저 애를 좋아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내가 좋아하면 안 되느냐고. 그 문장은 한 번도 대답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청년이 삼각김밥 비닐을 밟고 다가왔다. 발밑에서 비닐이 젖은 소리를 냈다. 남자는 엉덩이 밑이 다시 뜨겁게 젖어 오는 것을 느꼈고, 이번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봄부터 버스 뒷자리에 남아 있던 그 자국이, 이제 자기 밑에 고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