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6월 21일, 만난 지 100일째.**
재하가 헤어지자고 했다. 100일이라고 두 주 전부터 예약해 둔 식당에서, 파스타가 반쯤 남은 접시를 사이에 두고, 그 사람은 물컵만 빙빙 돌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비밀이 있는데, 말하면 네가 도망갈 거고 안 말하면 널 다치게 할 거라서, 둘 다 싫어서 그냥 없어지고 싶다고. 나는 웃을 뻔했다. 이별 통보치고는 너무 낡은 대사였으니까. 그런데 서른둘 먹은 남자가 손등으로 눈을 누르며 우는 걸 보고 있으면, 웃음이 목 안에서 그냥 식는다.
그 사람 말은 이랬다. 자기한테 죽은 여자가 붙어 있다고. 오래전 자기를 좋아했던 사람인데 물놀이 사고로 죽었고, 이제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질투로 그 여자를 해친다고. 그 사람은 그 말을 하는 내내 나를 안 봤다. 자기가 무슨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친 소리다. 스물아홉 해 동안 귀신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 사람이 저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이별할 이유는 충분했다. 본인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병원부터 데려가야 했다. 나는 냅킨을 그 손에 쥐여 주면서, 그럼 내가 안 죽으면 되잖아, 하고 말했다.
식당 오기 전에 그 사람 오피스텔에 잠깐 들렀는데, 1층 우편함에 붉은 딱지 붙은 봉투가 세 통 꽂혀 있었다. 수취인은 윤가은, 전에 살던 사람인데 연락이 끊겨 자꾸 온다고 재하가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을 왜 적어 두는지도 모르면서 적어 둔다. 버릇이니까.
**9월 4일, 새벽 1시**
그 여자가 있다. 재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오늘 둘이 막차를 탔다. 지하철 승강장 노란 선 앞에 나란히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안내 방송이 나오고 바람이 훅 밀려오는 그 순간에, 누가 내 외투 뒷깃을 잡아 뒤로 홱 당겼다.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세우고 돌아봤지만, 재하는 내 왼쪽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였고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뒷깃만 손자국처럼 뜨듯했다. 아니, 뜨듯한 게 아니라 시렸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물기 밴 살구 냄새, 여자들이 바르는 핸드크림 같은 냄새였다.
외투를 당긴 힘보다 냄새가 오래 남았다. 재하한테서는 한 번도 안 난 냄새였으니까. 재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새하얗게 질려서, 봤지, 봤지, 하고 물었다. 나는 못 봤다고 했다. 손이 떨려서 개찰구까지 그 사람 팔을 붙잡고 걸었다.
집에 와서 그 장면을 적어 보니 방향이 이상하다. 그 여자는 나를 재하한테서 자꾸 떼어 놓으려 한다. 승강장에서도 재하 반대쪽으로 당겼다. 질투가 그런 거라던데. 사랑하는 사람 곁에 못 붙어 있게 하는 거. 좋다. 질투해라. 나는 안 떨어진다.
**10월 30일, 밤 9시**
재하 오피스텔 화장실에서 그 여자 것을 찾았다. 찾았다기보다, 손이 저절로 거기 갔다.
세면대 아래 수납장을 열었더니 남자 혼자 사는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안쪽 구석에 밀려 있었는데, 반쯤 쓴 여자 핸드크림과 색색의 머리끈과, 습기를 먹어 여닫을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내는 서랍이 거기 있었다. 핸드크림 뚜껑을 여는 순간 알았다. 살구 냄새. 지하철 승강장에서 내 뒷깃을 잡아채던 그 밤에 콧속으로 훅 끼쳐 온 바로 그 냄새여서, 나는 손끝이 시려 뚜껑을 도로 닫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름이 있고 핸드크림이 있고 머리끈이 있는, 여기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다. 나는 재하한테 묻지 않았다. 물으면 또 그 얼굴을 할 테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혔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다. 나를 그 수납장 앞에서 억지로 떼어 내려는 것처럼, 그 여자는 내가 무언가를 알게 되는 걸 싫어한다. 질투란 그런 거겠지. 자기 혼자만 알던 것을 내가 알아 버리면 견딜 수 없는 거다. 나는 어둠 속에 대고 조그맣게 말해 줬다. 됐어, 나는 아무것도 안 볼게. 재하만 볼게.
**12월 12일, 밤 10시**
재하 친구를 만났다. 대학 때부터 봤다는 사람. 재하가 화장실 간 사이에 나는 물어봤다. 재하 예전 여자친구 얘기, 정말이냐고. 그 친구는 잠깐 술잔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랬다. 그게… 진짜 사고였어요. 경찰도 사고로 봤고. 재하가 제일 힘들어했어요. 장례식에선 넋이 나가서.
친구 말도 재하와 같았다.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다. 그 여자. 그 여자만 내가 잘 다독이면 된다.
요즘 그 냄새가 자주 난다. 재하가 끓여 준 유자차를 마시려는데 컵이 식탁에서 저 혼자 미끄러져 깨진 밤에도 났고, 재하 손을 잡으려고 소파에서 손을 뻗었을 때 손목을 꽉 쥐어 못 움직이게 한 밤에도 났다. 그때마다 살구 냄새. 나는 이제 그 냄새가 나면 속으로 말한다. 알아, 아는데, 나는 안 가. 재하는 이런 일을 몇 년이나 혼자 견뎠다. 이제는 내가 있으면 된다. 귀신이 뭘 어쩌겠어.
**3월 13일, 내일이면 만난 지 366일.**
내일 재하랑 바다에 간다. 1주년 기념으로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별러 온 곳이란다. 인적 드문 곳에 아주 예쁜 곳이 있어서, 거기서 같이 사진 찍고 싶다고.
어젯밤이 제일 심했다. 자다가 어깨를 누가 잡아서 침대 밖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이불을 걷어차고 현관 쪽으로. 나를 이 집에서 아예 끌고 나가려는 것처럼. 살구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다. 나는 안 끌려갔다. 이불을 붙잡고 버텼고, 아침에 깨어나 보니 어깨에 멍이 보였다. 1년 동안 같은 냄새가 났고, 나는 아직 재하 곁에 있다.
재하한테는 멍 얘기를 안 했다. 내일은 그냥 웃고 사진만 예쁘게 찍을 거다.
**3월 14일.**
도착. 바람 미쳤다. 재하 삼각대 세우는 중. 여기가 거기래. 사람은 많이 없지만 풍경은 너무 멋지다.
재하가 사진을 열심히 찍어 준다. 이 각도. 저 각도.
바다 바라보고 서서 먼 곳을 응시하래. 노을이 지려는 풍경이 너무 멋지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을 때린다. 살구 냄새.
어깨를 두 손이 잡는다. 재하가 자세 잡아 주나 했다. 얼음장이다. 이 냄새. 재하 손이 이렇게 찰 리가 없는데. 그 손이 나를 뒤로, 절벽 반대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로 그 순간, 등 한복판을 밀어붙이는 다른 손이 있다. 그건 따뜻하다. 재하 손이다.
내 몸이 절벽 아래로 넘어갈 때도, 차가운 두 손은 끝까지 나를 절벽 반대쪽으로 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