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이후
아줌마, 그 방은 따님 방으로 쓰지 마세요.
아저씨는 오후 볕이 오래 들어서 아이 방으로 좋다고 했지요. 거짓말은 아니에요. 여름이면 오후 4시까지 창틀이 뜨겁고, 겨울에도 다른 방보다 늦게 어두워져요. 책상 오른쪽 서랍은 자꾸 걸리니까 살짝 들어 올려 당겨야 하고요. 아저씨가 그런 것까지 아는 건 꼼꼼해서가 아니에요. 그 방에서 내 책과 옷을 상자에 담은 사람이 아저씨거든요.
이 집은 원래 아저씨 집이에요. 비어 있던 할머니 집을 고쳐 쓰는 거라고 했어요. 아빠 병원비로 전셋돈을 거의 다 쓴 엄마에게는 보증금 없이 들어와 살라는 말이 집 한 채를 건네는 것처럼 들렸을 거예요. 나는 우리 셋이 얹혀산다는 게 싫었지만, 우진이는 마당이 생겼다고 좋아했어요. 엄마는 월세가 굳으면 내 학원도 다시 보낼 수 있다고 했고요. 결국 이사 온 사람은 셋 다였어요.
이사 첫날에는 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마루에서 자장면을 먹었어요. 우진이는 자기 방 문틀에 키를 표시하겠다며 연필을 찾았고, 엄마는 남의 집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웃었어요. 밤에는 풀숲에서 벌레가 너무 크게 울어서 셋이 한 방에 모였어요. 아저씨는 그날 자고 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오랜만에 이사 온 집에서 해야 할 말만 했고, 아무도 병원이나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그 집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나도 했어요.
아줌마가 지금 듣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말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처음에는 나도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엄마는 못 들은 게 아니라 듣고도 나를 보지 않았지만, 둘은 결과가 비슷하니까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에는 공구 상자를 들고 있었어요. 엄마는 수도꼭지만 보고 가기로 했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마루 밑 배관까지 기어들어 갔고, 나오는 길에 헐거운 대문 경첩도 조였어요. 우진이가 게임을 하다 인사도 안 하자 버릇없다고 화내는 대신 화면을 들여다보며 어디까지 깼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쉬워요. 아이를 좋아하는 어른과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아는 어른은 전혀 다른데도요.
엄마는 그 뒤로 아저씨 몫의 수건을 따로 삶았어요. 셔츠 소매도 뒤집어 다렸고요. 아빠 병원비가 빠져나간 통장을 찬장 깊이 밀어 넣는 일도 그 무렵 그만뒀어요. 나는 그걸 다 보면서도 엄마가 외로워서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하면 엄마는 내가 엄마를 불쌍하게 본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대신 아저씨가 오면 내 방 문을 닫았어요.
아빠가 아프기 전에는 엄마와 내가 한편이었어요. 우진이가 사고를 치면 둘이 눈만 마주쳐도 누가 달래고 누가 치울지 정해졌어요. 아빠가 죽은 뒤에는 엄마가 자꾸 내 눈을 피했어요. 내가 아빠와 닮아서였는지, 이제 나까지 어른 노릇을 할까 봐 그랬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어요. 아저씨가 생긴 뒤에는 엄마가 다시 내 앞에서 웃었지만,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 걸 서운해하는 내 마음 때문에 의심까지 전부 가짜가 될까 봐 나는 더 말을 아꼈어요.
우진이는 금방 아저씨 편이 됐어요. 아저씨가 새 게임기를 사 줘서가 아니라, 보호 필름 안에 들어간 먼지를 바늘 끝으로 빼 주었기 때문이에요. 우진이는 그런 걸 오래 기억하는 아이였어요. 중국집에서는 내 말에 따라 찍어 먹다가 아저씨가 소스를 부으니 또 그쪽이 낫다고 했어요.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잠들었고, 아저씨는 신호를 기다리며 룸미러로 우진이를 오래 봤어요. 나는 아이를 예뻐하는 눈이 아니라 물건을 다 챙겼는지 확인하는 눈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이름을 검색했어요. 흔한 이름이라 동창회 명단과 낚시대회 사진만 나왔어요. 그래도 몇 장을 넘기다 칠 년 전 지방 기사 하나를 찾았어요. 저수지에서 차가 물에 빠져 여자와 아이가 죽고 동승했던 남자만 살아남았다는 짧은 기사였어요. 살아남은 남자는 아저씨와 이름과 나이가 같았고 차종도 같았지만 사진은 없었어요. 사고가 난 곳은 여기서 한 시간 거리였고요. 나는 기사를 인쇄해 수학 문제집 사이에 끼운 뒤, 여백에 자꾸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썼어요. 어른 한 명이 그 종이를 보고 내가 틀린 자리를 정확히 짚어 주었으면 했어요. 엄마에게는 끝내 보여 주지 못했지만요.
증거는 아니었지만 그 뒤로 나는 아저씨의 차만 봤어요. 조수석 매트에 박힌 붉은 흙, 비가 안 왔는데도 고무에서 올라오던 물비린내, 트렁크에 둥글게 말아 둔 견인줄. 우리 학교가 봄에 저수지 쪽으로 생태 수업을 갔을 때 운동화가 꼭 그런 색으로 물들었어요. 아저씨는 물을 무서워해서 낚시도 계곡도 싫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요.
나는 매트의 흙을 손톱으로 긁어 휴지에 쌌어요. 경찰에 가져가려던 건 아니에요. 엄마가 또 내가 싫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면, 적어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것이 하나는 있었으면 했어요.
그날 저녁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었어요. 내가 아저씨가 밤에 어디 다니는지 물었을 때 엄마 손이 잠깐 멈췄어요. 저수지 쪽은 왜 가느냐고 묻자 수건 귀퉁이를 두 번 접었고요. 엄마는 밤길이 조용해서 드라이브한 거라며, 이상한 검색을 그만하라고 했어요. 나는 기사도 흙도 꺼내지 않았어요. 엄마가 접어 놓은 수건의 비뚤어진 모서리만 다시 맞췄어요.
며칠 뒤 서랍을 열어 보니 휴지는 그대로인데 흙만 없었어요. 말라서 종이 틈으로 빠졌는지, 엄마가 청소하다 버렸는지, 아저씨가 가져갔는지는 몰라요. 내 서랍에는 머리끈과 립밤과 틀린 시험지가 한데 엉켜 있었어요. 거기서 사라진 흙 한 줌을 가지고 누구를 범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어요.
7월 4일 저녁, 아저씨가 닭을 곤 국을 차렸어요. 자기 앞에는 빈 그릇만 놓고 더워서 입맛이 없다고 했어요. 우진이는 국물이 달다며 밥을 한 공기 더 말았고, 엄마는 오래 끓이느라 고생했다며 국물을 남기지 않았어요. 나는 먹지 않으면 내가 아직 의심한다는 걸 들킬 것 같았어요. 몇 숟갈을 억지로 삼키자 단맛 뒤로 혀가 마르는 맛이 남았어요.
우진이가 먼저 식탁에 엎드렸어요. 엄마가 우진이 어깨를 잡다가 옆으로 기울었고, 내가 일어나려 하자 무릎이 식탁 아래에 부딪혔어요. 소리는 들렸는데 아프지는 않았어요. 아저씨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어요. 놀라지도 않았고요. 그저 빈 그릇을 한쪽으로 치우고, 우진이 코앞에 손가락을 대 보고, 내가 떨어뜨린 숟가락을 주웠어요.
그다음에는 짧은 장면만 남아 있어요. 등에 닿던 젖은 천. 안전벨트가 당겨지던 소리. 창밖의 붉은 흙. 물이 차오르기 전에 열려 있던 운전석 문. 아저씨가 우리보다 먼저 차 밖으로 나가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던 모습.
그날 이후 집은 조용해졌어요. 아저씨는 더 이상 수도꼭지를 고치지 않았고, 우진이 게임기에서 먼지를 빼 주지도 않았어요. 엄마 옷은 상자에 넣고 내 책은 묶어 두었어요. 엄마는 마루에 앉아 상자가 하나 늘 때마다 손가락을 접었고, 우진이는 꺼진 게임기를 들고 내 방에 와 있었어요. 나는 둘에게 그날 일을 다시 말하지 않았어요. 이미 아는 얼굴이었거든요.
그러다 아저씨가 아줌마와 따님을 데려왔어요.
아줌마는 이혼한 뒤 아이와 둘이 산다고 했지요. 지금 집은 학교에서 멀고, 계약이 끝나기 전에 옮기면 돈이 든다고요. 나는 아저씨가 엄마에게 했던 질문을 기억해요. 아이 학교는 어디인지, 밤늦게 연락할 친척이 근처에 있는지, 운전은 누가 하는지. 아저씨는 걱정하는 말투로 묻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쪽이 더 무례해 보여요.
따님은 내 방이 마음에 드는지 책상 앞에 오래 서 있었어요. 오른쪽 서랍을 잡아당기다가 열리지 않자 발로 책상 다리를 찼어요. 예전의 우진이도 그랬어요. 내가 들어 올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이는 듣지 못했고, 아저씨가 들어와 손잡이를 살짝 들자 서랍은 바로 열렸어요. 안은 비어 있었어요. 수학 문제집도, 그 사이에 끼워 둔 기사도 없어졌어요.
아저씨는 부엌에서 수박을 꺼냈어요. 칼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나는 7월 4일 저녁의 국자를 떠올렸어요. 따님은 수박을 먹고 가자는 눈으로 아줌마를 봤고, 아줌마는 가방을 다시 내려놓았어요. 아저씨는 저녁도 해 주겠다며 냉장고 문을 열었어요.
아줌마, 오늘 따님과 이 집에서 자지는 마세요. 수박도 저녁도 먹지 말고, 저수지 쪽 길로 차를 몰아 주겠다고 하면 타지 마세요. 내 문제집은 없어졌고 내가 긁어 둔 흙도 없어졌지만, 없어졌다는 게 처음부터 없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틀렸다고 믿고 국을 먹었던 그날에는 흙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모른 채 이 집을 돌아다닌 게 아니에요. 다만 이 말을 먼저 하면 아줌마가 앞의 모든 일을 사춘기 아이의 억지나 심술쯤으로 치워 버릴까 봐 끝까지 미뤘어요.
그날 저수지에서 죽은 사람은 엄마 김미영, 열다섯 살 딸 김은서, 열 살 아들 김우진이에요. 김은서가 나예요. 엄마와 우진이도 지금 이 방에 있고요.
우리 셋은 아줌마가 들어온 순간부터 쉬지 않고 말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