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

[한내FM 라디오 다큐멘터리 〈골목의 값〉 제41회 — ‘한 달 살기’ 방송 대본. 인서트는 사전 녹음이며, 제보자 보호를 위해 인명·지명·상호는 가명으로 처리했다.]

(시그널. 8초 뒤 낮아진다.)

진행자: 한 달 동안 남의 집에 살아 주고 80만 원을 받는 일자리가 있습니다. 보증금과 월세는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전입신고를 할 것. 우편물을 받을 것. 밤에는 불을 켜 둘 것.

진행자: 저희가 처음 저장한 글은 2025년 1월에 올라왔습니다. 며칠 뒤 지워졌고, 3주 뒤에는 동네 이름만 바뀌어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 뒤로 확인한 글은 11건입니다. 연락처는 같았습니다.

진행자: 그중 한 곳에서 한 달을 채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박성재 씨, 가명이고 39세입니다.

녹음 1 — 박성재(가명·39) 씨, 음성 변조: 장사 접고 나면 은행 문보다 은행 앱이 먼저 닫혀요. 한도 조회하면 0원 뜨고, 월세방 보러 가면 보증금부터 묻고. 그때 그 글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대포통장인가 했죠. 그런데 통장도 신분증도 맡기라는 말이 없었어요. 딱 한 달 살고 80만 원.

녹음 1 — 박성재 씨: 사무실은 상가 2층에 있었습니다. 간판은 없고 책상 하나, 의자 셋. ‘단기 거주 관리 계약서’라고 적힌 종이는 코팅한 것처럼 빳빳했어요. 내용은 구인글하고 같았고, 하루라도 조건을 어기면 선불로 받은 80만 원을 전부 돌려준다는 조항만 하나 더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묻지는 않았어요. 제가 물으면 저쪽도 제 신용을 물을 것 같았거든요. 도장을 찍고 돈과 열쇠를 받았습니다.

진행자: 주소는 못골동 동보빌라 302호였습니다.

녹음 2 — 박성재 씨: 문 열자마자 새 장판 냄새가 났어요. 발바닥에 쩍쩍 붙는 장판 있잖아요. 도배도 새로 했고 스위치에는 손때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지방만 낡았어요. 가운데가 숟가락으로 문지른 것처럼 닳아 있었죠.

녹음 2 — 박성재 씨: 짐은 옷 든 가방하고 전기포트가 전부였습니다. 방에 침대가 없어서 바닥에 요를 깔았어요. 장판 네 군데가 동그랗게 눌려 있더라고요. 침대 다리 놓였던 자리처럼. 전에 살던 사람도 침대를 빼고 나갔겠구나 했습니다. 이상하게 그걸 보고 안심했어요. 빈방은 무섭지만, 누가 살다 나간 방은 그냥 싼 방 같으니까.

진행자: 성재 씨는 첫 주에는 302호에서 잤습니다. 둘째 주부터는 밤마다 불을 켜 놓고 근처 피시방으로 갔습니다.

녹음 3 — 박성재 씨: 보일러를 틀면 바닥은 금방 뜨거워지는데 방 한가운데만 미적지근했어요. 고장이라고 문자했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잠자리를 문 쪽으로 옮겼고요. 그래도 새 장판 냄새가 안 빠졌어요. 머리가 아파서 피시방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야간권이 8천 원이었으니 20번 가도 16만 원이에요. 80만 원에서 빼면 남았습니다. 새벽에 들어와 우편함 비우고, 낮에는 방에서 컵라면 먹고, 저녁에 불 켜 놓고 나갔어요.

녹음 3 — 박성재 씨: 계약서에는 잠을 자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주소도 거기였고 짐도 거기 있었어요. 한 달 동안 전기요금도 제가 냈습니다. 그러니까 살았다고 해야죠. 안 그러면 돈을 돌려줘야 하니까.

진행자: 302호 맞은편에는 조명자 씨가 12년째 살고 있습니다. 역시 가명입니다.

녹음 4 — 조명자(가명·58) 씨: 원래는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인사하면 턱만 한 번 드는 양반. 2024년 겨울에 안 보이더니 공사하는 사람들이 왔고, 얼마 뒤부터는 밤에 불만 들어왔습니다. 불은 켜져 있는데 사람은 못 봤어요. 우편함은 비워졌고요.

녹음 4 — 조명자 씨: 성재 씨 사진을 보여 줬을 때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편의점 봉투 들고 새벽에 올라가는 뒷모습을 한두 번 본 것 같기도 해요. 여기는 계단이 하나라 한 달 살면 몇 번은 마주쳐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는 인사한 기억이 없습니다. 불 켜는 사람이 따로 있고 사는 사람이 따로였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죠.

진행자: 성재 씨는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웃은 누가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성재 씨가 보여 준 주민등록초본에는 전입일이 찍혀 있었고, 전기요금 영수증과 한 달 동안 받은 우편물도 남아 있었습니다.

진행자: 저희는 못골동 일대 특수청소 업체에 주소를 물었습니다. 세 번째로 연락한 업체에서 작업 기록을 찾았습니다.

녹음 5 — 특수청소업체 직원 윤길수(가명) 씨: 2024년 12월에 들어간 집이 맞습니다. 혼자 계시던 분이 돌아가셨고 발견이 늦었어요. 기간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유족이 있으니까요.

녹음 5 — 윤길수 씨: 늦게 발견된 집은 닦는 걸로 안 끝납니다. 장판하고 도배를 걷고, 바닥에 밴 부분은 콘크리트 표면을 갈아 냅니다. 302호도 방 가운데를 갈았습니다. 저희가 나갈 때는 냄새가 안 났어요. 그 뒤에 누가 도배하고 장판을 깔았는지는 모릅니다. 저희는 폐기물 내역하고 작업 전후 사진을 의뢰인에게 넘겼습니다.

진행자: 그 의뢰인은 집주인이었습니다. 윤 씨의 작업 기록은 2024년 12월에 끝납니다. 성재 씨가 내민 거주 계약서와 주민등록초본은 2025년 1월에 시작해 한 달 뒤 끝납니다. 현재 임차인이 제공한 계약서는 같은 해 3월, 보증금 5천만 원에 월세 45만 원으로 작성돼 있었습니다.

진행자: 법에 ‘사람이 죽은 집은 다음 세입자에게만 알린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누군가 한 달 살았다고 과거의 사망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사망 이력을 적는 별도 항목은 없고, 분쟁이 생기면 무엇을 알고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진행자: 저희는 구인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임대 관리 대행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녹음 6 — 관리 대행 직원, 음성 변조: 사고물건 같은 말은 일본 방송에서나 쓰는 거고요. 저희는 빈집 관리합니다. 사람 안 살면 배관 얼고 곰팡이 피고 우편함 차잖아요. 단기 임차인 넣어서 관리하는 겁니다. 계약서 쓰고 전입신고도 하는데 가짜가 어디 있어요.

진행자: 사망 사실을 다음 임차인에게 알리느냐고 물었습니다.

녹음 6 — 관리 대행 직원: 저희가 중개하는 게 아닙니다. 물어볼 게 있으면 계약할 때 공인중개사한테 물으셔야죠.

진행자: 직전 임차인이 실제로 그 집에서 잤느냐고도 물었습니다.

녹음 6 — 관리 대행 직원: 거주라는 게 꼭 잠만 말합니까? 주소 두고, 짐 두고, 전기 쓰면 거주죠. 그분들도 성인인데 어디서 자는지 저희가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

진행자: 새 임차인이 직전에 누가 살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녹음 6 — 관리 대행 직원: 있는 그대로 말하죠. 한 달 계약 끝내고 나갔다고. 그 뒤는 중개하는 분한테 물으세요.

진행자: 계약 마지막 날, 관리 대행 직원이 302호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성재 씨의 마지막 녹음입니다.

녹음 7 — 박성재 씨: 짐을 빼다가 낡은 문지방 옆 나무 몰딩이 벌어진 걸 봤어요. 손으로 당기니까 그 틈에서 접힌 사진이 한 장 나왔습니다. 백일 사진 같았어요. 아기를 받친 어른 손이 같이 찍혀 있었는데 손가락 마디가 굵었습니다. 뒤에는 볼펜으로 ‘백일, 1987년 3월’이라고 적혀 있었고요.

녹음 7 — 박성재 씨: 확인하러 온 남자한테 줬습니다. 그 집에서 나왔다고. 남자는 사진을 한 번 보고 관리비 봉투 사이에 끼웠어요. 전기 계량기를 찍고, 방에 모아 둔 한 달치 우편물 개수를 세더니 이제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녹음 7 — 박성재 씨: 계단을 내려가다가 충전기를 두고 온 게 생각났어요. 다시 올라갔는데 문이 덜 닫혀 있었습니다. 남자가 공구 가방에서 동전만 한 둥근 금속 마개를 네 개 꺼내더니 방 네 모서리 안쪽에 놓고 구두 뒤꿈치로 밟았어요. 보일러가 켜진 장판이 동그랗게 꺼졌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첫날 본 자국이 생각났어요. 침대 다리 자국 네 개. 그 방에는 한 달 동안 침대가 없었습니다.

(시그널. 페이드 없이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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