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제일냉장 마당에 들어서면 소리가 먼저 몸에 닿았다. 땅 밑에서 우우 하고 올라오는, 크고 둔한 진동이었다. 압축기 돌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오래 일한 사람들은 창고가 숨 쉬는 소리라고도 불렀다.
동수는 첫 출근 날 그 소리를 들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관리실로 들어가기 전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닦으려다가 면접 보러 온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그만두었는데, 면접은 이미 끝난 셈이었다. 서 소장은 주민등록증보다 먼저 동수의 어깨와 손등을 보고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고, 오늘 밤부터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셋, 주소는 대흥여인숙 2층. 비상 연락처에는 고향집 번호를 쓰지 않고 여인숙 전화를 적었다. 어머니가 야간 냉동창고라는 말을 들으면 내려오라고 할 게 뻔했다.
“봄까지만 할 겁니다.”
동수가 먼저 말했다. 묻지도 않은 말이었다.
“다들 그렇게 와.”
서 소장은 웃지도 않고 서류 한쪽을 손톱으로 눌렀다. “용접 배운다며.”
“기능사 따려고요.”
학원 등록금은 아직 절반도 못 모았다. 동수는 통장 첫 장에 연필로 목표액을 적어 놓고, 돈을 넣을 때마다 남은 액수를 다시 계산했다. 여인숙비를 사흘 미룬 주에도 학원 몫은 빼지 않았다. 제일냉장 야간 수당은 부두의 다른 일보다 셌다. 새벽 2시가 넘으면 간식비도 붙고, 잔업 전표 한 장이면 하루 품이 거의 한 번 더 나왔다.
서 소장이 옆방의 작은 창구를 열었다. 물 빠진 푸른 방한복과 털모자, 벙어리장갑, 장화가 차례로 나왔다. 방한복 상의는 동수가 입고도 옆구리에 주먹이 두 개쯤 남았다.
“너무 큰데요.”
“안에 껴입어야 돼.”
소장은 소매를 한 번 접어 보더니 그대로 두었다. “지급 창구는 6시에 닫힌다. 경리가 열쇠를 가져가니까 야간에는 못 열어. 퇴근할 때 입고 가서 다음 날 그대로 입고 오고. 사물함에 두면 안 돼.”
“고장 나면요?”
“뭐가.”
“지퍼나 장화 같은 거요.”
“조심해서 써.”
소장은 벌써 다른 서류를 보고 있었다.
관리실 책상에는 출하 전표와 야간조 인계 공책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장은 공책을 펴서 동수 앞으로 밀었다. 첫 장에는 소화기 위치, 지게차 충전 단자 위치, 사이렌이 울리면 짐을 놓고 나올 것 등의 항목이 적혀 있었다. 글씨도 잉크도 제각각이었다.
중간쯤에서 동수의 눈이 멈췄다.
안에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말 것.
바로 아래에는 더 진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부르는 소리가 나면 반드시 대답할 것.
“이건 뭡니까?”
서 소장이 공책을 힐끗 봤다.
“야간조 놈들이 심심해서 써 놓은 거야.”
“둘이 반대잖아요.”
“그러니까 낙서지.”
소장은 공책을 가져가 서랍에 넣었다. 동수는 그가 서랍을 잠그는 것까지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첫날부터 별난 데 꽂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류 맨 아래에 적힌 시급이 마음에 들었다.
야간조는 동수를 합쳐 여섯이었다. 최 반장은 허리띠에 납작한 양은 담뱃갑을 차고 다녔고, 지게차 기사 병철은 장갑을 꼭 오른쪽부터 꼈다. 기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이 있어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나머지 둘은 이름보다 진주, 마산으로 불렸다. 사람이 자주 바뀌는 데서는 고향이 이름보다 오래갔다.
일은 명태 짝을 선반에서 내려 팔레트에 맞추는 일이었다. 지하 급냉동에 들어가 90분 일하고, 밖에 나와 30분 몸을 녹였다. 90분이 되면 관리실에서 사이렌을 울렸다. 부웅, 하고 낮게 우는 소리가 나면 들고 있던 것도 내려놓고 나와야 했다.
첫 사이클이 끝났을 때 동수는 계단을 올라오며 손가락이 제대로 굽혀지는지부터 확인했다. 방한 장갑 안에서도 손톱 밑이 쑤셨다. 이중문을 나서자 서 소장이 관리실 유리 앞에 서 있었다. 반장부터 동수까지 차례로 지나갈 때마다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동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렇게 읽었다. 여섯 번째인 자기가 지나가자 소장은 유리에서 물러났다.
“매번 셉니까?”
컵라면 뚜껑을 접던 동수가 묻자 최 반장이 뜨거운 물통을 가리켰다.
“물부터 부어라. 면 딱딱해진다.”
동수가 물을 붓고 다시 쳐다보자 반장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옛날에 한 명 못 나온 적이 있단다.”
“언제요?”
“내 오기 전.”
병철이 건너편에서 코웃음을 쳤다. “반장 오기 전이면 단군 때겠네.”
“니는 가만있어라.”
반장은 동수 쪽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농담을 할 때와 달리 목소리가 낮았다.
“골 사이에서 누가 부르면 돌아보지 마라. 이름을 알아도. 특히 아는 목소리면.”
병철이 젓가락으로 라면 바닥을 긁었다.
“또 시작이네. 대답을 해야지, 사람을 부르는데.”
“니 방식 신입한테 가르치지 마라.”
“내가 대답하고 10년을 멀쩡히 다녔다. 반장은 입 다물고도 살았고. 그러면 둘 다 되는 거지.”
“둘 다 되는 게 어딨노.”
“그라면 둘 다 소용없는 기고.”
병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최 반장은 웃지 않았고, 두 사람이 그 일로 처음 다투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동수는 라면 국물을 마저 마셨다. 병철이 들었다는 목소리가 누구 것이었는지, 반장은 왜 아는 목소리를 특히 조심하라고 했는지 묻고 싶었으나, 물어보면 정말 믿는 사람 쪽이 될 것 같았다.
사흘째부터 동수는 급냉동의 길을 익혔다. 입구에서 세 번째 골은 바닥이 약간 솟아 지게차가 흔들렸고, 맨 끝 선반 아래에는 빈 짝 두 개가 뒤집혀 있었다. 왼쪽 장화는 발뒤꿈치가 먼저 닳아 양말이 자꾸 말려 내려갔다. 동수는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서 장화를 벗고 양말을 올렸다. 병철에게 말하면 새 장화는 못 받아도 놀림감은 될 테니 혼자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통장에 넣을 돈을 머릿속으로 나눌 여유가 생겼다. 학원비, 여인숙비, 고향에 보낼 돈. 90분은 길었지만 숫자를 굴리면 견딜 만했다. 압축기 소리도 더는 귀에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가 온도에 맞춰 잠깐 멎을 때면 갑자기 생긴 고요가 불편했다. 다들 그런지, 압축기가 쉬면 병철은 지게차 시동을 걸었고 기택은 별 필요도 없이 짝을 끌어 소리를 냈다.
첫눈이 온 날, 사이렌이 울리고 야간조가 계단을 올라왔다. 맨 뒤에 선 동수 앞에는 푸른 등이 다섯, 자기까지 여섯이었다. 그런데 이중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와 털모자를 벗을 때는 앞사람들이 여섯으로 보였다.
똑같은 푸른 방한복 여섯 벌이 관리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수는 멈춰 서서 다시 셌다. 반장, 병철, 기택, 진주, 마산. 다섯이었다. 자기를 합치면 여섯. 방금 어느 등이 하나 더 있었는지 찾아보려 했으나, 사람들이 돌아서자 옷은 같아도 얼굴은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관리실 유리 안에서 서 소장이 여전히 마당을 보고 있었다. 그가 손바닥을 유리에 댔다가 천천히 내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하노?”
병철이 휴게실 문을 잡고 있었다.
“아닙니다.”
동수는 들어가며 장화 밑창을 문턱에 두 번 긁었다. 눈이 녹어 붙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랬다.
그날 이후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세게 되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계단 앞에서 한 번, 마당에서 한 번. 늘 여섯이었다. 가끔 일곱까지 갔다가 다시 보면 여섯이었고, 그럴 때마다 누가 두 번 움직였겠거니 했다. 숫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비슷했다. 병철은 지게차 백미러 각도를 계단 쪽으로 맞춰 놓았고, 일곱이 보이는 밤이면 휴게 시간에도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최 반장은 아예 출입문을 등지고 담배를 피웠다. 서 소장만 매번 유리 앞에 섰다. 야간조가 전부 나온 뒤에도 한동안 입술을 움직이는 밤이 있었다.
동수가 그걸 물은 날, 소장은 급여 봉투를 세고 있었다.
“옛날에 못 나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소장의 엄지에 침이 묻은 채 멈췄다.
“반장이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그냥 궁금해서요.”
“외부인이 들어와 있었어. 문 잠근 뒤에 발견됐지.”
“한 명이요?”
소장은 봉투를 다시 세기 시작했다. “사고 보고서에는 한 명이야.”
동수는 더 묻지 않았다. 소장이 내민 급여 봉투의 금액은 맞았고, 그날은 그걸로 됐다.
설 물량이 붙으면서 쉬는 날이 없어졌다. 컨테이너가 밤마다 두 대씩 들어왔고, 골 안쪽에 있던 오래된 재고까지 빼냈다. 맨 끝 선반의 짝을 들어내자 벽에 성에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문과 가장 먼 자리였다.
“배관이 새나.”
병철이 장갑 낀 손으로 성에를 문지르자 흰 가루가 소매에 묻었다. 그 아래 벽에는 검은 연필 자국이 몇 줄 남아 있었다. 선반 높이를 표시한 것 같기도 했고, 누가 무료해서 그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가장 높은 선 옆에는 ‘순’인지 ‘쉰’인지 모를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게 뭐지?” 동수가 손전등을 가까이 댔다.
최 반장이 성에 가루를 발로 밀어 덮었다.
“옛날 창고 벽이겠지. 짐 빼자.”
“옛날 재고 표시겠지.” 병철은 그렇게 말하며 손전등을 껐다.
그날 아침, 동수는 여인숙으로 돌아가다가 부두 입구의 국밥집에 들렀다. 야간조가 자주 가는 곳이었다. 주인 여자는 밥을 반 공기 더 퍼 주며 요즘도 제일냉장 지하를 쓰느냐고 물었다.
“예. 왜요?”
“아직도 춥겠네.”
“냉동창고가 춥지, 따뜻합니까.”
동수가 웃자 여자는 빈 반찬통을 겹쳐 들고 주방으로 가려다 멈췄다.
“거기 담 생기기 전에는 뒤에 판잣집이 많았어. 부두 일 나오는 사람들이 애 데리고 살고 그랬지.”
“창고 안에도 살았습니까?”
“누가 그래?”
“소장님이 외부인이 들어왔다가 사고 났다고 해서요.”
여자는 반찬통 가장자리를 엄지로 훑었다. “서 씨가 한 사람이라더나?”
“소장님이 그때도 있었습니까?”
“창고 사무 보던 총각이었지.”
주방에서 국이 넘치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갔다. 잠시 뒤 돌아왔을 때는 기택이 들어와 딸 자랑을 시작했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동수는 그날 낮잠을 설쳤다. 옆방 투숙객이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놓은 탓이었다. 화면에서는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고, 동수는 베개를 귀에 눌렀다. 저녁에 일어나 보니 여인숙 주인이 문틈으로 전기료 독촉 쪽지를 밀어 넣어 놓았다. 그는 쪽지를 접어 통장 사이에 끼웠다. 학원비에서 빼면 바로 낼 수 있었지만, 다음 주 야간 수당이 들어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 주부터 압축기가 멎는 몇 분 동안 노랫소리가 들렸다. 낮고 느린 가락이었다. 골을 두 개쯤 건너 여자가 흥얼거리는 것 같다가, 고개를 돌리면 선반 뒤로 물러났다.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동수는 처음에는 기택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기택은 딸을 재울 때 부르는 노래를 쉬는 시간마다 흥얼거렸다. 그런데 기택이 조퇴한 밤에도 같은 가락이 들렸다.
병철은 압축기가 멎자마자 지게차 경적을 짧게 울렸다. 최 반장은 짝을 내리다 말고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물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였다. 동수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압축기 수리 기사가 다녀갔다. 서 소장은 베어링을 갈았으니 이제 괜찮다고 했다. 노랫소리를 말한 사람이 없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며칠은 아무 일도 없었다. 물량은 여전히 많았고 기계는 잘 돌았다. 동수는 첫 월급의 일부를 고향으로 보냈다. 어머니에게는 주간 포장 일이라고 편지에 썼다. 기능사 시험 접수일을 달력에 동그라미 쳤고, 병철에게 버리는 철판을 얻으면 쉬는 날 용접 연습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병철은 학원보다 자기가 낫다며 큰소리를 쳤다.
평범한 밤이 이어지자 최 반장의 경고도, 벽의 연필 자국도 조금씩 일터의 일부가 되었다. 급냉동 세 번째 골의 솟은 바닥처럼 피해서 다니면 되는 것들이었다.
섣달 초입, 다섯 번째 사이클을 마치고 나온 밤이었다. 야간조 여섯이 마당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동수는 피우지 않았지만 불을 쬐려고 그들 곁에 있었다. 기택은 딸의 백일상에 올릴 떡값을 걱정했고, 마산은 설 전에 집에 갈 표가 없다고 했다. 서로 듣지 않으면서도 대화는 이어졌다.
동수는 관리실 쪽을 보다가 이중문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푸른 방한복이었다. 모자를 깊이 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키가 문고리보다 조금 높았다. 어른 옷을 아이가 입은 것처럼 소매가 여러 번 접혀 있었다. 소맷부리 하나가 천천히 들렸다. 손은 나오지 않았다.
동수 옆에서 라이터 불이 꺼졌다. 최 반장이 빈 라이터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딸깍, 딸깍.
“반장님도 봤습니까?”
“뭘.”
반장은 문 쪽을 보지 않았다.
동수가 다시 보았을 때 거기에는 접어 둔 방수포 한 장만 있었다. 방수포는 회색이었고 사람 키만큼도 되지 않았다.
휴게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서 소장이 밖으로 나왔다. 여섯을 한 번 훑어본 뒤 이중문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병철이 시계를 보았다. “한 사이클 남았는데요.”
“배전반 상태가 안 좋아.”
“기사는 괜찮다 안 했습니까.”
“사람이 하라면 해.”
소장은 화를 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작았다. 그날 처음으로 야간조는 물량을 남겨 두고 퇴근했다.
다음 날 출근하자 남은 짝 때문에 주간조와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다. 소장은 전날 자기가 일을 멈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야간조가 작업 속도를 못 맞춘 것으로 정리됐다. 최 반장도, 병철도 입을 다물었다. 동수는 억울했지만 일당 인부가 소장의 말을 바로잡아 봐야 다음 달 배정표에서 이름만 빠질 수 있었다.
다음 급여 봉투를 받을 때 동수는 전날 일까지 따져 말해 볼 생각이었지만, 서 소장이 봉투를 건네며 “요즘 작업 속도가 떨어졌다”고 하자 고개만 숙였다. 접수일까지 남은 날과 통장의 액수가 딱 맞지 않았고, 다음 달 배정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파가 온 것은 섣달 보름이었다. 최 반장이 두 번째 사이클에서 허리를 삐끗해 조퇴했고, 다섯 사람이 남은 물량을 나눠 들었다. 새벽 1시가 넘자 짝 하나가 팔레트 모서리에 걸렸다. 동수가 몸을 틀어 빼는 순간 튀어나온 철사가 방한복 지퍼를 물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지퍼 이빨이 절반쯤 떨어져 나갔다. 동수는 끈으로 허리를 묶고 남은 작업을 버텼다. 바깥으로 나오자 앞자락이 벌어져 속옷까지 축축했다.
“여벌 하나 주이소.” 병철이 관리실 창문을 두드렸다.
서 소장은 잠긴 지급 창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경리 오면 바꿔.”
“오늘 또 들어가야 되는데요.”
“끝났잖아.”
“내일 말입니다.”
“내일 생각은 내일 해.”
동수는 찢어진 방한복을 소장 의자 등에 걸어 두었다. 내일 잊지 말고 바꿔 달라는 뜻이었다. 소장은 걸리적거린다며 한쪽으로 밀었지만, 창구 앞까지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퇴근할 때 동수는 얇은 솜잠바만 입었다. 병철이 자기 외투를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체격 차이가 너무 났고, 여인숙까지는 뛰면 10분이었다. 동수는 괜찮다며 나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압축기 소리가 발바닥을 울렸다.
여인숙에 돌아와 양말을 난로 옆에 널고 잠든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 여자가 복도에서 소리쳤다.
“동수 씨, 냉장 회사 전화!”
공용 전화기는 1층 계산대 옆에 있었다. 동수는 맨발에 장화만 꿰고 내려갔다. 수화기 너머로 서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냉동 온도 경보가 떴다. 압축기가 섰나 봐.”
벽시계는 3시 40분을 가리켰다.
“기사 부르셔야죠.”
“아침 7시 전에 못 온대. 내가 지금 시외라서 그러니 네가 배전반만 한번 봐.”
“저 방한복도 없습니다.”
“안에 들어갈 필요 없어. 차단기 내려갔나 보고 올리기만 하면 돼.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 놨어.”
동수는 수화기를 든 채 계산대 아래 연탄난로를 보았다. 난로 위 양은 주전자에서 김이 새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졸린 눈으로 숙박 장부를 정리하면서도 통화를 듣고 있었다.
“내일 기사 오면 처리하면 안 됩니까.”
“물건 녹으면 네 한 달 품으로도 안 돼.” 소장은 말해 놓고 잠깐 조용해졌다. “잔업 한 회로 끊어 줄게. 10분이면 된다.”
잔업 한 회면 밀린 전기료를 내고도 접수비가 남았다. 동수는 수화기 줄을 검지에 한 바퀴 감았다가 풀었다.
“배전반만입니다.”
“그래. 안에는 들어가지 마.”
주인 여자가 수화기를 받아 끊으며 혀를 찼다. “사람을 무슨 부속처럼 부리네.”
“10분이면 된답니다.”
동수는 방으로 올라가 양말을 다시 신었다. 속까지 마르지 않아 발바닥이 축축했다. 통장 사이에 끼워 둔 전기료 쪽지가 보였지만 꺼내 보지는 않았다.
창고 마당에 들어서자 소리가 없었다.
동수는 걸음을 멈췄다. 평소 기계음에 묻혀 있던 부두 소리가 멀리서 하나씩 들렸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 빈 병 구르는 소리. 자기 장화가 언 땅을 밟는 소리도 지나치게 컸다.
관리실 우편함에는 열쇠와 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소장의 글씨였다.
차단기 올린 뒤 온도계 확인. 안 내려가면 급냉동 안쪽 문 걸쇠 확인할 것.
동수는 쪽지를 두 번 읽었다. 전화로 한 말과 달랐다. 그는 관리실 전화기를 들고 소장이 알려 준 번호로 걸었지만 긴 신호만 갔다. 두 번째에도 받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쪽지를 우편함에 넣고 열쇠까지 두면, 시킨 대로 배전반을 보지 않은 사람이 된다. 안쪽 문까지 확인하면 10분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온도 경보가 사실이라면 아침에 물건이 녹을 것이고, 소장은 동수가 차단기도 보지 않고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잔업 전표도, 다음 달 근무도 소장 손에 있었다.
동수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배전반의 주 차단기는 중간에서 걸려 있었다. 손전등을 겨드랑이에 끼고 레버를 내렸다가 힘주어 올리자 천장의 형광등이 두 번 깜박였다. 압축기가 웅 하고 몸을 떨었으나 돌아가지는 않았다. 급냉동 온도계는 영하 18도였다. 평소보다 높았지만 생선이 당장 녹을 온도는 아니었다.
안쪽 문만 보고 나오자.
동수는 입구에 서서 어두운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관리실 공책의 두 문장이 떠올랐다. 대답하지 말 것. 반드시 대답할 것. 어느 쪽을 고르든 다른 쪽을 어기게 되는 규칙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관리실 쪽을 한 번 돌아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 명 들어갑니다.”
말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희미하게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지하 공기는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추운 것은 같았지만 압축기 바람이 없어 피부를 베지 않았다. 동수는 솜잠바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골 사이로 들어갔다. 선반 위 명태 짝은 어둠 속에서 벽처럼 쌓여 있었다.
맨 끝 골로 갈수록 성에가 두꺼워졌다. 바닥에는 녹았다 다시 언 물이 얇게 깔려 장화가 달라붙었다. 안쪽 문은 닫혀 있었다. 걸쇠도 걸려 있었다.
동수는 손전등 불빛을 문틈에 비추었다. 빛이 흔들린 것은 손이 떨려서였다. 문에는 문제가 없었다. 돌아가서 쪽지에 그렇게 적으면 됐다.
저기요.
여자 목소리가 뒤에서 났다.
동수는 몸을 굳혔다. 골 둘쯤 건너에서 사람을 부르는 만큼의 크기였다. 압축기가 없으니 목소리는 선반에 부딪히지도 않고 곧장 귀에 들어왔다.
저기요, 잠깐만요.
반장의 말대로 돌아보지 않으려 하자 병철의 말이 따라왔다. 대답을 해야지, 사람을 부르는데. 동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장화 밑에서 얼음이 작게 갈라졌다.
“지금 나갑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하지 않은 채 말했다. 대답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말이었다.
잠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여자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물었다.
“몇 명이에요?”
동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은 쉬웠지만 무엇을 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반 반대편에서 천 스치는 소리가 났다. 푸른 옷자락이 골 끝을 지나갔다. 문고리보다 낮은 키, 여러 번 접힌 소매였다.
동수는 계단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압축기가 갑자기 돌아갔다. 우우 하는 진동과 함께 냉기가 천장 덕트에서 쏟아졌다. 형광등이 꺼졌다 켜졌고, 뒤에서 이중문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여자 목소리는 기계음에 묻혔다. 대신 손전등 불빛 끝에서 푸른 소매가 다시 보였다. 맨 끝 선반 아래, 사람이 기어서나 들어갈 틈이었다. 소매 끝은 바닥에 닿아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장화 한 짝이 비쳤다.
“거기 있으면 안 돼.”
동수가 몸을 숙였다. “나와. 같이 나가자.”
푸른 방한복이 조금 움직였다. 안쪽으로 자리를 비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동수는 더위를 느꼈다. 솜잠바 안에 난로를 넣은 듯 등이 뜨거워졌다. 목에서 땀이 흘렀고 숨이 답답했다. 그는 지퍼를 절반쯤 내렸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가락이 마음대로 굽혀지지 않았지만, 몸은 시원한 바닥에 잠깐만 엎드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선반 아래에서 노랫소리가 났다. 기택이 딸에게 불러 주던 것과는 다른 가락이었다. 그런데도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가사 대신 일정한 흔들림만 남은 노래였다.
동수는 무릎을 꿇었다. 손전등을 틈 안으로 밀자 푸른 방한복의 등판이 드러났다. 낡아서 물이 빠진 색, 어깨에 검은 얼룩 하나. 퇴근하며 자기가 소장 의자에 걸어 두었던 방한복과 같았다. 찢어진 지퍼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났어, 그거.”
동수는 접힌 소맷부리를 잡았다. 잡은 자리가 납작하게 꺾였다. 안에는 손이 없었다. 그가 손을 놓는 순간 손전등이 한 번 깜박였고, 옷 아래에서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움직였다.
기계 소리 사이로 여자가 다시 물었다.
몇 명이에요.
동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6시 10분, 서 소장은 최 반장과 병철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차단기가 다시 떨어진 것 같다고만 했고, 동수가 먼저 갔다고는 병철이 캐묻고 나서야 말했다. 둘이 창고에 도착했을 때는 주간조 세 사람이 관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압축기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급냉동 온도도 영하 25도까지 내려가 있었다. 관리실 문은 열려 있었으며, 의자 등에는 동수가 벗어 놓은 찢어진 방한복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배전반 앞에서 젖은 장화 자국을 찾은 다섯 사람은 지하로 내려갔다. 최 반장은 계단 앞에서 한 명씩 세웠고, 맨 끝 골 선반 아래로 손전등을 비춘 병철이 짧게 욕을 했다.
동수는 옆으로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솜잠바는 벗어서 자기 앞쪽에 덮어 놓았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의 성에가 눌려, 작은 몸 하나가 누웠다 일어난 만큼만 오목했다.
병철은 동수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최 반장은 자기 방한복을 벗어 동수 위에 덮고, 걸리는 지퍼를 같은 자리에서 몇 번이나 잡아당겼다.
서 소장은 경찰보다 먼저 도착했다. 관리실 우편함의 열쇠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뒤, 책상 위에 남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최 반장이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 소장은 사고 보고서에 퇴근한 일용직 근로자가 개인적인 이유로 사업장에 무단 재입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보고서를 덮은 뒤에는 설비 경보 조치 기록부를 폈다. 마지막에는 경보 발생 이후 출입 인원을 적는 칸이 있었다.
서 소장은 그 칸에 0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