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정수는 예의와 호의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쉰여섯 해를 살면서 그 차이를 모를 수는 없었고, 모르는 척하는 사람과 정말 모르는 사람도 구분했다. 말보다 반복되는 행동을 믿는 것이 정수의 규칙이었다.

하은은 모르는 척하는 쪽이었다.

처음 마주친 날, 하은은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 주었다. 교복 가슴에는 고등학교 이름만 적혀 있었고, 이름은 며칠 뒤 우편함에서 알았다. 803호 아래 꽂힌 고3 대상 학원 봉투에 `이하은 학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은은 열아홉 살, 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다. 정수는 그 사실에서 안도했다.

하은은 그 뒤로도 마주치면 고개를 숙였고, 비가 온 날에는 우산을 옆으로 기울여 정수의 어깨가 젖지 않게 했다. 처음에는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예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같은 동 주민이 수십 명인데, 하은은 정수와 마주칠 때만 걸음이 빨라졌다. 의식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정수는 확인하기 시작했다.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하은이 10시 20분쯤 돌아왔고 화요일에는 11시가 넘었다. 금요일에는 편의점에서 복숭아 음료를 샀다. 한 번은 음료를 계산하고 나오던 하은이 정수를 보자 다른 길로 갔다. 부끄러운 사람은 시선을 피하지만 거절하는 사람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정수는 그렇게 분류했다.

정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골목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과 캔커피를 샀다. 야간 직원은 몸집이 크고 목이 짧은 청년으로, 정수가 문을 열기도 전에 담배를 계산대에 꺼내 놓았다.

“오늘은 커피 안 드세요?”

청년이 물었으나 정수는 카드만 내밀었다. 전날 속이 쓰려 커피를 사지 않았는데 그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편의점 직원은 원래 손님이 뭘 사는지 외우는 법이어서, 정수는 청년의 이름표를 본 적이 있었지만 기억하지 않았다.

한 번은 묶음 할인 때문에 캔커피가 하나 남았다. 들고 가기 귀찮았던 정수는 계산대 위로 밀며 먹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다. 청년은 두 손으로 캔을 받았고, 정수는 그날 600원을 아꼈다.

하은의 집 앞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고, 공동 현관이 열리면 우편함을 확인했으며 분리수거 날에는 묶이지 않은 봉투만 살폈다. 영수증에는 학원 근처 카페와 문구점 이름이 남았다. 버린 머리끈, 다 쓴 립밤, 깨진 휴대전화 케이스는 씻어서 서랍에 넣었다. 훔친 것은 없었다. 버린 물건은 주인이 없는 물건이다.

어느 밤에는 803호 문이 열리고 하은의 어머니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나왔다. 정수는 계단 쪽으로 물러났고, 어머니는 정수를 보고 잠깐 멈췄다.

“여기 사세요?”

“위층이에요.”

정수의 집은 502호였지만 질문을 더 받기 싫어서 한 말이었다. 해칠 생각이 없으니 큰 거짓말도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 하은은 정수를 보면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중인 척했고, 한 번은 아버지가 공동 현관까지 마중 나왔다. 정수는 오히려 확신했다. 가족에게 말할 만큼 자신을 의식하면서 정작 본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겁을 사랑과 반대되는 감정으로 보는 건 단순한 생각이었다. 사람은 좋아할수록 겁을 먹기도 한다.

목요일 밤, 하은이 버린 종이 사이에서 이삿짐 업체 견적서가 나왔고 주소의 동과 호수, 이사 예정일이 적혀 있었다. 남은 날은 아흐레였다.

정수는 서랍 속 물건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머리끈 세 개와 립밤 두 개뿐이라 한 사람을 오래 지켜본 것치고 적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기다리는 일이 비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은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몰랐다. 만나서 말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만 함께 있으면 됐다. 휴대전화를 보지 않고 가족의 말도 듣지 않은 채 정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오해는 사라질 터였다.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울면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싫다고 해도 그 말의 뜻부터 물을 생각이었다.

그는 하은을 데려가기로 했다. 준비하면서도 범죄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범죄는 상대를 해치려는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었고 정수는 설득하려는 것뿐이었다.

실행하기로 한 밤, 하은은 학원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평소보다 7분 늦게 골목으로 들어왔다. 정수는 가방을 든 채 주차된 승합차 뒤에서 기다렸다. 하은이 가까워졌을 때 누군가 뒤에서 정수의 이름을 불렀다.

오래 불러 본 사람처럼 성을 뺀, 정확한 발음이었다.

돌아보자 편의점 청년이 서 있었다. 유니폼이 아니어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청년은 웃지 않았다. 오른손에는 주사기가 있었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통증이 오자 정수는 팔을 쳐 내려고 몸을 틀었다. 그 뒤의 기억은 토막나 있었다. 승합차 아래로 하은의 운동화가 골목 안쪽을 향해 멀어지던 장면만 남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문 없는 방이었다.

손목과 팔꿈치는 의자 팔걸이에, 발목은 의자 다리에 묶여 있었고 매듭은 보이지 않았다. 손목을 비틀자 끈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방은 추웠으며 오른쪽 목이 부어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종이가 여럿 붙어 있었다.

`월·수 23:12 귀가.`

`목요일 내과. 약 봉투는 편의점 휴지통.`

`담배 하루 1갑. 비 오면 2갑.`

글씨 아래 날짜를 보니 8개월 전부터 시작된 기록이었다. 선반에는 정수가 버린 영수증과 담배꽁초, 셔츠 단추 하나, 반으로 찢은 가족사진이 투명 봉투에 나뉘어 있었다. 사진은 이혼할 때 버린 것이었고, 전처가 나온 반쪽은 없고 정수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청년은 편의점 조끼를 입고 벽 옆에 서 있었다. 이름표가 이제야 읽혔다. 김민석.

“아프세요?”

민석이 물었다.

“이거 풀어.”

“금방 풀면 또 가시잖아요.”

“너 미쳤어?”

민석은 대답하지 않고 선반에서 정수가 늘 사던 캔커피를 꺼냈다. 빨대를 꽂아 입가로 가져오자 정수는 고개를 돌렸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네가 나한테 왜 이래.”

“좋아해서요.”

말이 너무 짧아서 정수는 잠시 뜻을 놓쳤다. 민석은 정수가 건넨 캔커피를 아직 기억한다고 했다. 다른 손님에게서는 그런 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묶음 할인이었어. 남아서 준 거야.”

“저한테 줬잖아요.”

“난 남자 안 좋아해.”

“그 학생도 아저씨 안 좋아해요.”

정수는 등을 등받이에서 뗐다. 끈이 손목뼈를 눌렀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

“어떻게요?”

“나는 걔한테 이런 짓 안 했어.”

민석은 벽의 기록을 올려다봤다. 하은의 일정은 없고 정수의 일정뿐이었다.

“하려고 했잖아요.”

정수는 입을 다물었다. 민석은 정수를 골목에서 봤고 그전에도 여러 번 보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편의점 밖까지 따라갈 생각이 없었지만, 정수가 하은의 뒤를 밟는 것을 보면서 남의 생활을 몰래 캐내는 습관도 배웠다고 했다.

“그게 사랑하는 방법인 줄 알았어요. 아저씨는 맨날 하니까.”

“나는 걔를 다치게 안 해.”

“저도 아저씨 안 다치게 해요.”

“걔는 나한테 웃었어.”

“아저씨도 계산할 때 저 봤어요.”

“그건 계산하니까 본 거지.”

“그 학생도 엘리베이터 문 잡으니까 아저씨 본 거고요.”

대답은 질문보다 빨리 돌아왔다. 정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

민석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해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 무서워서 그러는 거죠.”

정수가 하은을 두고 여러 번 내린 판정이었다.

민석이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신고하셔도 돼요.”

민석이 화면을 넘기자 정수가 803호 문 앞에 서 있는 사진, 쓰레기봉지를 들여다보는 영상, 그날 밤 승합차 뒤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차례로 나왔다. 마지막 사진에는 정수가 들고 나온 가방이 열려 있었고 안의 물건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각각의 용도는 알 수 없어도 한꺼번에 놓고 보면 변명하기 어려웠다.

“경찰한테 다 드릴게요. 아저씨가 왜 거기 있었는지도요.”

민석은 `112`를 입력하고 초록색 통화 버튼이 뜬 화면을 의자 오른쪽 팔걸이에 올렸다. 정수의 엄지가 닿을 만큼 가까웠다.

“누르세요. 저도 잡혀가겠죠.”

정수는 엄지를 폈고 버튼까지 손가락 한 마디가 남았다.

통화가 연결되면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경찰이 위치를 찾아내면 민석은 체포되고 정수는 풀려날 것이다. 그다음에는 하은과 부모도 정수가 해 온 일을 알게 될 것이다. 803호 우편함을 열던 손, 봉투를 뒤지던 얼굴, 승합차 뒤에 숨은 모습까지. 전처와 회사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모든 사람이 정수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엄지가 버튼을 향한 채 떨렸다.

“이 영상부터 지워.”

민석은 정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신고 안 하게요?”

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엄지를 접어 손바닥 안으로 감췄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민석은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난 네가 싫어. 좋아한 적도 없어.”

민석의 입꼬리는 잠깐 내려갔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이 필요한 거 알아요.”

민석은 손목과 팔꿈치, 발목의 끈을 차례로 한 번씩 당겼다. 어느 것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확인을 마친 민석이 양손으로 정수의 어깨를 잡았다. 정수는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의자 등받이가 막았다.

민석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왜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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