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보관

방앗간차가 처음 들어온 날은 시월 초이틀이었다.

흰 탑차 옆구리에 파란 동그라미가 붙어 있었고, 그 안에 〈맑은기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글씨는 가까이 가야 읽혔다.

이동형 기억 관리 센터.

면사무소 직원이 경로당을 돌며 설명했다고 했다. 병원까지 나가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시범 사업이고, 군마다 한 대씩 배정될 예정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사흘도 지나지 않아 차를 방앗간차라고 불렀다.

낮에 머리에 테를 쓰고 지울 기억을 고르면, 밤에 차 뒤쪽에서 기계가 돌았다. 쿵, 쿵, 쿵. 오래된 정미소 발동기와 비슷한 소리였다. 공터에서 우리 집까지는 삼백 미터가 넘었지만 창문을 닫아도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안다. 재작년까지 마을 정미소가 내 것이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차에 올랐다. 웃말 창수 어른은 물에 빠진 큰아들을 건져 올리던 날을 지웠고, 점방 노인은 젊어서 겪은 수해를 지웠다고 했다. 무엇을 없앴는지는 대개 본인이 아니라 가족들이 말했다. 시술을 받은 사람은 잘 웃거나, 전보다 말수가 줄었다.

한 건에 87만 원이었다.

아내가 다녀온 것은 시월 열나흗날이다.

내가 보냈다. 가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안내문을 밥상 위에 놓고, 밥을 먹을 때마다 그 종이를 반찬 접시 옆으로 조금씩 밀었다. 아내는 사흘째 되는 날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무엇을 지울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3년 전 섣달, 정미소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 무렵의 어느 밤부터 안방 문고리가 잘 잠기지 않았다. 아내의 왼손 새끼손가락도 그때부터 끝까지 펴지지 않았다.

문고리는 이듬해 봄 철물점에서 새것을 사다 갈았다.

시술비는 내가 냈다. 카드가 되지 않아 현금으로 냈다. 창구의 젊은 직원은 지폐를 세다가 한 장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내가 5만 원을 더 냈던 모양이었다.

그 직원이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야간 분산 보관 동의서.

“지운 기억도 바로 폐기하지는 못해요. 법정 보관 기간이 있거든요.”

본사에 맡기면 보관료가 붙고, 분산 보관에 동의하면 29만 원을 깎아 준다고 했다. 기억을 잘게 나눈 뒤 잠금 처리를 해서, 동의자들이 자는 동안 나눠 보관한다는 설명이었다.

“꿈으로도 안 나옵니다. 잠가 놓으니까요.”

직원은 다음 사람을 보며 말했다. 뒤에는 아내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번호표를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나는 감면 쪽에 서명했다.

그날 밤 2시 40분에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꺼풀만 떴다. 손가락도,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 위에 올라앉은 것은 없는데 숨이 짧게 끊겼다.

방앗간차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공터가 아니라 머리맡에서 나는 것 같았다.

가위눌림은 전에도 겪었다. 대개 천장을 보며 버티다 보면 풀렸다. 그날 밤 천장은 우리 집 것이 아니었다. 지금 안방 천장은 꽃무늬 합판인데, 눈앞에는 짙은 나뭇결이 있었다. 발치에는 오래된 자개장이 놓여 있었다.

자개장은 3년 전 부도 때 팔았다.

벽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지만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읽으려고 눈을 굴리다가 몸이 풀렸다.

머리맡 시계가 2시 51분을 가리켰다.

나는 물병 옆에 두던 수첩에 적었다.

10월 14일. 2시 40분—2시 51분.

다음 날도 같은 시각에 눌렸다.

그다음 날에는 달력 아래 못 자국이 보였다. 그 뒤에는 자개장 위에 놓인 흰 약봉지가 보였다. 우리 집에 있던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이었다.

열흘쯤 지나자 방문 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문짝과 문설주 사이로 눈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불빛이 잘못 겹친 줄 알았다. 다음 밤에는 흰자위가 보였다. 핏줄이 선 눈이었다. 그것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나는 그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늘 11분이었다.

아침이면 아내는 전보다 일찍 일어났다. 라디오를 켜 놓고 무를 썰거나, 마당에 쌓인 빈 화분을 정리했다. 칼을 잡을 때 굽은 새끼손가락이 도마에 먼저 닿았다. 예전에는 내가 그 손을 보고 있으면 아내가 곧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차에 다녀온 뒤에는 숨기지 않았다.

“요새 잠을 설쳐요?”

아내가 한 번 물었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나는 국에 밥을 말았다. 아내는 한참 내 얼굴을 보다가 라디오 소리를 조금 키웠다.

동짓달 초사흘 밤에 달력의 연도가 보였다.

3년 전이었다.

나뭇결 천장과 자개장도 그때 우리 안방에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아내가 자던 쪽에 누워 있었다. 방문 틈의 눈은 전보다 가까웠다.

다음 날 본사에 전화했다.

상담원은 내 이름과 동의서 번호부터 확인했다. 나는 밤마다 다른 방이 보인다고 말했다. 누구 기억인지도 모르는 것을 머리에 넣어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같은 주소의 동의자끼리 우선 배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주소요?”

“보통은 잠금이 풀리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환경이 오래 겹친 가족 사이에서는 드물게 내용이 보인다는 민원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뒤 상담원은 약관 몇 조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중간에 끊었다.

동의를 철회하려면 할인받은 돈은 돌려주고 수수료도 내야 했다. 40만 원이 조금 넘었다. 통장에는 17만 원이 있었다.

그날 밤 문틈의 눈을 더 오래 봤다.

눈썹 끝에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왼쪽이었다.

아침에 세수를 하다 거울을 봤다. 왼쪽 눈썹 끝의 사마귀는 젖은 수건으로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그날 밥상에서 아내는 멸치 대가리를 떼고 있었다. 내 쪽에는 몸통만 모아 두었다. 예전부터 내가 대가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국 식어요.”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3년 전 그날, 나는 문을 열라고 두드렸다. 손잡이를 잡아 비틀다가 한 발 물러섰고, 틈에 눈을 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술 냄새와 손바닥의 금속 감촉뿐이었다.

나는 그 아침 이후 수첩을 서랍에 넣었다. 시간을 적지 않아도 2시 40분이면 알았다. 몸이 굳고, 나뭇결 천장이 나타나고, 문틈에 내 눈이 왔다.

아침마다 아내는 조금씩 편해 보였다. 마당에서 이웃과 오래 이야기하기도 했고, 내가 들어오면 밥을 더 퍼 주기도 했다.

나는 그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지운 기억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내 눈이 문틈에서 아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을, 지금의 내가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은 아내가 자다가 내 팔을 건드렸다. 몸이 굳어 대답하지 못했다. 아내는 한동안 내 얼굴 가까이 손을 대고 숨을 확인했다.

다음 날부터 아내는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잤다. 벽에 붙어 자느라 아침이면 어깨가 결린다고 했다.

방앗간차가 다시 온 것은 섣달 초이레였다.

아침부터 공터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 나는 사료 포대를 싣고 돌아오다가 그 줄에서 아내를 봤다. 회색 목도리를 하고 혼자 서 있었다.

차를 세우지는 않았다.

저녁에 아내는 콩나물국을 끓였다. 전보다 싱거웠다. 내가 소금통을 들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 요새 밤에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소금통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잠꼬대를 해?”

아내는 국그릇을 옮겼다.

“아니면 됐어요.”

아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은 차에 처음 다녀온 뒤보다 편안해 보였다. 나는 무엇을 지웠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내도 내가 낮에 공터를 지나갔는지 묻지 않았다.

그날 밤 2시 40분에 다시 눌렸다.

천장이 달랐다.

꽃무늬 합판이었다. 지금 우리 안방 천장이었다. 벽의 달력은 동짓달 스무사흘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아내가 눕는 쪽에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옆에는 내 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눈은 떠져 있었다.

그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아주 작았다.

문 열어.

아내의 몸이 숨을 멈췄다.

옆의 내가 다시 말했다.

문 열어 봐.

오른손이 이불 위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손가락이 문고리를 돌리듯 오므라들었다 펴졌다. 아내는 그 손이 멎을 때까지 벽 쪽에 붙어 있었다.

옆에 누운 나는 눈을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입가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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