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kg의 불면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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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반드시 가야 해.”
나는 아놀드의 연회색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눈동자에 순식간에 스쳤다 사라진 당혹감과 귀밑머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속내를 드러냈다.
“산성 도서관 안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그가 말했다. “재단이 벌써 다섯 해 전에 안을 샅샅이 뒤져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잖아. 나를 억지로 끌고 가서 벽돌과 기왓장 더미 속에서 해결책을 찾겠다는 거야?”
“O5 평의회의 명령이야.”
“그건 너한테만 내린 명령이지. 넌 너무 중요하니까, 오도. 재단에는 네가 꼭 필요해……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여기서 조용히 죽게 내버려 둬.”
또 그 말이다. 또 “재단에는 오도가 꼭 필요하다”는 말. 정말 역겨워…… 나는 생각했다. 그 구역질 나는 기록들에 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그것들을 억눌러 밀어 넣고 계속 아놀드를 마주 보았다.
“넌 반드시 가야 해. 이건 네 죄야.”
“하지만 어우화이수이가 머물렀던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 그의 몸과 마음이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인내심은 며칠 전에 이미 불면증에 닳아 없어졌다.
“O5 평의회가 어우화이수이의 누명을 벗겨 줬어. 바로 사흘 전에. 넌 반드시 가야 해.” 나는 허리에서 권총을 풀어 노리쇠를 당기고 아놀드의 머리를 겨누었다. 비록…… 열사흘 동안 계속된 불면 때문에 손가락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하지만…… 코제트를 죽게 만든 그놈을 마주하고 싶지는……” 나는 아놀드를 내려다보았다. 마흔이 넘은 이 건장한 남자는 내 눈길에 짓눌려 작은 돌멩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내 약혼녀도 죽었어.” 나는 차갑게 말했다.
“진원 양의 일은 우리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뒤집힌 탁자를 넘어 아놀드 앞으로 다가간 뒤, 그의 이마에 총구를 바짝 붙였다. “네가 미안하겠지. 너희가 아니라 너.”
나는 사방으로 흐르는 커피를 밟으며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죽은 개 같은 아놀드를 끌었다. 복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흰색 의약품 골판지 상자와 기름때가 잔뜩 묻은 현실성 닻이 어지럽게 한데 쌓여 있었고, 반쯤 열린 몇몇 문 아래에서는 걸쭉하고 짙은 색의 액체가 흘러나와 쓰러진 서류 더미를 적셨다. 공기에는 여러 가지 불쾌한 냄새가 뒤섞여 가득했다. 우리는 눈이 어지러울 만큼 복잡한 복도 몇 개와 승강기를 거쳐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완전한 정적 속에 파리 떼가 살아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에워싸고 날뛰었지만, 누구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넌 자유야.” 손이 이미 말을 잘 듣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야 덜덜 떨며 감방 문을 열 수 있었다. 예거는 여전히 안에 서 있었다. 내가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눈꺼풀이 더 내려앉았지만, 늑대 같은 두 줄기 초록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와 아놀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너희 개자식들이 좀 더 일찍 어우화이수이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는 침을 뱉고 우리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 지금 급한 건 산성 도서관 지하실로 서둘러 가는 거야. O5 평의회 열세 명이 지금 전부 거기에 있어…… 불면증에 대처할 최후의 수단이 있대.”
“하하, 씨발. 내가 살다 살다 간수들 우두머리까지 보게 되다니…… 이 정도면 됐지!” 예거는 크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놀드는 그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다시 내 등 뒤로 몸을 움츠렸다.
예거는 다섯 해 전 산성 도서관 대규모 소요 사건 때 체포된 AWCY의 일원으로, 철저한 자유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다. 그가 O5들의 면전에서 그들의 어머니를 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때까지 살아 있기만 한다면, 나는 그를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Site-CN-30 기지 로비로 갔다. 그곳에서는 창밖 하늘에 흐릿한 자홍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무는 석양이 또 한 번 뜬눈으로 지새울 고통스러운 밤을 예고했다. 새빨간 빛이 모든 것을 채웠고, 우리 세 사람의 수척한 몸은 차가운 바닥 위에 칼자국 같은 그림자를 새겼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 마디의 피딱지가 햇빛 아래 반짝였다.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점점 혼미해지는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진원이…… 날 부르고 있어.” 내 눈동자가 허공의 어딘가에 힘없이 고정되었다. “산성 도서관에서 우리를 맞이하겠대.”
“그럴 리가 있나? 시신까지 화장했잖아. 네가 직접 봤고.” 아놀드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아니야. 분명히 날 부르고 있어.” 나는 가슴의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오래전 진원이 내게 준 연애편지가 아직 그 안에 있었다. 불면증이 발생한 뒤로, 어떻게든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나는 늘 그것을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밤이 내렸다. 사거리마다 잿더미들이 불티를 내뿜었다. 강철 빛깔 연기가 목과 눈을 찔렀다. 나는 그 속을 천천히 걸었다. 황천길을 걷는 떠도는 혼백처럼.
나는 불면증이 발생한 이래 장막 밖의 반응에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내 세계는 재단 안에만 국한된 듯했다. 처음의 충격과 긴장, 그다음 일주일 동안의 미친 듯한 분주함, 그리고 지금의 뼈를 갉아먹는 피로와 억지로 정신을 추스르며 붙드는 희망에 이르기까지, 나는 온 세상이 나와 똑같은 열하루를 겪었으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부지깽이를 든 채 잿더미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중년 남녀, 빈 음료수 병이 든 봉지를 들고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 등에 메는 바구니 속에 웅크려 쉰 목소리로 흐느끼는 아이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장막 밖의 사람들이 불면이 무엇인지 아는지, 자신들이 이틀이나 사흘 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지, 한 조직이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왔고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지.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황급히 달아났다. 그들의 눈빛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첸쓰먼 대교 위에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등 뒤에는 텅 빈 장베이청이, 앞에는 칠흑 같은 차오톈먼이 있었다. 높이 솟은 교각은 회색 하늘 아래에서 유골 같은 질감을 띠었다. 편지지가 옷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진원은 단 세 마디로 힘없이 풀린 내 두 다리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첫 번째 말. “아둬, 나 진원이야. 나 돌아왔어.”
두 번째 말. “지금 O5와 함께 있어. 그 사람들이 날 되살렸고, 그러고는 널 선택했어.”
세 번째 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가 어디로 가든, 난 온 힘을 다해 널 찾아낼 거야.”
그녀만 쓰는 호칭이 나를 거칠게 과거로 끌어당겼다. 우습게도, 헛되이 흘려보낸 긴 세월 동안 그것은 거의 유일하게 나만의 것이었던 호칭이기도 했다. 오도 아마도이스 폰 클라이스트라는 이름 역시 객관적으로는 남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몽롱한 가운데, 진원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이 보이는 듯했다. 밝은 빗물의 색조를 띤 그 세월이.
진원과 나는 산성의 한 귀퉁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집 발코니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자링강 건너편이 보였다. 진원은 계단의 축축한 쇠 난간 옆에 서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새로 산 짙은 회색 반바지를 입고 최대한 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바닥에 미끄러질 뻔했다.
“좋은 아침이야, 아둬.” 진원이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또 계단 난간 타고 내려오는 거 보여 주려고?”
나는 웃으며 난간에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튀어나와 있던 철사 한 가닥이 계단 난간 끝에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계단에 옆으로 나자빠져 큰 소리로 신음했다.
“이것 좀 봐. 바지가 이렇게 찢어졌잖아.” 진원은 책등으로 훤히 드러난 내 엉덩이의 대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이따가 아주머니가 보시면 또 혼나겠다.”
“……”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주머니란 내 양어머니인 SCP 재단 3등급 연구원 호젠바흐 여사를 가리켰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독일인이었다. 일찍이 그들은 중국과 독일의 인력 교환 사업에 참여했는데, 그 사업은 몇 차례만 진행된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변칙 사고로 부모를 잃고, 이차 피해를 막기 위해 재단으로부터 10세 이전의 기억을 삭제당한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재단은 나의 원래 문화적 배경과 비슷하고, 일 때문에 가장 적절한 출산 시기를 놓친 호젠바흐 부부에게 우선 내 부모 역할을 맡겼다.
“됐어. 내가 새 바지 하나 사 줄게.” 진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 모아 둔 용돈도 좀 있어.”
진원은 나를 데리고 옷가게 거울 앞에 섰다. 나는 아직 상표를 떼지 않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키색 천이 햇빛 아래 비단처럼 반짝였다. 진원이 웃었다. 그녀는 이 아름답고 값비싼 천과 내 부드러운 금빛 곱슬머리가 어우러져 보기 좋은 그림을 이룬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거울 속에서 그녀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어린 내 머릿속에서 그토록 매력적이었다……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허리도 적당하고, 몸에 잘 맞네.” 돌아오는 길에 진원이 손을 뻗어 내 새 바지의 허리 부분을 잡아당겼다. “어젯밤에는 무슨 꿈 꿨어?”
나는 멀리 있는 자링강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녀가 잡아당기고서야 황급히 돌아섰다. 진원과 나는 자주 서로의 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정말 아무 꿈도 꾸지 않았을 때면 나는 아무 이야기나 몇 개 지어내 얼버무려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맑고 투명한 짙은 갈색 눈을 깜박이며 놀랍고 기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나는 아주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그……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
내가 입을 열자 진원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가랑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를 가리지 않았다. 조그만 물방울이 머리카락에 맺혀, 그녀의 윤곽이 빗속으로 번져 나가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도 그런 모습인 듯했다.
“어떤 곳에 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동시에 와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아는 거야. 이상하지?”
“예를 들면 어떤 곳?”
“예를 들면…… 높은 탑이 있는 거대한 흰색 건물. 내가 그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어. 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아주 무거웠어…… 처음 꿈꾸는 곳인데 꿈속에서는 내가 거기에 아주 여러 번 와 봤다는 걸 알고 있었어.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났어. 기다리는 동안 너무 초조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정말 들어가고 싶었거든……”
“들어갔어?” 진원이 웃으며 내 옆으로 와 서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 들어가기 전에 깼어. 하지만 마지막에는 누가 와서 문을 열어 줬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살짝 축축해진 반바지가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진원의 시선 아래에서 피부가 조금 팽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은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이름은 달랐어. 잊어버렸지만.”
“어쩌면…… 네가 어떤 삶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드러난 걸까? 책에서 그런 말을 본 것 같아.”
“너는?” 나는 진원에게 물었다.
“밀린 숙제를 너무 늦게까지 해서 잠이 안 왔어.”
진원은 고개를 돌려 구불구불한 골목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자욱한 빗속으로 녹아들었다. 나는 바닥에 작은 물웅덩이들이 점점 생겨나는 모습을 보았다. 진원의 치맛자락은 땅에 박힌 거울 속에서 선녀의 옷자락처럼 흩날렸고, 길고 곧은 두 다리가 잔물결을 밟고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벽을 가득 덮은 담쟁이덩굴이 물처럼 짙푸르렀다……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 아주, 아주 오래 남았다. 지금까지도 처음처럼 선명하다.
그리고 지금,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는 열여덟 해 전 우리가 머물렀던 골목을 걸었다. 가로등은 깨져 있었고, 짙은 알코올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구역질이 났다. 나는 손전등도 켜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걸었다. 쌓인 쓰레기들을 줄곧 발로 차내며, 고집스럽게 기억에만 의지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옆의 창문이 갑자기 밝아졌고, 뒤이어 한 남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스름한 빛 아래 죽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발치에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었고, 검붉은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내가 걸어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날 진원이 농담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둬, 있잖아. 모든 사람이 잠들 수 없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나는 길 위를 홀로 쓸쓸히 걸었다.
예거는 이미 어느 구석인지 모를 곳에 쓰러졌고, 아놀드는 그보다 더 일찍 쓰러졌다. 길모퉁이의 부서진 불빛이 바닥 가득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망막에 피가 울컥울컥 몰렸다. 하늘에 상처 하나가 찢겨 열리고, 그 속에서 불길 한 줄기가 솟구쳤다. 나는 그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죽은 고양이가 내 발아래에서 갈라졌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기력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나는 강변에서 구르고 기며 힘겹게 나아갔다. 앞서 길모퉁이 벽 위를 흘렀던 검은 그림자들이 이제는 똑같이 칠흑 같은 강물 속에서 뒤집히며 솟구쳤다. 거의 다 왔나? 산성 도서관에? 죽은 듯 고요한 흰빛이 비치는 가운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힘이 풀려 어느 계단 위로 쓰러졌다. 두 눈은 크게 뜨이고 가슴은 쉬지 않고 들썩였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시뻘겋게 달군 쇠 드릴이 정수리에 구멍을 뚫는 것 같았다. 이명은 몹시 심했고,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했다. 거친 나무껍질이 뺨을 긁어 아팠다. 흙에서는 조금 짠맛이 났다. 그때 두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들었다.
“아둬, 정말 잘했어.”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꼬박 다섯 해 동안 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 밤낮으로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에 닿았다. 감촉은 차가웠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내 피부에는 폭탄 하나를 떨어뜨린 것과 다름없었다.
“진원? 네가 어떻게……”
“돌아왔어.” 그녀가 내 눈꺼풀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정말 너무 힘들면 내 무릎에 잠깐 누워 있어. 어차피 아직 시간은 조금 있으니까.”
그녀는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내 생각은 대학 입학시험 점수가 발표되던 날 저녁으로 끌려갔다. 서남 지역의 전력 공급이 제한되어 산성에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다. 건물 옥상에서 우리는 뜨거운 저녁노을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해가 녹아들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자링강을 바라보았다. 진원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주홍빛 햇살이 그녀의 그림자에 금빛 테두리를 둘렀다. 나는 백인인 나보다도 흰 그녀의 목과 살짝 치켜든 턱을 바라보다가 문득 숨이 막혔다. 진원이 웃었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내 묶은 머리에서 삐죽 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난간 끝과 자링강 가에 잠겨드는 마지막 한 줄기 석양에 기대어, 나는 대담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 팔을 자기 눈앞으로 들어 올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내가 몇 점 받았는지 맞혀 볼래?” 나는 어쩔 줄 몰라 서툴게 응수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곧바로 손등에 한 줄기 열기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뜨거운 감각은 팔을 타고 올라와 가슴과 아랫배에까지 이르렀다.
아니야…… 여기가 아니야. 그녀의 팔은 따뜻해야 해. 허벅지도 따뜻해야 해…… 그런데 지금 나는 차가운 품에 안겨 있다. 체형도 목소리도 거의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속에서 나는 내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머리는 가슴 앞으로 늘어져 있었고 팔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누군가 나를 안고 달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눈을 뜰 힘이 없었다. 나는 과부하 상태로 돌아가는 뇌에 묶인 채 다시 기억 깊숙한 곳으로 떨어졌다.
그 뒤 재단의 배치에 따라 우리는 둘 다 산성의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녀는 이름난 스승을 따라 신경과학 연구에 몰두했고, 나는 컴퓨터공학부에 들어가 데이터 분석을 배웠다. 졸업한 뒤에도 우리는 내부 채용을 통해 산성에 있는 재단의 같은 시설에 들어갔다. 그녀는 요원이었고 나는 한낱 연구원이었지만, 우리가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연인이 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언제부터 문제가 생긴 걸까? 나는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산성 도서관의 흑단 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눈을 뜨자 무거운 대문이 그에 맞춰 열렸다. 얇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빛 속에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흰옷에 싸인 곧센 소나무 같았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귀밑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나를 보았다…… 나는 영문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입꼬리의 곡선…… 나는 그 곡선을 알았다.
그 미소는 누구의 것이었지? 나는 그전에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그런데 왜 그가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대문은 거의 곧바로 닫혔다.
새 몇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보닛 위에 내려앉았다. 아놀드는 작은 목소리로 녹음기에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다른 재단 직원 하나는 운전대에 다리를 걸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내 오른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 혼돈의 반란과 결탁한 탈주자……”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저 사람 자료는 이미 네 업무용 메일로 보냈어.”
“우리 일을 방해한 거지?”
“당연하지.”
“왜 탈주했어?”
“막대한 자금을 횡령해서 격리실 규격이 기준에 못 미치게 됐고, 재단 인원이 많이 죽거나 다쳤어. 그러고는 거의 곧바로 돈을 들고 도망쳤지. 지금은 이름을 바꾸고 기적술로 얼굴까지 바꿔 혼돈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게 밝혀졌어.”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이름 하나가 눈에 뛰어들었다.
“이 사람……”
“이따가 일단 푹 쉬어. 오늘은 아직 싸울 필요 없어.” 아놀드가 말했다. “아무래도 넌 중요하니까. 재단에는 네가 꼭 필요해, 오도.”
“이 사람 이름이 ‘어우화이수이’야?”
“그래. 왜?”
“어릴 때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주 꿈에 나왔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거든…… 이제 기억났어. 그 사람 이름이 바로 어우화이수이였어.”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머릿속의 극심한 통증이 정점에 이르렀다. 온몸이 차가워지며 나는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하마터면 나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손바닥 아래의 바닥은 매끄럽고 차가웠다. 나는 팔다리로 바닥을 짚고 기어가며 눈을 뜨려고 발버둥 쳤지만, 눈알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통제할 수 없이 위로 뒤집혔다. 불면으로 죽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몽롱함 속에서 두 팔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몸을 숙였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내 얼굴 위로 떨어졌고, 입술이 내 귀에 가까워졌다.
“아둬, 고통이 좀 줄어들게 약을 마실래?”
그날 나는 기록실에 서 있었다. 익숙한 느낌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동시에 가슴속에 열이 나는 듯한 감각도 생겼다. 그 감각은 신경 하나하나를 따라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숨이 가빠졌고, 손을 부자연스럽게 움켜쥐었다 폈다.
자료는 여러 쪽이었고, 모든 쪽에 그의 죄악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현재 산성 도서관 관장인 그는 산성의 장막 밖 관련 단체 거의 전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혼돈의 반란뿐 아니라 AWCY, 녹색 참새 재단, 심지어 주홍왕의 아이들과도 왕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최근 동향을 훑어보았다. 재단에서 돈을 들고 달아난 뒤, 그는 혼돈의 반란과 협정을 맺고 붉은 엔진이라는 거대한 장치를 연구하는 듯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강렬한 불안이 내 마음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불안은 전적으로 장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그 자료에는 그가 평소 기적술을 사용해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어우화이수이의 실제 사진을 보았다. 그의 미소가 왜 그토록 익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미소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앞의 전신거울에 수없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종이 위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왜일까? 내 아버지인가? 형인가? 아니, 아니야. 내 아버지라면 어머니는 누구지? 왜 나는 어머니의 외모를 조금도 물려받지 못했을까? 내 쌍둥이 형이라면 어떻게 우리 둘의 생년월일이 수십 년이나 차이 날 수 있지?
이 의문은 내 마음속에서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그 불길에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고,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뜬 채 지새우던 그 밤들 속에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놀드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그와 잡담할 기회를 틈타 그의 사무실 맨 아래 서랍 열쇠를 훔쳤다.
십여 분 만에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애초에 어린 시절 변칙 사고를 당한 고아 따위가 아니었다. 열 살 이전의 기억을 삭제당한 적도 전혀 없었다……
나는……
아놀드의 사무실에서 넋을 잃은 채 나온 뒤, 나는 기지의 흰 벽을 짚고 힘겹게 발을 옮겼다. 하급 연구원 하나가 비위를 맞추려는 듯 다가와 무슨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재단에는 당신이 꼭 필요해요, 오도.
따귀 한 대가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무너져 통제력을 잃고 사람을 때린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행동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구경한 것은 당연했지만, 나는 이미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 어릴 때 자주 같이 꿈 이야기를 했었지?” 나는 고개를 숙여 진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나랑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이 어우화이수이라고 했어.”
진원은 나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공기가 갑자기 답답해졌다. 빗물이 창틀에 떨어지며 축축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은 그 세 글자를 정확히 어떻게 쓰는지 말해 준 적이 없는데, 나는 왜 그 세 글자라는 걸 알았을까?”
“모르겠어. 네가 잘못 기억하는 거 아닐까?” 그녀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었다. “그 꿈 안 꾼 지 오래됐잖아?”
나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너도 날 속이고 있는 거야?” 내 말이 물결처럼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자, 언제나 차분하던 진원의 표정이 조금의 놀라움에 깨졌다.
“다 봤어.” 나는 누렇게 바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아놀드의 책상 아래에서 훔쳐 온, 십여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낡은 기록이었다.
나는 두 손이 떨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며 그중 한 장을 펴서 탁자 위에 놓았다. 눈을 찌르는 선홍색 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기적술적 수단을 이용한 복제체 오도 아마도이스 폰 클라이스트 제작에 관한 결의
“나는 그 남자의 대체품이지?” 나는 진원에게 물었다. “하…… ‘오도는 너무 중요해.’ 재단에서 줄곧 하던 그 말이 원래 이런 뜻이었어?”
“오도가 없어지자 다시 만들고…… 하나를 다시 만들 만큼…… 중요했다는 거네……”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속에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난 정말 지난 십여 년 동안 내가 너무 열심히, 너무 성실하게 일하고 공헌도 많이 해서 재단이 그렇게 칭찬하는 줄 알았어……”
“알고 보니 난 고작 우수 사원의 대체품이었어? 그 사람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부모도 없고, 어린 시절도 없어…… 심지어 오직 나만의 이름 하나조차 없어……”
재떨이가 깨지며 파편이 바닥에 튀었다.
“아니야, 아둬……” 그녀가 내게 지어 준 애칭을 불렀다. “적어도 나한테 너는 특별해.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녀는 다가와 내 무릎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손이 내 등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 팔의 부드러운 감촉이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되돌려 놓았다. 그녀의 손길에 나는 자세를 바꿔 머리를 그녀의 가슴에 기대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일단 그런 건 잠깐 잊자. 내일 다시 해결 방법을 의논해 보자.” 그녀는 내 얼굴을 감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달린 두 눈으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묶여 있던 내 머리가 풀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내 턱에 입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 이런 일을 할 생각이 드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이려 애쓰며 천천히 밀어 넣었다.
진원은 소파에 반듯이 누워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싸고, 길고 흰 두 다리를 내 허리에 걸쳤다. 몸을 섞는 느낌은 여느 때처럼 편안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아직 간신히나마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인지도 몰랐다.
땀과 체액 때문에 한데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나는 그 투명한 플라스틱 같은 작은 주머니 두 개를 조명 아래 들어 올렸다. 안에 담긴 십여 밀리리터의, 콧물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 없는 반투명한 흰 액체를 빛이 통과하며 벽에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것들을 서로 맞대어 단단히 매듭지은 뒤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자기 위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식 능력이 없는 기적술의 피조물에게 피임은 애초에 아무 필요도 없었으니까.
빗물이 통유리창을 따라 흘렀다. 창밖에는 푸른빛이 가득했다. 진원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아까 카펫 위로 떨어진 리넨 소재의 흰 긴 셔츠와 갈색 치마를 주워 들었다.
“좋아. 진실을 말해 줄게, 아둬.”
“십여 년 전 재단에서 중국과 독일의 인원 교환 행사를 한 적이 있어. 네 사람이 중국에 왔지. 호젠바흐 부부, 아놀드 로빈슨, 그리고……”
“오도 아마도이스 폰 클라이스트.”
나는 고개를 숙여 맨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렸다.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우수 직원이었어. 업무 숙련도는 현지인 대다수보다도 높았지. 하지만 나중에 돈에 대한 욕망에 물들어, 누구나 보기에 너무나 어리석은 거짓말을 꾸며 재단의 자산을 빼내려 했어. 재단은 당연히 간파했지만, 그가 전에 세운 큰 공적들 때문에 곧바로 처분하지는 않았지. 그리고 바로 그 공적들 때문에, 재단은 그가 탈주한 뒤에도 그의 유전자와 몇 가지 기적술 재료를 사용해 너를 만들기로 했어.”
“그다음은?” 나는 멍하니 물었다.
“그다음에는 재단이 원래 과학 연구에 쓰려던 자금을 대대적으로 횡령하기 시작했어. 그것만으로는 그의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에 부족했지. 그래서 격리 절차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자금에까지 검은 손을 뻗었어…… 그러다 대규모 격리 실패 사건이 일어났고, 더는 장부를 조작해서 모든 것을 덮을 수 없게 됐어. 혼돈의 반란에 가담하고 그들을 위해 붉은 엔진을 연구한 건 그보다 훨씬 나중 일이야.”
“어떤 거짓말을 꾸몄는데?”
“그는 O5 평의회 구성원들에게 자기가 계산해 냈다고 말했어. 끔찍한 불면증이 곧 이 우주를 감염시킬 테니, 전 인류를 다른 우주로 옮길 시설을 건설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산성 도서관 로비의 높은 지붕 아래 앉아 있었다. 흰 기둥들이 희미한 어둠 속까지 위로 뻗어 있었고, 밝은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왔다. 이제는 그렇게 눈부시지 않았다. 죽음에 이를 만큼의 피로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방금 잠들었던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꿈을 겪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나무로 된 의자 같은 물건 위에 놓인 듯했다. 진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쪽을 향해 허리를 숙였는데, 그 허리와 등에는 힘이 넘쳐 불면증에 시달려 이미 기괴하게 뒤틀린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보니, 어둑한 푸른빛의 비실체 데이터 투영체 열셋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저들이 O5…… 처음 그들을 만나는 것이 이런 종말의 광경 속에서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묵직한 의자에 누워, 힘겹게 고개를 틀어 좌우를 살폈다. O5의 형체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저 내 시야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보이는 것은 대리석 바닥에 흩어진 케이블 뭉치들과 정체 모를 전자 기기들뿐이었다. 케이블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내 뒤쪽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등 뒤에서 커다란 전류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틀렸다.” 열세 형체가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일제히 기계 같은 합성음을 냈다.
틀렸다…… O5가 틀렸다. 그들이 사과하고 있다. 어우화이수이의 일로 사과하는 건가……? 어우화이수이가 처음 자금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내 생각은 그날로 돌아갔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이번 작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 작전은 산성의 변칙 범죄 세력을 소탕하는 우리 활동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한낮인데도 하늘은 짙게 흐렸다. 햇빛은 황혼처럼 희미했고, 구름 속에서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이 굴렀다. 커다란 번개들이 검은 산들 위를 날아다니며 하늘을 번갈아 밝히고 어둡게 했다. 아놀드와 완전무장한 기동특무부대원 이십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산성 도서관 문 앞의 긴 계단을 올라갔다.
“오랜 세월 산성 도서관에는 완고한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요주의 인물 어우화이수이를 우두머리로 삼은 이들은 고위험 기적술과 현실 조정 능력을 이용해 재단 자산을 가로채고,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며, 정상성의 안전을 위협해 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어우화이수이…… 내…… 내…… 유전학적 의미의 아버지? 아니, 그와 나의 유전적 연결은 아버지보다 더 밀접했다.
나는 복잡한 생각에 얽힌 채 높다란 나무 문짝 두 개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나무 문은 오래되고 위엄 있는 거대한 비석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정교한 나무 부조를 세 번 두드렸다.
“……인내에는 한계가 있으며, 여러분의 시간과 정력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겁먹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위해, 인류의 복지를 위해, 요새 안에 움츠린 범죄 세력과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정말 싸워야 하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흉악하길래…… 나는 이어폰 음량을 조금 낮추며 두서없는 생각을 했다.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현재 우리 앞에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 변칙 소굴을 완전히 소탕할 기회, 바로 ‘붉은 엔진’입니다. 우리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오늘 붉은 엔진이 처음으로 전부하 가동에 들어갑니다. 이 건물을 덮은 기적술 역장이 크게 약해질 것입니다. 우리 기지가 독자적으로 이곳을 돌파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여전히 발소리는 없었다. 어우화이수이는 안에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일까? 나는 하마터면 몸을 돌려 달아날 뻔했다. 이곳에서, 안에 있는 저 남자에게서. 나와 거의 똑같지만 죄악으로 가득한 저 남자에게서…… 그는 정말 죄악으로 가득할까?
나는 그의 물처럼 부드러운 눈빛을 떠올렸다. 그 꿈들 속에서,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눈빛을. 어우화이수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각 부대 준비. 목표 환경 내 EVE 입자 강도의 급격한 감소가 감지됐다. 강제 진입 준비.”
“오도, 정문에서 떨어져!” 아놀드가 명령하며 내 손바닥에 권총 한 자루를 쥐여 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옆으로 달렸다. 귀를 찢는 천둥과 함께 기적술 선열포가 경쾌하게 울부짖었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공간 진동의 전조였다. 굉음이 터지며 나는 도서관 외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새까만 창유리에 흐트러진 내 얼굴이 비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산성 도서관의 굳게 잠긴 나무 대문이 완전히 날아갔고, 기동특무부대원들이 줄지어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백의 요새에 난 피투성이 상처를 깊숙이 찌르는 강철 칼날 같았다.
나는 옷 주머니 속 아놀드의 총을 더듬어 꺼냈다. 손안의 손잡이는 거칠고 차가웠다.
산성 도서관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왜인지 로비는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컸다. 바닥에는 매끄럽게 빛나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이교의 토템과 신비 신앙에 관한 거대한 채색화가 박혀 있었다. 높이 솟은 흰 돌기둥들 뒤로 수많은 문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어떤 문은 열려 그 뒤에 뭉친 어둠을 드러냈다.
로비에는 새까맣게 몰린 기동특무부대원들 외에도 분노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대략 삼사십 명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있었고,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맨손이었고, 어떤 이들은 총을 들었으며, 어떤 이들은 생활용품이 불룩하게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이들도 있었다. 나는 곧 그들이 모두 어우화이수이의 보호를 받던 여러 부류의 관련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 뒤에 붉은 엔진이 있었다.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 거대한 장치가 눈부신 붉은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구조물은 고리 모양이었다. 무수한 케이블이 뒤엉켜 늘어져 로비를 가로지른 뒤 문 너머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고리 한가운데에는 붉게 빛나는 안개 덩어리가 떠 있었다. 그 안개는 액체 같은 질감을 띠었으나 정처 없이 흔들렸고, 허공에서 무심하게 맥동했다.
어우화이수이는 무장한 혼돈의 반란 인원들 사이에 서 있다가 홀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와, 기동특무부대원들의 맨 앞에 선 아놀드를 마주했다.
“가동에 실패했지?” 아놀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귀 재단은 무슨 뜻입니까?” 어우화이수이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태도는 여유롭고 침착했다. 그가 새까만 총구 이십여 개를 마주하고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았다.
“이건 우리가 앞서 맺은 모든 약속을 어기는 일입니다.”
“정상성을 파괴하고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도들과는 약속 따위 할 수 없다.” 아놀드가 턱을 치켜들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이제는 정체불명의 장치로 산청 전체의 안전까지 위협하겠다는 건가?”
“진작 말했잖습니까. 붉은 엔진의 역할은 불면증으로 죽게 될 인류를 다른 세계선으로 옮기는 것뿐입니다.” 어우화이수이가 상체를 곧게 폈다. “제 예상으로는 불면증이 창궐하기까지 아직 오 년이 남았습니다. 혼돈의 반란과 협력하면 이 오 년 동안 인류 전체를 모두 옮길 수 있습니다.”
“그게 혼돈의 반란과 손잡고, 격리 절차를 유지하는 데 써야 할 막대한 공금을 횡령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인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우화이수이가 고개를 숙였다. “O5 평의회가 자금을 배정해 주지 않아서 비정상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하게 되니까요.”
아놀드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앞서 연습한 대로 그의 앞으로 걸어가 총을 뽑아 어우화이수이를 겨누었다. 총을 쥔 손이 갈수록 심하게 떨렸다. 나는 어우화이수이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고 태연한 어우화이수이, 양 떼를 이끄는 목자처럼, 찬란한 우상처럼 서 있는 어우화이수이, 무엇도 두려워한 적 없는 듯한 어우화이수이를——우리는 그저 앞으로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 그를 겁주려 했을 따름이었다.
“불면증이 영속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녹색 참새 재단 관계자 한 명이 말했다.
“예술에는 자유로운 하늘이 필요합니다!” 예거라는 예술가가 외쳤다.
“오 년 뒤에도 살아 있고 싶지 않다면 우리를 죽이시오.” 어우화이수이 옆에 있던 혼돈의 반란 대원이 확성기를 꺼냈다.
나는 어우화이수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과 눈매가 눈앞에서 점점 선명해졌다. 그가 한 말은 대체 사실일까? 그를 믿어야 할까? 어우화이수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내 속눈썹 앞에서 나부꼈다. 나는 그것이 가짜임을, 기적술로 물들인 색일 따름임을 알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슬프고 진실했으며, 그의 자세는 여유롭고 흔들림이 없었다. 흰 정장은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고, 그 때문에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이 더욱 눈부시게 도드라졌다.
아놀드가 내 손에 쥐여 준 총이 오발했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죽어라, 앞잡이들아!!!”
고함이 터지자 변칙 예술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착각을 안겨 준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에게도 무기가 있었다. 누군가 아놀드를 향해 총을 쐈다. 기동특무부대원들이 아놀드를 겹겹이 둘러쌌다.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았다. 방탄조끼가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몰려드는 남녀노소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교섭 결렬이다. 발포해도 좋다.”
그렇게 학살이 시작되었다.
홀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몇몇 기적술사가 대규모 술식을 펼쳤다. 급히 꺼내 든 탓에 파괴력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거대한 연기 덩어리를 잇달아 만들어 내 학살의 진행을 크게 늦추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변장 술식이 풀리는 모습을, 어우화이수이의 시체가 점차 나 자신과 똑같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총알이 말벌처럼 쌩쌩 소리를 내며 내 발치의 바닥에 부딪혔다. 누군가 곁에서 쓰러졌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풋사과들이 바닥 가득 굴러다녔다.
“아도——”
유탄 한 발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진원이 몸을 날려 덮쳐 오더니 이내 내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 지르는 것도, 울부짖는 것도 잊었다. 아놀드가 나를 전장에서 끌어낼 때까지.
그제야 짙은 안개가 이미 걷혔고, 격렬한 전투 소리도 멎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까지 혼란에 휩싸여 있던 홀에는 적막만 남아 있었다. 죽음의 적막이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죽은 이들의 으깨진 머리와 내 신발 밑창을 적셨다. 나는 온몸이 끈적하고 미끈거리는 피로 뒤덮였음을 깨달았다. 악취는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은 시체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 아놀드에게 총을 돌려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아놀드에게 물었다. “……왜…… 오발한 겁니까?”
“내 아내, 프랑스에서 온 삼 등급 연구원 코제트는 피할 수 있었던 그 격리 실패 사고로 죽었지.” 아놀드가 말했다. “그래서 어우화이수이를 아내의 길동무로 삼으려 했어.”
내 뇌는 뜨겁게 달아오른 쇠구슬 같았다. 눈알은 자꾸 위로 뒤집혔지만 의식을 잃을 수는 없었다. 모든 체력은 멈출 수 없는 호흡을 지탱하는 데 쓰였다. 갈비뼈와 횡격막을 움직이고 두 폐를 부풀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고역 같았다.
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문간에 아놀드가 서 있었다. “미안하네…… 시간을 허비했어. 오 년이라는 시간을 우리가 허비하고 말았어. 하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네……”
“예거는요?” 나는 신음하며 물었다.
“오는 길에 죽었네. 생명 유지 약제가 한 관밖에 없었어……” 아놀드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장치를 꺼냈다. “O5가 내게 준 물건이네. 이걸 누르는 순간 온 세상이 지금 이 순간에 고정될 거야.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요? 돌아오다니요?” 내가 말했다. “어떻게 돌아옵니까? 제가 어디로 가는데요? 저는……”
아놀드가 붉은 엔진을 가리키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입가에서 두 모금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은 다른 세계로 가야 해.” 진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엔진이 가동되며 내뿜는 에너지에 휘날렸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가장자리에 붉은빛이 입혀졌다. 대입 시험 점수가 발표되던 날 밤, 나와 그녀가 말없이 서로의 관계를 확인했던 그 순간처럼.
“그런 다음 불면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해. 재단이 만든 AIC 직원으로서 내가 당신을 도울 거야.” 그녀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은’ 뒤에 O5-1, 그러니까 내게 신경내과를 가르쳤던 지도 교수가 내 정신 데이터를 기계 외피에 완벽하게 구현했어. 그래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지.”
“당신의 지도 교수가 O5……”
“내 지도 교수는 그의 화신 중 하나였을 따름이야. 그들에게는 특별한 수단이 있어서 불면증으로 죽지 않아.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릴 거야.”
그 말을 마친 진원은 금속 물체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긴 삼색 새틴 리본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O5들이 절대 배척 장갑의 파편으로 만든 재단의 별이야.” 그녀가 금속 물체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표면에 새겨진 두 이름이 손끝에 닿았다. 오도 아마도이스 폰 클라이스트와 어우화이수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미리 수여하는 거야. 당신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지. 덤으로 도착한 우주에 당신의 동위체가 있더라도 융합해서 소멸하거나 우주에 오류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야.”
붉은빛이 온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기계의 전체 모습은 분간할 수 없었다. 새로운 붉은 엔진은 오 년 전보다 더 거대했고, 소리도 한층 더 사나웠다. 그 진동에 내 심장은 불에 탄 나무처럼 부서져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오한에 떨며 눈물과 콧물을 흘린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여전히 한없이 부드러웠다.
“일어설 수 있겠어?”
나는 떨리는 팔로 몸을 받치고, 평생 써 본 적 없는 힘을 다해 일어섰다.
“가자. 나하고 당신, 둘이서.” 붉은 엔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진원이 손을 들어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내 체온에 뜨겁게 달아오른 재단의 별은 한순간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 돋아나 내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저 열나흘의 제국이 하늘을 집어삼킬 때……” 그녀가 고통으로 바싹 말라 갈라진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잠들지 못한 자들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으리라. 썩은 굴이 식탁을 가득 채우듯.”
우리는 열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끼고 붉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내가 이 우주의 산청 도서관에 온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내가 이곳에 온 뒤로 문 앞에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차를 마시다가, 처음에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신음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혼자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은 석 달 동안 노력한 끝에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뇌에서 비롯되는 고통은 매 순간 존재했다. 앞으로도 무한히 계속될 고통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나는 창가에 서서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세상의 모든 것을 세었다. O5 평의회가 선물한 절대 배척 장갑의 파편은 붉은 엔진에 들어가기 직전의 나를 고정해 놓았다. 극심한 수면 부족으로 인한 고통까지도. 이 고문은 내 몸과 함께, 이…… 내가 찾아온 백팔십몇 번째 세계에서 계속될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하지만 나는 제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미쳐 버리거나 자살하는 것이 해방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세계를, 내 고향을 구해야 한다. 진원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붉은 엔진에 들어간 뒤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극히 희박하지만. 결국 나는 모든 것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내가 겪은 모든 일과 앞으로 겪을 모든 일을. 그러면 더 조리 있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더 무거워지겠지만.
그런데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려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니.” 문 앞의 금발 부부를 보자 나도 모르게 놀라서 말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창가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했을 뿐, 그중 누구 하나 내 창문으로 눈길을 보낸 적조차 없었으니까.
“어머, 댁도 독일어를 하시는군요!” 금발의 할머니가 반갑게 말했다. “저는 얼마 전에 본에서 이사 왔어요. 댁은요?”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도마를 들고 있었다. 주름 사이로 보이는 호박색 눈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호젠바흐 부인?” 내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오도, 오도 아마도이스 폰 클라이스트입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동작이었다. 분명 웃는 모습이 몹시 보기 흉했을 것이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으니까.
“참, 저나 이 영감이나 아이 없이 살자는 주의이긴 하지만요.” 호젠바흐 부인이 웃으며 옆에 선 대머리 남자를 툭툭 쳤다. “며칠 전 이 산청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어요. 갈 곳이 없기에 저희가 거두었지요.”
문 뒤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바로 그 순간, 특별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문득 지금의 모든 일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일어난 적 있는 듯했다. 나와 진원은 다시 만난 것일까? 나는 넋을 잃고 소녀의 짙은 갈색 눈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지난 세계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방금의 감각도 우주 사이의 끝없는 거리를 힘겹게 건너온 미약한 전파처럼 뇌에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 꿈, 과거, 현재, 미래.
나는 진원을 바라보며 진원을 떠올렸다.
됐다. 동위체 하나일 따름이다. 지나온 무수한 세계에서 나는 그녀의 동위체를 무수히 보았고, 내 동위체도 무수히 보았다. 이런 일에는 진작 아무 동요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진원이 웃었다. 그 미소의 곡선에는 기묘한 기계적인 느낌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차디찼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손목에서 흰빛이 한 번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찾아낼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아도?”
나는 온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호젠바흐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국어를 배우고 계신가요? 제게는 중국어 이름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좋아요. 어떤 이름인가요?” 호젠바흐 부인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장에 적을 준비를 했다. 남편도 궁금한 듯 다가와 한 번 들여다보았다.
나는 진원의 손을 놓고 주머니에 손가락을 넣어 재단의 별을 어루만졌다. 역시 새겨진 글자의 감촉은 여전히 따끔하게 아팠다.
“어우화이수이입니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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