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밤을 기록합니다GLOBAL HORROR ARCHIVE
미간행MIDNIGHT G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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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를 애도하지는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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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익명자 U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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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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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정말 따분하네. ㅤㅤ

스쿨드는 거대한 암석 위성의 표면에 앉아, 하늘에 떠 있는 행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행성에서는 어느 인공 AI가 복제해 온 SCP-2000으로 만들어 낸 아인들이 활발히 살아가며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끼어들 수도 없었던 그녀는 그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며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스쿨드에게는 돌멩이를 위성 밖으로 던져 낼 힘이 없었으므로, 돌멩이들은 그저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땅에 떨어졌다. 근처의 돌멩이를 모조리 던져 버린 스쿨드는 모래바다에 그대로 드러누워, 이 기나긴 시간을 무슨 다른 방법으로 때울 수 있을지 생각했다.

??? ———————— 다른 신격이라면 벌써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키고 윤회를 돌렸을 텐데, 넌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야? ㅤㅤ

스쿨드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누가 말하는지 살폈다—— 열차에서 한 번 만났던 그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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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뭐 하는 거야, 귀신처럼 나타나서는.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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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일을 다 끝내고 널 보러 왔지. 다 끝냈다는 말도 정확하진 않지만——재단의 인류가 정말로 멸망했으니까, 난 해방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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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너 꽤 기분 좋아 보이네.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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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왜, 재단 세계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게 슬퍼할 만한 일이기라도 해?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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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하지만 오늘은 관객들이 보기 싫어하는 그런 재수 없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심심하다면 나랑 보드게임이나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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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응? 무슨 게임? 나 보드게임 할 줄 모르는데.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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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걱정 마, 이 게임은 너도 틀림없이 할 줄 알 거야. ㅤㅤ

그 말을 마친 우르드가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치자, 공학도라면 누구나 익숙할 가로세로 격자가 순식간에 두루마리를 가득 채웠다. 이어 만화처럼 단순화된 나무와 집, 도로의 환영이 그 작은 두루마리 위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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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오토체스를 하자. 게임판은 우리 앞에 있는 이 행성의 인공 아인 문명으로 하면 되겠네. 그런 다음 각자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서 이 게임판 위를 나아가게 하는 거야.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걸로,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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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그건 오토체스가 아니라 TRPG잖아.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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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하지만 TRPG는 네가 캐릭터를 조종해야 하잖아? 우리 규칙은 캐릭터를 만들고 나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거야——그러니까 오토체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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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좋아, 설득됐어. 그런데 이거 정말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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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물론 아니지. 독립된 생명이라는 작품을 우리가 빚어 내는 것과 성행위로 만들어 내는 게 뭐가 다르겠어? 게다가 우리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일에도 간섭하지 않아. 그저 ‘이 사람의 일생’을 미완성 이야기로 이 세계에 넣어서, 이 세계가 스스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결과를 내놓게 하는 거지. 우리에게 참 잘 어울리는 방식 같지 않아?

스쿨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르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뒤 그녀와 우르드는 두루마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각자 어떤 캐릭터를 만들지 생각했다.

우르드가 내려놓은 것은 이 문명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평범하게 시험을 치르고…… 그렇게 이 문명의 평범한 경찰이 되었다. 이 나라는 스쿨드의 머나먼 조국보다 훨씬 혼란스러웠지만, 국가 자체의 힘은 여전히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이곳에서 경찰이라는 직업은 일부 소국 군벌 휘하의 병사보다는 안전했다. 이론상 우르드의 평범한 말이자 신도인 그는 천수를 누리다 죽을 수 있었을 터였다—— 스쿨드의 캐릭터가 내려놓이기 전까지는.

스쿨드가 내려놓은 말은 예술가였다. 이 아인 문명에서는 예술 작품이 향락을 위해 쓰이는 일이 별로 없는 듯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문명의 아인들은 ‘예술 작품으로 향락을 누리는 것’을 동물의 발정기와 마찬가지로 ‘몸을 최대한 빨리 충족시켜 줘야 하는 생존 욕구’의 일종으로 여겼다.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는, 처음부터 뇌에, 나아가 유전자에까지 새겨진 모종의 ‘대업’에 모두 쏠려 있었다. 이런 환경에 감상적이고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가 나타났으니, 그런 예술가는 당연히 오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예술가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은 음악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평범한 깊은 밤,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던 이 예술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밈이 담긴 음악을 만들어 번화가에서 틀었다——그리고 우르드의 말 역시 그 번화가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평범했던 깊은 밤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음악에 이끌려 서로를 학살했고, 경찰의 목숨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이 미친 예술가는 마지막에 고층 건물 옥상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 이제 멋있어졌어?”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했지만, 그래도 우르드의 말보다는 몇 분 늦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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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그렇구나,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어.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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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시작부터 빡겜하는 거야? 게다가 아까는 이 게임이 인도적이냐고 묻더니, 시작하자마자 대학살을 벌이네. 너 무슨 지도 색칠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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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그래서 이겼어, 못 이겼어? 그리고 이 문명에도 ‘변칙’과 ‘재단’이 있다는 거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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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이거 무슨 떠나지도 않는 원귀 같네.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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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어쩔 수 없지. 재단이 자신의 존재를 서사에 심기로 했을 때부터, ‘재단’이라는 개념이 자기들 목숨보다 오래갈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했어. 게다가 너도 알잖아. 인간은 대체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별로 신경 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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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내 생각에는 이 문명이 SCP-2000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은데. 뭐 됐어, 한 판 더 하자.

이번에 우르드가 내려놓은 것은 이 문명의 ‘재단’ 소속 ‘O5’였다——물론 이 ‘재단’이 반드시 재단이라는 이름인 것은 아니고, 이 조직의 지도부도 반드시 O5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게임판 밖의 두 사람은 굳이 새 이름을 짓고 싶지 않았으므로 서로 간에는 인류 문명에서 가져온 명칭을 그대로 썼다. 조직의 고위층을 사악하게 그리는 일부 상투적인 상상과는 달리, 이 O5는 자신의 업무에 성실히 임하는 편이었고, 동시에 정책을 통해 재단의 하급 직원들을 위한 복지를 끊임없이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퇴를 앞두고 그는 변칙 사이비 종교를 겨냥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주도했고, 그 덕분에 재단 안팎에서 꽃과 박수가 쏟아질 만큼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렇게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말대로, 그는 은퇴한 뒤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스쿨드는 우르드가 내려놓은 말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작은 종교의 교주를 하나 만들어 게임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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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진심이야?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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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일단 보고 얘기하자. ㅤㅤ

스쿨드가 내려놓은 이 교주는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심리 치료사였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환자를 돕고 나자, 그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한지 절감했다. 그리하여 지역 문화의 주요 종교들을 공부한 뒤,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그는 떳떳하고 올바르게 행동했다. 신도들이 돈을 기부해도 그 돈을 다시 신도들에게 돌려주었고, 형편을 넘어서는 기부는 호통을 쳐서 막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그의 교리가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해 사이비 종교로 규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던 ‘백성을 위한 비법’에는 사실 모두 변칙 효과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단이 이 ‘사이비 종교’의 집회 장소를 급습했다. 일부 신도는 자발적으로 모여 저항했지만, 더 많은 이들은 그저 그의 주위에 모여 함께 좌선했다. 재단의 기동특무부대가 회당에 들이닥쳤을 때도, 그들은 눈을 떠 완전무장한 병사들을 바라보는 일조차 없었다. 재단은 끝내 이 작전의 영상도 공개하지 않았다. 교주와 신도들의 자살과 함께, 작고 수명이 짧았던 이 신흥 종교는 이 문명의 한구석에 놓인 눈에 띄지 않는 문장부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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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GG. 정말 아쉽네. 마지막에 진짜 기적 같은 게 좀 일어날 줄 알았는데.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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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GG는 무슨, 일부러 그랬지? 화면 밖의 녀석들이 종교를 미화하려는 묘사로 받아들일까 봐 겁나지도 않아?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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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낙인찍는 거야? 그럼 네 말은 지배계급을 미화하려는 묘사가 아니고? ㅤㅤ

우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뒤, 자신의 힘으로 사용한 점토를 조금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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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그만. 신 둘이 이런 주제로 입씨름하는 것도 너무 지루하네. 내가 더 신경 쓰이는 건, 네가 일부러 교주를 만들어 넣은 것 같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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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이미 있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당연히 더 쉬우니까.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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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 그럼 진짜 속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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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너 정말 귀찮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이 이유면 만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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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 ———————— 그럼 난 네가 왜 그러고 싶었는지도 알고 싶은데. ㅤ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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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나도 모른다고 하면? 다음에는 내가 만든 말을 정신분석이라도 하려고? ㅤㅤ

우르드가 스쿨드의 지뢰라도 밟은 듯, 스쿨드의 말투가 갑자기 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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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 해석, 해석, 해석——작품 해석은 본래 아주 사적인 행위여야 해. 그런데 너도, 데지레도, 꼭 해석한 내용을 무슨 사상에 갖다 붙이고는 정보 전파 수단을 동원해서 그 해석만이 옳고 유일하다고 선전하려 들지. 재단이 데지레에게 그런 짓을 시킨 건 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하고 악명 높은 교도소장이 되려 해서겠지. 넌? 넌 나한테 이래서 뭘 하려는 건데——

말이 지나쳤음을 깨달은 스쿨드는 분을 쏟아 내던 도중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게임판 속에서 사람과 차가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르드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하고, 그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르드 ———————— ……에휴. ‘그런 사람은 아예 신경 쓸 필요 없어’ 같은 말로 위로해 주고 싶긴 한데, 너한테 그런 조언은 필요 없겠지.

우르드 ————————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자. 상상을 초월하고 초형이상학 그 자체를 가리키는 창작과 미학의 신이 재단 세계관에 나타난 이유가, 재단은 어떤 주변인들의 삼류 창작 플랫폼이라고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욕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재단 독자들이 알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아마 ‘너는 처참하게 죽고 덤으로 작가의 신분증 번호까지 털리는’ 식의 파멸적인 재앙일 거야.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해——지금도 꽤 괜찮지 않아?

이어 우르드는 다른 두 쌍의 손으로 인형을 빚던 일을 멈추고, 무슨 신통한 보물이라도 꺼내듯 어디선가 책 두 권을 꺼냈다.

우르드 ———————— 기분이 안 나면 게임은 잠깐 멈추자…… ……나한테 책이 몇 권 있는데, 책 읽으면서 기분 좀 풀래?

우르드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푸른 행성을 바라보았다. 스쿨드와 마주치던 시선을 피했다기보다는, 인류로 인해 탄생한 그 유사 인류 문명을 관찰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우르드 ———————— ——그러고 보니, 저기에도 인터넷 같은 게 있을까? ㅤㅤ

막 책을 받아 들려던 스쿨드가 잠시 멈칫했다.

스쿨드 ———————— 어……? 있다면 이 문명도 끝이 좋을 가능성은 낮겠네.

우르드 ———————— 내가 한번 볼까? ㅤㅤ

스쿨드 ———————— 들키지는 마. 아니, 그냥 내가 현지 조사를 갈게. 내 존재를 숨기는 방법은 아니까.

우르드는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스쿨드가 문을 하나 그려 이 위성을 떠나고 나서야, 한 박자 늦은 듯 한마디를 했다.

우르드 ———————— ……조심해서 다녀와. ㅤㅤ

……

병상에 누운 소년은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눈을 떴더니 발에 감각이 없고, 곁에는 눈물범벅이 된 부모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반대편의 의사는 병원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목숨을 구했지만, 양쪽 무릎 아래가 트럭의 무게에 완전히 으스러져 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었다고 부드럽게 설명했다. 다행히 소년의 집은 형편이 넉넉했고, 부모 역시 아이를 사랑하여 돈을 들여 가장 좋은 의족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휠체어에 앉게 된 뒤부터 소년은 종잡을 수 없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장 안에 놓인, 한때 학교 운동 대회에서 받은 상들을 보면 갑자기 장 문을 부숴 버렸고, 밝은 여성의 목소리가 ‘우리는 힘껏 앞으로 나아가요’라고 노래하는 걸 들으면 손에 잡히는 물건을 텔레비전에 던졌다. 그럴 때마다 부모는 몰래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했다.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그들은 나와, 한 사람은 눈시울이 벌게진 아들을 안아 주고 다른 한 사람은 집 안의 난장판을 치웠다.

어느 날 소년의 부모가 낯선 여자를 데려왔다. 젊은 여자였지만 머리카락과 귀깃은 은빛이어서 샹들리에 아래에서 반짝였다. 아버지는 자신들이 찾은 최고의 재활 치료사라며, 의족을 착용한 뒤 재활 훈련을 도와줄 거라고 설명했다. “안녕.” 소년은 앞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여자를 보고 조금 거부감이 들어, 휠체어를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곧 휠체어가 붙들렸다. “……네 고통을 알아.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이렇게 하자. 재활 과정 얘기는 일단 접어 두고, 밖에 나가서 좀 걸을까?”

여자는 소년의 휠체어를 밀며 집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늦여름이었고, 일찍 찾아온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소년에게는 몹시 낯설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왔어요.” “응, 부모님이 널 데리고 나가자는 제안을 늘 거절하셨으니까. 사실은 좋은 뜻이야. 네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집 안에 가둬 두고 싶으신 거지. 하지만 그건 네 재활에 전혀 도움이 안 돼서, 널 만나기 전에 내가 이미 호되게 말씀드렸어.” 두 사람은 호숫가에 멈춰 서서 건너편에서 달리기로 운동하는 노인들을 보았다. “저도 저분들처럼 될 수 있어요?” 소년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재활 치료사는 웃었다. “내 훈련에 잘 따라 주기만 하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야. 내가 맡았던 환자들 중에는 비장애인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도 있는걸.” “……그분들은 이런 현실을 쉽게 받아들였나요?” 소년의 얼굴에 슬픔이 조금 어렸다. “거짓말을 듣고 싶어, 사실을 듣고 싶어?” “당연히 사실이죠.” “그 사람들도 너처럼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재활 치료사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소년의 휠체어 등받이에 얹었다. “하지만 사실은 네 생각과 정반대야. 장애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서 이 땅 위를 다시 달리고 싶어 했던 거야.” 소년은 말없이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다시 달리고 싶어?” “……네, 그러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달리고 싶어요…… 더는 휠체어에 앉아서 누가 밀어 줘야 움직이는 건 싫어요!” 소년은 처음으로 그렇게 목이 터져라 울었다. …… 어느새 일 년이 흘렀다. 소년은 이제 재활 치료사를 나이가 조금 많은 친구처럼 여겼다. 그녀의 훈련 아래, 소년은 환상통과 피부가 쓸리는 통증을 겪으며 서서히 의족의 감각을 받아들였고, 의족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과 비슷한 늦여름, 소년은 벌써 경보로 운동하는 노인들의 뒤를 따라 날듯이 걸을 수 있었다. 여전히 가끔 비틀거리거나 넘어졌지만 소년은 진작 익숙해졌고, 부모에게 달리기용 블레이드 의족을 사서 다시 달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꺼냈다. 경보를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 부모는 당연히 아들이 장애인 스포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지했고, 아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젊은 재활 치료사에게도 깊이 감사했다. 운동을 마친 소년은 땀에 흠뻑 젖어 휠체어에 털썩 주저앉은 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재활 치료사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며칠 안에 난 떠날 거야. 매일 하는 재활 훈련 빼먹지 않는 거, 잊지 마?” “아…… 다른 사람이 일어서는 걸 도와주러 가는 거예요?” “일어서는 건 아니고…… 다시 펜을 잡는 거.” 재활 치료사는 설명하면서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쥐는 동작을 했다. “네, 누군지는 모르지만 힘내서 빨리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그분한테 전해 줄게.”

‘재활 치료사’는 소년의 집에서 짐을 챙기고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아 원래는 비상 통로로 이어져야 할 방화문을 열고 그대로 문 뒤로 사라졌다.

한 직업계 고등학교에 수업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가라는 종이 울렸다——이 행성의 수많은 학교가 그렇듯이. 학생들은 긴 줄을 서고도 앉을 자리마저 놓칠까 봐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 학생은 인파를 거슬러, 밥도 먹지 않은 채 학교를 나서 시내 병원으로 달려갔다. …… 한편 병원의 어느 구석에서는 오늘 진료를 맡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업무용 컴퓨터 앞에 앉아 방금 배달시킨 라멘을 먹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는 부녀 한 쌍을 돌려보냈다——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딸이 학교에서 겪은 일을 아무리 호소해도, 아버지는 여전히 강압적인 말투로 딸을 ‘정상인’이라고 진단하라며 의사를 몰아붙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비극을 겨우 돌려보내고 나니, 운 나쁜 의사는 이미 식당의 식사 시간을 놓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배달 음식을 시켰고, 동료들은 그녀의 젊은 나이에도 하얀 머리카락과 귀깃이 매일 재수가 없어 근심하다가 센 것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 백발의 의사는 오전 진료 기록을 정리하면서 면을 후루룩 먹었다. 오전 환자 중에는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와, 기세등등하고 달래도 윽박질러도 통하지 않는 그 어머니가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지뢰계 소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와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병세가 무척 심했지만 그저 정기적으로 약을 처방받으러 온 참이었다.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고 의사 자신보다 다크서클이 짙은 직장인도 있었다. 그는 진료를 보는 오 분 동안 손목시계를 거듭 확인하는 강박 행동을 열 번이나 했으면서도, 업무에 지장을 줄까 봐 온갖 약물을 끝내 거절했다. 처음 그녀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되기로 한 데에는 ‘나는 비를 맞아 봤으니 다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 싶다’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조금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정식으로 일을 시작한 뒤에야,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치료해 낸다는 것이 가능성이 희박한 기적임을 깨달았다. 심지어 시내의 그 서브컬처 상권에서 아무나 열 명만 데려와 이야기를 나눠도, 쏟아져 나올 문제들이 자신의 오전 진료 기록을 모두 합친 것보다 두꺼울 판이었다——

백발의 의사가 속으로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제 번호도 남아 있는데요.” 학생처럼 보이는 소녀가 구겨진 번호표를 들고 있었다. 백발의 의사는 어쩔 수 없이 라멘 먹기를 멈추고, 면을 제대로 씹지도 못한 채 꿀꺽 삼켰다. 입을 닦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번호 호출기가 순서를 건너뛰었나 봐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소녀는 몸을 배배 꼬며 한참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제가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말을 꺼내려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에요.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요?” “저…… 친한 여자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백발의 의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 그건 별문제 없지 않아요? 동성을 좋아하는 건 병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제 친구한테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는데, 저도…… 다른 애들처럼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얘야,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그래야만 하는’ 일 같은 건 없어. 이제는 동성애자를 잡아 가던 시대도 아니잖아.” 백발의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고민하는 것도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아니야. 정말 두려운 건 남들이 알고 나면 널 어떻게 볼까 하는 거지, 그렇지?” “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음…… 사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그 애가 좋으면 좋은 거야. 서둘러 고백해서 누군가에게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어. 언젠가 네가 괜찮다고 느끼고, 그 애에게 말하고도 싶어지면 그때 스스로 정하면 돼. 그 애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연애 한 번 했다고 여기고. 어차피 이기고 지는 건 병가지상사잖아. 그리고 접수는 내가 취소해 줄게. 접수비는 나중에 돌려받을 거야.”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녀는 거듭 감사 인사를 한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

백발의 ‘의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책상 위의 펜과 반 그릇 남은 라멘도 챙겨, 진료과 뒷문을 통해 이 병원에서 사라졌다.

아주 오래전, 이 땅에는 이쪽 나라와 저쪽 나라라는 두 나라가 있었고, 두 나라는 전쟁을 벌였다. 그때 이쪽 나라는 땅이 넓으나 국력이 약했고, 저쪽 나라는 땅이 좁으나 국력이 강했다. 그리하여 저쪽 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은 흉악한 야심이 날로 커져, 약한 이쪽 나라를 집어삼키려 했다. 이쪽 나라 역시 하나로 뭉쳐 있지는 않았다. 나라 안에는 항복을 택한 매국노도 있었고, 보물을 닥치는 대로 모아 달아날 준비를 하는 어리석은 관리도 있었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열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와 관계없다. 이쪽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저쪽 나라의 전선을 늘여 놓고 전쟁을 끌어 국력을 쇠하게 하자, 저쪽 나라는 사악한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악한 방사를 불러들여 진을 치고 현세의 존재가 아닌 요마와 귀신을 소환했다. 귀신들이 내뿜는 장기에 수많은 전사와 민간인이 잇따라 쓰러졌다. 급기야 저쪽 나라의 군영에서는 귀신들이 갇혀 있는 ‘이쪽 나라의 천민들’을 산 채로 삼키고 찢어 죽이거나 장기로 처형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일이 소일거리가 되었다.

이쪽 나라에 이름 없는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공상하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그를 몽군이라 불렀다. 전쟁이 닥치자 몽군도 당연히 전장에 나갔지만, 친한 벗이 눈앞에서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장창을 들 힘마저 잃고 저쪽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몽군은 저쪽 나라 군대가 부리는 귀신들의 잔학함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갇힌 뒤에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으므로, 가장 좋아하는 환상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전쟁 포로들에게 바깥바람을 쐬게 해 주었을 때, 몽군은 우연히 수용소 안에 떨어진 흰 깃털 참새 한 마리를 주웠다. 가엾은 마음이 든 몽군은 쌀알로 흰 참새를 몰래 길렀다. 또 참새가 정령이 되어 자신을 구해 주리라 상상한 몽군은 처형을 앞두고 자기 귀깃을 뽑아 그 흰 참새에게 주었다. 감옥에 앉은 몽군은 밤새 잠들지 못하다가, 담 너머 저쪽 나라 군인들의 다급한 욕설을 들었다. 감옥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 보니, 이쪽 나라 사람들을 무수히 처형한 그 죄악의 포로수용소가 천벌이라도 받은 듯 거센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몽군은 이 틈을 타 감옥에서 달아나려다가, 처음 보는 백발 소녀가 괴력으로 감방 문 자물쇠를 부수는 것을 발견했다. 몽군은 소녀의 머리에 꽂힌 자신의 귀깃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발 소녀 역시 자신이 몽군에게 구해졌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저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라고 재촉했다.

“이 녀석아, 하늘에서 기적이 내려올 거란 망상은 그만해! 일어나! 네 동포들을 구하러 가!”

업을 씻는 그 불길은 아침까지 타올라, 죄악으로 가득한 백골의 땅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동이 트자 몽군은 구해 낸 사람들 사이에서 백발 소녀를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또 공상을 한다며 웃었지만, 간밤의 큰불과 몽군 자신이 감옥을 빠져나온 일은 도무지 설명하지 못했다. 정령 같기도 신선 같기도 한 소녀에게 구해진 몽군 역시 소녀가 간밤에 했던 말에 따라 다시는 헛된 공상에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저쪽 나라에 맞서는 의병에 합류했다.

“그래서 저는 언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유리에 매달린 어린 소녀가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지만, 유리 너머의 그 ‘흰 가운’은 무언가를 기록하더니 못 본 척 자리를 떠났다.

이곳은 ‘SCP 재단’——혹은 이 문명의 표현으로는 [특정 어휘:조직]이었다. 첫인상 그대로, 이곳은 ‘변칙’을 ‘격리’하는 조직으로, 목적은 인류를 ‘변칙’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는 것이었다. 마법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이 통유리 뒤의 어린 소녀 역시 격리된 ‘변칙’이었다. 재단이 그녀를 ‘변칙’으로 판정한 이유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실수로 자기 마법을 써서 생일 케이크와 생일의 주인공을 함께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소녀는 흰색 무균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온통 희고 아무런 생기도 없는 방을 바라보았다. 이 침실은 ‘유리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사생활을 보호해 준다고도 할 수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은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의사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그들은 이상한 기기로 몸을 스캔하고 명령을 내려 ‘마법’을 시험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녀와 대화하는 일조차 드물어, 꼭 로봇 같았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소녀는 들어오는 흰 가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귀깃은 조명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안녕…… 난 새로 왔어. 조금 있으면 불을 끄고 자야 해서…… 그러니까 널 재우러 온 거야.” “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어요? 대답 안 해 주면 안 잘 거예요.” 소녀는 이 기회를 붙잡고, 사람 대하는 게 조금 서툴러 보이는 흰 가운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나…… 나도 모르겠는데…… 다른 걸 부탁하면 안 될까?” 새로 온 흰 가운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동화책 한 권 갖고 싶어요!” “어, 응…… 좋아, 내일 줄게…… 착하지, 얼른 자.”

다음 날 그 흰 가운은 약속을 지켜 《과자집》 한 권을 가져왔다. 소녀는 이 흰 가운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다른 흰 가운들과는 다르고, 좀 더 사람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물었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상대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코토하라고 불러.” “코, 토하……? 발음이 정말 이상하네요.” “아주 멀고 먼 곳에서 왔거든.”

소녀는 금세 동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한참 읽다가 갑자기 책을 들어 올리고, 곁을 지키던 코토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코토하 언니, 이 이야기 읽어 봤어요?” “읽어 봤지. 그래서 너한테 가져다준 거야.” “저…… 저는…… 여기 나오는 마녀가 너무 불쌍해요.” “왜 그렇게 생각해? 남매를 잡아먹으려고 했잖아.” “왜냐하면, 봐요. 깊은 산속에 혼자 살고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 분명 외로울 거예요. 게다가, 게다가 늙었으니까 이가 안 좋아서 사탕도 못 먹겠죠…… 그래서 과자집을 남매한테 먹으라고 준 걸 거예요……” 소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오빠랑 여동생을 잡아먹으려고 한 건 잘못이지만, 마지막에 왜 불에 타 죽어야 해요……” 코토하는 멈칫했고, 머릿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마침내 그녀는 쪼그려 앉아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 가고 싶은 거니?” “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일부러 친구를 없앤 게 아니에요……” “착하지…… 그럼 네 마법으로 이 문을 열어 보자.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게. 나오고 나면 마법을 쓰는 방법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러면 친구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하여 어느 날, 이 격리실은 비게 되었다. 다른 재단 연구원들은 이곳에 마법을 쓸 줄 아는 어린 소녀가 갇혀 있었다는 것을 잊은 듯했고, 자신들이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격리실에 새로운 인간형 변칙 개체가 들어올 때까지도 그랬다. 그들은 이곳에 코토하라는 연구원이 있었다는 것도 잊었다.

……

스쿨드는 단순한 선으로 그린 문에서 걸어 나와, 전에 우르드와 게임을 하던 위성으로 돌아왔다. 우르드는 벌써 이곳을 한차례 손봐 놓았다.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텐트도 있었으며, 심지어 먼 곳을 관측하는 개인용 천체 망원경까지 있어서 꼭 야영지 같았다.

스쿨드 ———————— 나 왔어. ㅤㅤ

우르드 ———————— 이 녀석, 아주 신나게 놀던데. 보고 있자니 나도 해 보고 싶어지더라. 게다가 전 여자 친구한테 꽤 많은 걸 배운 모양이네.

우르드 ———————— 그런데 문명에 간섭하지 않고 정체도 숨기기로 했잖아. 어쩌다 이렇게 깊이 개입한 거야. 게다가 여기 인터넷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은 거 아니야?

스쿨드 ———————— 솔직히 이렇게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까 오히려 인터넷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던데. 게다가 걔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이 정도면 잘 숨긴 거지.

우르드 ———————— ……저쪽 토착 신화에 끼어들기 직전인데도 끝까지 우길 거야? ㅤㅤ

스쿨드 ———————— 그래서 뭐. 내가 걔들 의지에 간섭한 것도 아니잖아. 전부 자기가 결정한 거 아니야?

우르드 ———————— 아, 그래, 그래. 그러고는 자기 길을 가게 둔다는 거지. 그것도 결국 암시를 줘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거잖아.

스쿨드 ———————— 씨, 걔들이 무슨 길을 선택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도 그냥 “당당히 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 준 거잖아? 걔들이 그렇게 안 하겠다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세뇌라도 해?

우르드 ———————— 에휴, 이런 걸로 너랑 더 다투지는 않을게. 그래서 아직도 이 놀이를 계속하고 싶어? 내 생각엔 이제 충분히 논 것 같은데.

스쿨드 ———————— 그렇긴 한데, 그런 건 아니고…… 아직 승부가 안 났잖아? 한 판 더 해서 세 판 중 두 판을 이기는 쪽이 이긴 걸로 하자.

우르드 ———————— 좋아, 그럼 이번 판은 네가 먼저 둬. ㅤㅤ

스쿨드 ———————— 어? 선수를 양보한다고? 솔직히 이 네 이야기를 겪고 나니까 영감이 좀 바닥났어. 생각할 시간을 좀 줘.

스쿨드는 판 앞을 서성였다. 그녀는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그 이야기들은 이미 정해진 이치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에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아직 빚지 않은 점토 한 덩이를 판 안으로 던졌다.

우르드 ———————— ……………… ……?

우르드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멍해졌지만, 끝내 호기심에 이끌려 자신도 판 곁으로 다가가 형태 없는 말을 관찰했다. 그 말에는 어떤 종족도, 문화도, 이념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고, 어떤 외모도, 성별도, 신분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인간의 “자아”가 없는 탓에 바다에 떨어진 설탕 덩이처럼 녹아 버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말이 내려온 뒤 판 위에서 더 많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질병, 성별, 성적 지향, 민족 집단, 그리고 사람이 그어 놓은 온갖 기준에 따라 “이상”으로 분류된 사람들…… 그들은 그런 호칭을 자신에게 붙여도 될지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오직 부모에게 맞서기 위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긴 머리를 잘라 내고 “천륜을 거스른다”는 욕을 감수했다. 누군가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포기했다. 누군가는 윗사람의 부당한 착복과 모욕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저 공정한 말 한마디를 듣고자 칼을 들고 관군과 사흘 밤낮을 대치했다—— 역사이자 이야기인 이 서사들 속에서, 누군가는 현재를 떠나기로 했고 누군가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선 듯, 자신에게 틀 밖의 선택지도 있음을 보았다…… 심지어 그 “SCP 재단”조차 SCP-2000이 떠안긴 “대업” 외에도 “인류 문명의 복제품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스쿨드가 관찰에 푹 빠져 있을 때, 우르드가 판을 멈췄다.

스쿨드 ———————— 뭐야…… ㅤㅤ

우르드 ———————— 심각한 문제가 있어. 방금 거대한 소행성 하나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걸 감지했어. 아마 공전 주기가 몇 번 지나면 이 위성에 충돌할 거야. 위치는 대충 저쪽.

스쿨드 ———————— 얼마나 큰데? 설마 이 위성이 산산조각 나는 건 아니지? ㅤㅤ

우르드 ———————— 거의 그 정도야. 물론 네가 구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스쿨드는 우르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정말로 지구의 공룡을 멸종시키기에 충분한 소행성 하나가 은하계 바깥에서 이곳을 향해 소리 없이 돌진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끝내 판을 거두기로 했다.

스쿨드 ———————— 난 그들을 믿겠어. ㅤㅤ

우르드 ———————— 그것도 괜찮네. 그럼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스쿨드 ———————— ……미래로. ㅤㅤ

글

Ninth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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