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밤을 기록합니다GLOBAL HORROR ARCHIVE
미간행MIDNIGHT G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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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자고 나면

Dr Gears

꿈에서 진짜 사람, 그러니까 눈 뜬 세상에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남자는 항상 민망해졌다. 벌거벗고 무력한, 무방비하고 벌벌 떠는 상대를 굽어보기란 변태적 행위, 마치 확연한 관음과 같달까. 더구나 한층 더 야릇한 점이라면, 평범한 꿈 속 아주 진짜 같거나 아예 진짜가 아니거나 하는 소품이며 세트장과 달리 이 여자는 남자만큼이나 당황스럽고 불안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몸을 돌리며 말을 더듬거리고 당혹스런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뜻밖의 상황이라 그러지 않았으면 참 웃겨 보일 모습이었다. 방 안은 어슴푸레한 꿈 세트장, 흐릿한 표면이 광경 뒤편에서 부유하다 지시를 받고야 윤곽이 분명해졌다. 잠자는 사람 정신이 쉬이 받아들일 만큼… 물론 어떤 꿈에게는 그다지 그래 보이지 않았을지도.

"뭐… 뭐야 이거? 뭔데 이거?"

남자가 한숨쉬었다. 유려하지 않을진 몰라도 간결하게.

"당신, 제가 아는 사람이지요?"

여자가 홱 돌아서서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이윽고 발그스름한 머리카락을 뿌옇게 둘러친 밝고 파란 두 눈에서 기억이 졸졸 흘러나왔다. 학생들 중에 상위권에 가까운 쪽, 왼쪽 앞자리, 복도 가까운 데. 조용하고 평범한… 자기 스타일도 아닌데. 왜 꿈에-

"파크스(Parks) 선생님? 이… 서… 선생님 맞아요? 이게 대체 뭐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무심하게 여자의 이름을 떠올려봤다… 한 음절이었을 텐데, 트리시(Trish)나 다이아(Dia)나 그런.

"젊으신 분, 저도 유난 떨며 말씀드리긴 싫지만 이곳은 꿈입니다. 당신 자체가 한 가지 꿈이에요. 정신 속에서 빚어진 솜사탕, 실체를 띤 게 아니라 마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꿈이요? 미치셨어요?"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씩씩거리는 여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행동이 좀 많이 뚜렷한데… 하지만 실제로 누구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몇천 번을 통근하며 매일같이 지나치는 사람들한테서 머리 뽑고 몸통 뽑아서 만든 인형이려나. 평소에 꿈을 또렷하게 꾼다고 자부하는 남자로서도 이런 별볼일없는 순간에 디테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다소 떨떠름해졌다. 변기 고정하는 볼트에 금 세공하고 서화를 새겨넣은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머금어지는 웃음… 아무튼 다변성 때문에 인생은 사는 맛이 나오니까. 내 입맛엔 안 맞더라도.

"꿈꾼다는 것이 광기의 일종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요, 제 정신은 꽤나 멀쩡하답니다. 적어도 눈 뜬 세상에서는요. 지금 같은 '메타적' 꿈은 저한테도 다소 드문 일이긴 하군요. 좀더 참여하는 입장이 되고 하는."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눈 크게 뜬 채로 남자를 노려봤다. 예쁘긴 한데 꿈에서 나올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오늘 내 정신이 좀 튀는군, 남자가 짐작했다.

"세상에… 뭐…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 어떡한 건데요?! 나 방금… 차 몰고 집으로 가다 갑자기 졸립더니… 나한테 약 탔어요? 그랬던 거예요?"

남자가 피식 웃는, 사이에 한 줄기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상했다. 뭔가 잘못된 기분. 악몽 꾸는 나이는 지난 지 한참 됐지만 아직도 이상하고 유독하게 변동하는 의지에는 미처 적응하지 못했다. 안전한 환경에서 닥쳐오는 위협과 공포를 집어삼켜줄 정신, 그 이후의 두려움을 예방할 백신이 필요했다. 이런 밤에 극약을 쓰고 싶어지진 않았지만.

"선생님, 좀… 죄송하군요, 어떻게 정신 경련이 일어서 당신을 이렇게 자세하게 형성했는지. 하지만 전 아무 짓도 안 했고, 뭘 할 계획도 의도도 없습니다. 자, 이제 바다 꿈을 꾸어보죠."

"미쳤어요, 미쳤어, 씨발 미쳤어 너 이 개-"

여자의 욕설 위로 물들이 닥쳐왔다. 마치 안개처럼 공중에서 물이 엉겨 바다 한 덩어리가 되고, 파도 사이로 빛줄기 몇 가닥이 허우적거렸다. 남자는 욕을 내뱉는 여자의 형상을 고개 돌려 떨쳐버리고는 쏜살같이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몸이 떠오르는 와중에 공기처럼 물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암초가 좋을까, 아니면 풀 우거진 여울까지 떠올려볼까… 동굴이나 심해 탐험은 안되겠어. 이상하게 불안했다. 반짝이는 형상들을 빚고 커다란 물고기떼와 암초를 솟아나게 하기가, 오늘따라 힘겨웠다. 내가 이렇게나 민감해서 낯익은 얼굴 하나 봤다고 불안해질 수가 있나?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남자가 다시 세심하게 집중하며,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살아 움직이는 발색표처럼 직직 그어가며 명료한 형태로 뭉쳐갔다.

그때, 얼굴과 목구멍에 손들이 할퀴고 휘적이며 몸부림치는, 너무나 생생한 느낌.

남자는 깜짝 놀라 숨이 막혔다가,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물에서도 숨쉴 수 있었는데 어떻게? 왜? 머릿속에서 생각이 스쳐가고 빙빙 돌며 왜 갑자기 물이 호흡을 막는지 이해하려 애썼다. 고개를 돌아보자, 여자가 있었다. 눈은 크게 뜬 채로 부들거리고 머리카락은 엷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지고 손은 한껏 뻗어 남자의 얼굴과 목을 부여잡고 뜯어내려 들고, 입과 코에서 새어나오는 거품들이 줄지어 올라가며 사그라들었다. 얼굴은 새파랗고, 핏줄은 불거지고 팽팽해지고, 몸뚱이는 멀리 뻗어 있었다.

고통. 극심한 고통, 공포, 공기.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수면공황일 때 너무나 흔하게 나오는 질퍽한 꿈허약화(dream-weakness)가 힘을 잡아먹은 탓에, 주먹은 겁먹고 비난에 찬 널따란 얼굴을 미처 돌려놓지도 못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붙잡고는 아직도 위협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손가락들을 떼어냈다. 여자의 버둥거리던 팔다리가 점차 느려져 갔다. 거품이 멎고 몸부림이 잦아들고 얼굴은 입 벌어져 공포를 소리 없이 외치던 채로 정지했다. 여자의 몸뚱이가 부유해 멀어지고, 곧 내려가고, 찬찬히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게, 전부 다 진짜만 같았다. 목으로 엄습하던 손톱도, 잡아쥐던 정신 나간 손들도. 공포가 모서리부터 야금야금 갉아먹어 들고, 이음새가 들쳐지고, 빛이 밀려와-

남자, 파크스 씨가 눈을 떴다. 신음의 끝머리가 입술에서 막 사그라들고 사지가 침대 위에서 엉킨 채로. 눈을 깜박이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창밖으로 들어온 별빛 한 가닥과 벽시계만이 빛나고 있었다. 해 뜨려면 아직도 한참. 이 사실을 남자는 위안으로 삼으면서도 방금 지나온 엷은 안개처럼 깔렸던 악몽을 떨쳐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젠장, 너무 생생해! 남자가 목을 쓸었다가, 상처 없이 멀쩡히 잘 있자 바보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숨을 깊이 쉬고는 눈을 감고 구무럭구무럭 침대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동생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밖에 자주 나가고 그래야 하는데. 멍청하긴. 그냥 악몽 가지고. 고지랑물보단 고기국물 같은 경험 아닐까.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베개에다 머리를 묻었다.

잠과 꿈 사이 경계면에서 남자는 주저하며, 조바심 치며 부유했다. 마치 사람 죽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미신을 믿고 덜덜 떨듯이.

흐릿한 햇빛. 수업이, 말들이 완강한 못처럼 학생들 머리 위로 쏟아내렸다. 남자는 뭐, 이러는 때도 좋긴 하다만, 그 전에 한 줄기 빛이 덧없이 쨍하기 전 기다리는 길고 고된 일이었다. 생각은 부재하고 정보는 달달 외우는, 자기 집만큼이나 너무나 익숙한 것들. 낚시라든가 드넓은 바다 같은 생각이 맛 버린 기억 때문에 상한달까. 참 이상한 꿈이었어. 뭐 계속 매달릴 건 없지, 특히 오늘은. 주말이 지척이었다. 꿈은 물론 백일몽까지 즐기기 충분한 시간. 진짜로 여행사에다 한번 전화를 해볼까나. 적어도 동네 수족관이라도 가든가.

그때, 빈 자리 하나가 남자의 눈을 잡아끌었다. 마치 이 빠진 자리에 혀가 드나들듯이.

파크스 씨는 빈 자리를 바라봤다. 얼굴이 확 굳고 눈만 두 번 끔벅였다. 주변 학생들이 갑자기 필기며 가방이며 만지작거리느라 분주해졌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정말 아무 상관 없어. 잘해야 희한한 선견지명, 예를 들면 눈에 띄었던 기침이나 괴상한 자세 같은, 정신 깨면 날아가서 꿈 재료로 바뀌는. 무의식이 관심을 기울였다가는 바쁜 의지한테 무시당하는 무슨 증상 같은 거지. 남자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으며, 누구 결석한 여학생 본 적 없냐고 툭 하고 물어보려는 욕구를 꾹 억눌렀다. 빈 자리가 보일 때마다 여자의 물에 잠긴, 파르라니 숨이 막힌 얼굴이 눈앞에 드리워지는 듯했다. 진도 나가, 복습 없어, 즐거운 강의. 음악과 서류작업, 바쁜 정신을 위안해준다네.

경찰의 말로는 여자의 이름은 엘레노어(Eleanore)였다. 일명 엘(Ell)이라 불렸다. 남자가 두렵고 당황한 마음에 몸이 딱 굳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비슷하게는 맞혔다고 자축했을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은 그날 저녁에, 남자가 일과를 마칠 때쯤 찾아왔다. 애들이야 싸돌아다니니까 웬만하면 걱정거리야 아니다만, 여자 일은 정말 이상했다. 귀가 시간을 훨씬 넘어갔고, 남자친구 집에서 별일없이 나왔다고 했다. 차가 도로를 벗어나 나무에 부딪혀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지만 시체는 없었다. 핏자국도 아무것도. 지갑 같은 물건마저도 고스란히 차에 남았다. 마치 차 안에서 홀연히 사라진 듯이. 남자는 앉아서, 우려하는 당혹감을 얼굴에다 씌운 채로 속으로는 웅크려서 마구 흔들렸다. 여자의 비난에 차고 겁먹은 비명이 기억에서 떠오르며 세차게 흔들어댔다. 그럴 리 없어, 정말 소름끼치고 정신 나간 우연이야. 불가능해. 정말 그렇다 해도, 어떻게? 왜?

아니요, 뭐 보거나 들은 것 없어요, 애석하지만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학생이라. 아니요, 무슨 친구 무슨 가족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인간관계 따위 전혀 아는 게 없고요. 학생들과 평소에 대화할 때래 봐야 강의 중 토론 시간이나 강의 후 가끔 질문할 때뿐이었다. 미안해요, 딱히 더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그럼요, 무슨 소식 들려오면 바로 알려줄게요. 술 먹고 엄청 재수없는 일이 생겼나 본데 하루이틀 지나면 쪽박 차고 억울한 표정으로 돌아오겠지. 의례적 인사 몇 마디, 이렇게 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농담 몇 마디.

남자는 걸어 귀가했다. 큼지막한 주홍 글자 "M"이 등에서 활활 타오르며 빛나는 기분을 짊어진 채로.

여자가 아직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아직도 여자가 있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꿈 바닥에 흠뻑 젖고 새파래진 채로 여자가 누워 있었다. 너무나 분명하고 뚜렷하게, 넘쳐흐르리만치 실감나게, 마치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눈밭 한복판 삽화처럼. 아무것도 없이 오직 여자만, 후줄근하고 차갑게, 그나마 주변에 물이 드문드문 고이고,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진 채로 굳어 어느 나라 해초 같았다. 냄새가 풍겼다. 물 냄새와 짠내, 그 아래로 기이하게 둥글린 물고기 깨문 자국… 혹은 심지어 썩었다거나. 코에서 여전히 물방울이 줄줄 새어나와 새파란 뺨을 타고 물덩이 위로 흘러내렸다.

제자리 잃은 죄책감, 스트레스, 공황, 아냐, 아냐아냐아냐, 멀어져, 멀어져야 해.

물이 사라졌다. 숲, 녹색 들판, 평화로운 꽃밭과 나른한 햇발, 빛과 따뜻한 기억. 어려진 남자는 들판에서 아무 부담 없이 종일 탐구에 나설 수 있었다. 키 큰 풀 사이를 헤집으며 메뚜기와 풍뎅이를 뒤쫓고, 그 옆으로 늘어서 손짓하는 옥수수밭. 저 앞의 숲, 들판 가운데 삐죽이 쓰러진 나무 한 그루, 보루와 오래된 깡통이 가득한 땅, 옆에 달리는 기이한 사슴과 여우들. 남자는 아주 먼 옛날, 10살도 채 안되는 시점으로 돌아와 향수를 눈에 가득 머금은 채 걷다가, 콩 넘어져, 웬 차갑고 질퍽한 덩어리 위로 엎어졌다. 땅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킬 때, 느껴졌다. 손바닥과 몸뚱이로 번지는 축축함, 손가락에 달라붙는 실가닥들. 아래를 내려다보자, 손에 붉은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 엉켜 있었다.

여자가 아직 있었다.

지옥에서 부는 비눗방울처럼 꿈이 싹 사라졌다. 아직 있었다, 아직 죽은 채로, 아직 축축하고 비릿하게. 이제는 풀이며 흙도 더러 묻어 있었다. 남자가 움찔했다. 손바닥도 몸뚱이도 여전히 축축했다. 남자는 의지를 쏟아내 여자를 몰아냈다. 얼른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으로, 아무 데라도. 여자는 거부했다. 옮겨지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슨 힘으로도, 어떤 의지로도. 남자가 여자를 냅다 밀쳤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생명 없는 시체가 옆으로 날아가 불쾌하게 철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팔다리와 머리가 역겨우리만치 가없이 축 늘어졌다. 충격이 들어오며 허허벌판도 햇빛도 흩어지고, 이내 남은 것은 아무 곳도 아닌 흐릿한 장소… 그리고 시체가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데 있었다. 죄책감 속에 박아넣은 못처럼. 아직도 남자의 손에서 습기가 느껴지고, 물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마치 막혀버린 배수구에서 썩어가는 물질처럼, 눈 뜬 세상만큼이나 실감나게.

남자가 팔을 마구 휘둘렀다. 뭐라도 해보려 했다. 상자와 금고, 효과가 있었지만 집중을 유지하는 동안뿐, 한번 풀기만 하면 어김없이 미치도록 그대로, 새파란 채로 물일 떨어졌다. 산더미만한 장작더미, 태양의 심장을 뽑아 불을 붙이자 해결되는 듯했다…가는 결국 남은 것은 새까맣게 타서 악취나는 몸체, 망가지고 연기나는 두 눈. 꿈속인데도 남나는 목이 막히고 구역질이 났다. 다음은 날붙이, 그러나 소리 때문에, 살점이 끊어지는 모습과 우저적 쪼개지는 뼈 때문에 작업은 시작하자마자 멈춰버렸다. 어릴 때 이래로 처음으로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길 바랐다. 지나가는 친절한 영혼이라도 하나 찾아와 자길 깨우고 안아주길 갈망했다. 남자가 공포에 빠진 사이, 어떤 젊은 남자가 당황하는 기색으로 언제인지도 모르게 등 뒤로 다가와서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겁먹어서 그랬다 하면 이해받을까, 남자의 다소 과격한 반응은.

마음속으로 옛날 벽장과 복도에 살던 그 잊은 지 오래된 괴물들이 환상으로 떼지어 밀려오며, 남자는 몸을 휙 돌렸고, 오로지 악몽 속 긴긴 싸움으로 형성한 반사운동에 힘입어 반응을 몰아쳤다. 삿된 것들을 태워버리는 강렬한, 눈이 멀도록 밝은 빛. 새하얀 빛더미가 젊은 남자를 삼켰다. 비명조차 나오지 못했다. 간신히 새어나온 가냘픈 꺼어억 소리 뒤로, 온몸이 까맣게 바뀌며 찢어발겨지고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모두 불타오를 뿐. 파크스 씨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고야 빛을 거둬들였지만, 벌써 너무 늦었다. 보랏빛, 검은빛으로 뒤덮인 피부와 훤히 드러난 뼈가 손을 뻗는 듯하더니 노출된 무릎이 꿇려졌다. 이빨 토막으로 이루어진 비틀린 구멍이 소리 없이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살갗 벗겨진 손가락뼈들이 메마른 팔에 매달려 앞으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쓰러지며 후두둑, 숨소리 끊어진 잿더미가 되었다. 등만이 멀쩡하게 남은 채. 구운 돼지고기와 오줌 냄새가 풍겼다.

시신의 주인을 파크스 씨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방법도 의향도 없었다. 그저 꿈 속에서 남은 시간 내내 공황에 잠겨 두 시신을 오가거나 벌벌 떨며 울거나 할 뿐이었다. 다음날, 남자가 커피 한 잔을 사려다가 카운터를 맡은 사람이 바뀐 줄을 눈치채고야, 시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이름조차 모르는데.

죄책감과 공포는 자꾸만 동기를 자극한다. 잠은 맞서 싸울 수 있고 잠시 쫓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죽음처럼 결국 돌아온다. 잠과 함께 그들은 들어왔다. 알든 모르든. 당황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무엇보다 갇힌다. 통발로 끌려드는 가재처럼 그들은 와서 나가지 못했다. 살았든 죽었든, 악취와 공포가 커가는 한복판에서 나가지 못했다. 고통과 부상만은 나갈 수가 있었다. 파크스는 매일같이 격노한 꿈포로들이 안긴 사나운 상처를 새긴 채로 깨어났다. 정당방위할 수밖에 없었어, 안 그래? 깨어나는 것마저도 이제 해방이 아니었다. 다시 잠에 들면 어제 온 포로는 숨이 막혀 있었다. 새파란 얼굴에서 눈이며 혀며 불거진 채로. 한 걸음 물러나고, 열 걸음 물러나고,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잃고, 하지만 결코 잠에는 이르지 못하는, 늘 새로이 애원하는 맹렬한 공포를 수납한 가없는 저장고.

몇십 명이 죽고 옭아매였을 즈음, 파크스 씨는 아무 기별도 없이 별안간 대학에서 종적을 감췄다. 자택이 수색당했다. 폭행치사로 의심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잊혀졌다. 사람이야 그렇게 사라지기도 하니까. 삶이란 그런 법이지.

삼림 관리인 워싱턴(Washington)이 눈을 끔벅이며 얼굴을 매만졌다. 뭔가 이상했다. 인적 없기로 손꼽히는 길을 순찰하는 중이었다. 곰이나 쿠거가 드물게나마 나오기 때문에 눈 크게 뜨고 흔적을 찾고 있었다. 방금 그 자리로 막 눈을 돌린 참이었다. 숲이 훤히 드러나는 조그만 빈터, 벤치며 나지막한 돌 들이 우듬지를 발 아래 두는 곳. 그 남자가 있던 곳이었다. 며칠 전부터 자꾸 부대끼던 그 부랑자. 슬프게도 부랑자가 이 숲에서 뜸하지 않긴 했지만 이 남자는 특히 이상했다. 미친 사람은 맞는데, 골치 아픈 부랑자면 보통 하이킹하는 사람한테 소리를 지르든가 희롱하는 말을 늘어놓든가 하는데 이 남자는 오히려 사람을 피해다녔다. 달아나고 비명을 꽥꽥 지르고, 아무튼 온 힘을 다해서 남한테서 거리를 벌려놓으려고 기를 썼다. 민원이 드문드문 들어오던 와중에 며칠 전에 워싱턴도 직접 마주쳐 버렸다. 횡설수설하면서 자기한테서 떨어지라고 신음했다. 안 가면 죽는다면서. 붙잡아서 관리소로 끌고 와서 경찰한테 부랑자 하나 데려가라고 넘겨주기로 했다. 무전기로 와서 까다로운 노숙자 하나 있다고 말하려는 참에 갑자기… 뭐야? 갑자기 어둠이 깔리고… 부랑자가 공격했나? 자기 몸을 톺아봐도 다친 데는 없는데… 아까 그 남자 다가갈 땐 자고 있었는데.

그때, 생각 속으로 극심한 썩은내가 갑자기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혔다. 부패한 동물이나 쓰레기 구덩이도 이렇진 않은데. 올라오는 목구멍을 눌러 참고 고개를 돌려보니 뭐가 더 있었다. 안개 자욱한 주변, 흙바닥… 그리고 시체들. 세상에, 시체가 몇 개야! 덜 썩거나 더 썩거나, 온전하거나 갈가리 찢어졌거나 하면서 온통 널브러져 있었다. 전쟁터에라도 빠진 기분이었다. 산더미같은 시체 개수와 갖가지 부상들을 보자면. 워싱턴이 손으로 코와 입을 감싸며 악취를 애써 가렸다. 자세히 보니 시체들의 파도가 조그만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언덕 중앙의 높직한 돌들. 그 위에 그 방랑자가, 몸부림치면서 덜덜 떨리는 짤막한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워싱턴이 놀라 휘청이며 입이 가만히 떡 벌어지면서 순전히 반사작용에 따라 총을 빼들었다. 그러나 별안간 총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소리 하나 없이 허물어져 꽃잎이 되어 찬찬히 떨어졌다. 깜짝 놀라는 소리가 나왔다.

파크스 씨가 고개를 쳐들었다. 게슴츠레한 눈이, 죽음의 들판 가장자리에 방금 와서 선 또 한 사람을, 당황하는 그리고 이내 순수한 공포로 힘입어 가만히 움직임이 멎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음이 나오며 양손이 쭉 뻗어져 무기력한 애원이 나왔다.

"제발 나한테 알아지지 말라고 했잖아! 부탁했잖아! 내가 당신 꿈을 꾸면 죽는다고!"

잠자는 봉분이 그 외침을 삼켰다. 듣는 사람도 슬퍼하는 사람도 없이. 관리인이 비명을 질렀다.

by

XCnin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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