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중에 다친 콘드라키 박사
MontagueETC
간격을 두고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억겁, 혹은 몇 분.

THUMBNAIL
제왕과 거장 - 2장
F.A.Q.
생각 중에 다친 콘드라키 박사

총알과 나비 떼 일이 있고 한 달쯤 지나서, 당신은 처음으로 조리 있는 생각을 겪는다.
엉덩이 가려워서 미치겠네, 당신은 생각한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
빛도 어둠도, 소음도 정적도, 존재도 부재도 없다. 그때… 감각이 생긴다. 촉각, 시각, 청각. 그러나 모두 이해와는 동떨어져 있다. 몸뚱이의 두피에 와 닿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 먼지 한 톨 없이 속 빈 병실, 모니터링 장치에서 나는 둔탁한 기계음. 당신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다. 손을 뻗고 또 뻗어 보지만 매번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기만 한다.
간격을 두고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억겁, 혹은 몇 분.

몸뚱이는 움직임을 그다지 되찾지 못하면서도 움직이게 된다. 별안간 만개하는 신경 화학 물질에 맞춰 가슴과 어깨가 요동친다. 다시 움직이려 해보지만 자극 그리고 반응 사이 흐리터분한 공간에서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린다. 몸뚱이가 입을 열려고 하자 왜인지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팔을 들려 하자 왼쪽 안면이 굳는다. 고개를 돌리고 주먹을 쥐고 침대에서 뛰어내리려 하자 방 안을 핑그르르 휘감아 도는 색색의 줄무늬가 보인다.
속수무책으로 경련하는 몸뚱이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심장이 일정한 높낮이로 웅웅댄다. 적어도 그거 하난 멀쩡한 셈이다.

말들이 합쳐지기 시작한다.
무르고 가냘픈 말들이, 당신의 인지 과정 끄트머리 위를 해어진 구름처럼 흘러간다. 이 역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말들이 머리 위로 지나가며 드리우는 엷은 그림자만을 느낄 수 있을 뿐.
─처럼 계속 빤히 쳐다봐서 기분 나빠─
─바이털이 안정됐으니 투약량을 줄여도─
─진짜로 언젠간 저것들 막 번쩍거려서 나 발작한다고─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인데 뇌 활동은─
─대소변기 아직 안 갈았나요?
몸뚱이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태양은 하늘을 가로질러 한 치 한 치 나아간다. 그림자가 가물대다가 커진다. 원래와 똑같은 땅을, 떨어지는 빛이 바꾸어 놓는다.

시간이 흐른다. 생각은 조리 있다. 몸뚱이의 엉덩이는 아직도 가렵다.
멀고 먼 어딘가에서 질문이 던져진다.


ARE WE ████ YET?


SCP-7408-B 면담 기록 07
당신: 뭐지?
박사: "오늘 기분은 어떠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신: 그렇죠. 그렇게… 말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 난 괜찮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조리 있는 생각을 하고 사흘 정도 지나서, 누군가 몸뚱이의 행동거지가 달라진 걸 눈치채고 백의를 입은 여성을 보내 살펴보게 한다. 당신은 이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몸뚱이는 구내식당에서 이 여자하고 쉬는 시간에 동료끼리 나눌 만한 얘깃거리로 수다를 떤 적이 있을 것 같다.
여자가 말을 내뱉는다. 이번에는, 이해된다.

SCP-7408-B 면담 기록 01
박사: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몸뚱이가 입을 떼지만, 거친 숨소리만 씨근씨근 나온다. 대체 얼마 만에 처음으로 말하는 거려나?
여자가 몸뚱이의 입술에 물을 가져다 대고 나서야 당신은 다시 입을 뗀다.
당신: 네.
박사: 당신 이름이 뭐죠?
이름이 없지는 않겠지? 무릇 사람은 이름이 있고 당신은 사람이다. 고로…
당신: 콘드라키.
박사: 좋습니다. 성 말고 이름은요?
아, 맞다. 사람 이름은 보통 최소 두 마디로 이뤄진다.
당신: 그…
당신은 이름을 찾아 헤맨다. 없지는… 않다. 당신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여기, 몸뚱이의 머릿속에 말이다. 그런데 모양이 바뀌어 버렸다. 더는 머리에 담기지 못한다.
당신: 모르겠는데요.
당신: 뭐죠?
여자가 당신이 분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물 흐르듯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다. 나쁜 소식이 있는 것이다.
박사: 당신이라면 아실 줄 알았습니다만.


햇살이 녹아내리는 황금처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당신은 잠을 깬다. 병실은 깨끗하고 고요하지만 건물 안 다른 곳에서 바쁜 소리들이 나직이 들려온다.
창문 맞은편에 선 간호사가 수액 세트를 확인한다. 피부가 자작나무 껍질처럼 희다. 머리와 어깨에 가녀린 가지가 돋아나 있다. 그녀가 당신을 보며 묻는다—


박사: 이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당신: 에스테르베르크 메모리얼 병원.
햇살이 녹아내리는 황금처럼 유리창으로 쏟아진다.
박사: 왜 여기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정적이 방 안을 메우다시피 한다.
당신: 글쎄요…
당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출근하는 중에—
시간이 휜다…
당신: 잠깐.
…이윽고 부러진다.
당신: 내가 왜 에스테르베르크에 있죠?
수없이 많은 조그만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당신: 잠깐.
방이 피부를 벗어 백옥색 얼굴을 드러낸다.
어딘가에 햇살이 든다. 이곳은 아니다.


말하자면 기억은 사진과 같다.
빛바래고, 주름진다.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 나가지만 기억은 유리판 뒤에 못 박혀 꼼짝도 않는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서.


계약이 체결되고 난 뒤, 안광 없는 재단 돌보미가 아이를 당신에게 데려온다. 어린아이는 참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자란다. 고작 몇 달 지났을 뿐인데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동안 키가 몇 센티 자랐고 이발을 한 모양이다.
아이가 문턱에 서서 머뭇거린다. 두 눈이 번득인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몸뚱이는 체중이 9킬로나 빠졌고, 뇌 수술 전에 삭발한 머리는 이제 겨우 자라기 시작한 참이다. 아이의 눈에는 제 아비를 본뜬 기분 나쁜 모조품, 뼈마디 앙상한 아류작으로 보일 것이 뻔하다.
어쩌면 당신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는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니까.
안녕, 아들. 당신은 쉰 목소리로 겨우 말한다. 보고 싶었어.
거미줄처럼 가는 감정의 실이 속에서 톡 끊어졌는지, 아이가 뽀르르 달려와 몸뚱이의— 당신의 늑골에 머리를 들이박는다. 안도감과 괴로움 사이 어딘가에 서서, 당신은 훌쩍이는 아이를 끌어안는다.
재단 쪽에서 아이를 도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 두 사람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단골 바(가짜 신분증을 내밀어도 바운서가 흘끔 보고 마는 그런 바) 한 곳에 갔는데 그 남자가 있다. 사진 촬영 동호회 사람이다. 나이는 아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당신보다 많다. 피부는 올리브색이고, 검은 머리칼이 곱슬곱슬하며, 짧은 수염이 곁든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남자가 당신이 찍은 사진을 칭찬해 줄 때면 온기가 속을 스치곤 한다.
당신은 잠깐 해리슨 포드에 빠져 살았던 열네 살에 당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용기를 내기엔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후로 오 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 없이 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술이 머리뼈 밑바닥까지 가득 차서인지 그 남자가 당신을 묘한 눈으로 흘겨보는 걸 여러 번 눈치채서인지 망할 놈의 졸업 무도회 이후로 사람 손길을 느껴 본 적 없어서인지, 왜인지 몰라도 지금은 다르다. 당신은 남은 술을 모조리 털어 넣고 휘청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선다.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는 사이라 통성명한다. 남자가 말한다. 좋은 이름이네. 기억에 남겠어. 칭찬치고는 이상하지만, 희한하게도 또 바보 같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남자가, 뭐랄까, 당신을 바라본다. 몸을 뒤로 기대고서 눈을 반쯤 감는다. 뜯어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한 거 보여 줄까?


말하자면 몸뚱이는 사진첩이다. 열어 보라, 당신이 있다.
페이지를 넘겨라. 팔락, 팔락, 팔락. 출근하는 당신이 보인다. 통화하는 당신이 보인다. 선택을 내리는 당신이 보인다.
이렇듯 몸뚱이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넘친다.


햇살이 피를 내뿜는 상처처럼 물리 치료실에 쏟아진다. 당신은 그것이 환영이 아니라 진짜 햇살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은 요즘에 온갖 것을 다 확신한다. 당신은 지금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다리를 움직이려 하자 봉에 얹은 두 손이 주먹을 쥔다. 아무 일도 없다.
SCP-7408-A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손발이다. 녀석이 당신에게 이식되었을 때 당신의 뇌(얼마큼 남아 있었는지 몰라도)는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녀석은 균형을 죄 무너뜨렸고, 덕분에 의식적 활동에 필요한 신호들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당신은 그렇게 확신한다.
옆에서 물리 치료사가 원래 회복은 오래 걸린다 어쩌고, 인내가 저쩌고, 모든 게 선형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쩌고 지껄인다.
선형적이라. 개소리하네. 당신은 무시하고 다시 다리를 움직여 본다. 소용없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해 본다. 소용없다.
다시 해 본다. 소용없다.
다시 해 본다.
다시 해 본다.
다시 해 본다.

새벽 4시쯤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 아기 이야기를 한다. 지치고 피로한 한 시간이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만치나.
오전 8시 30분에 당신은 떠난다. 아파트에 말 없는 작별을 고하고 나선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당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조리 있게 된 당신은, 편찮아진다.
말수가 없어진다. 식사량이 준다. 사실상 숨만 쉬는 셈이다. 모든 게 무의미하잖은가?
앞으로 이 건물을 나갈 일은 없다. 재단의 감시 아래서 지하 몇 미터에 있는 건지도 모를 격리실에 갇혀 있는 한은.
다시는 하늘을 볼 수 없다.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다.
시간을 죽일 심산으로 나비 떼를 움직여 본다. 요령을 터득하니 생각보다 쉽다. 뇌 근육에 힘을 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은 나비 떼로 유희한다. 먼저 색깔부터. 파랑, 노랑, 주황. 초록.
그 다음엔 도형. 삼각형, 정육면체, 십이면체.
이내 더욱 복잡한 모양을 흉내 낸다. 기억 속 물건이나 어렴풋한 꿈속 얼굴을 되살려 본다. 바다를 그리려 해 보지만 그 색깔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당신은 눈만 떴다 하면 그 비유적 표현으로서의 근육을 움직이다 둥둥대는 편두통이 닥치고 나서야 그만두곤 한다. 이제 잠과 작업만이 당신의 인생이다.
격리실 안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심각한 얼굴을 한 그 여자의 정장 색깔은—
당신은 우편함에 든 잡지를 가져오려고 나가며 복슬복슬한 카펫을 디딘다. 저쪽 방에서 가족들이 TV를 보는 소리가 들린다.
싹둑.
실린 사진을 반듯이 잘라 낸다. 나무 사진 한 장. 휴대용 사진기 광고 한 장.
싹둑.
날이 손을 베어 살을 파고들었는데도 아프다는 생각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일순간 당신의 눈에는 한 장 한 장 핏빛으로 젖어 드는 잡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싹둑!
여자가 손에 든 계약서를 당신에게 보인다.
레이딕스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자가 말한다.
말하자면 몸뚱이는 사진첩이다. 기억은 사진이다. 그리고 가위가 그 모든 것을 오려 내어 컨페티로 만든다.
정신이 나뉘어 흩뿌려진다. 비선형적으로. 산산조각으로. 현재 시제로.
똑같은 조각들을, 새로운 맥락이 바꾸어 놓는다.
당신의 두 손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스며드니, 오묘한 색깔이 만들어진다.
당신은 미완성이다. 당신은 새로운 것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풀칠해 다시 붙인다.
SCP-7408-B 면담 기록 11
박사: 그동안 돌아볼 시간이 있었으니 말인데, 습격당했던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말해 보세요. 조사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당신: 그…
─소리가, 고함이 난다, 당신의 두개강 안에서 높고도 낭랑,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고함이 아니었다, 실은 교회 색유리처럼 당신을 베어 가르는 예리하고 새된 음이다, 차갑고 투명하며 날카로운─
─음이 아니라, 물처럼 당신을 채우는 다색의 빛이다, 가슴이 터질 때까지 부푸는─
─빛이 아니라 당신의 피부 아래서 육과 뼈에 가는 넝쿨을 뻗쳐 치감는 뿌리다, 벌어진 입 밖으로 향기로운 날개가 펼쳐질 때까지─
─뿌리가 아니라 펼치고, 감싸고, 반사하는 무늬다, 소리를, 고함을─
당신: 그 주에 있었던 일은 하나도 기억 안 납니다.
당신: 어쩐지 다행스럽네요.
변태
제왕과 거장
베타맥스 유서
by
Sol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