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유원경몽--마지막 친정 방문.하
그녀는 창밖에 서 있다가 문득 웃음을 지었다.
이들이 바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했던 가족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바쳐 가문을 떠받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충분히 높이 떠받쳐 주지 못한다는 불평만 했다.
정원에 갑자기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긴 회랑은 이미 올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봄날의 해당꽃, 한여름의 연꽃, 늦가을의 국화와 한겨울의 매화가 같은 밤빛 속에서 피어났다. 정원의 시간들이 서로 겹쳐지며 죽은 이에게 이미 일어난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안주인의 방에서 펼쳐지는 어느 오후를 보았다.
집안 어른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자는 척했고, 금아는 곁에 앉아 다리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남동생은 여종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고 희롱하며, 나중에 첩으로 들여 평생 금은보화를 두르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매서운 손찌검이 금아의 뺨에 떨어졌다.
“천한 창녀 같으니! 멀쩡한 사내를 너희 같은 여우들이 죄다 버려 놓는구나!”
금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남동생은 곁에 서 있었다.
집안 어른이 성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남동생이 어릴 적 잘못을 저지르면 늘 자기 뒤로 숨던 일이 떠올랐다. 일이 크든 작든 그녀는 언제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그에게 쏟아질 꾸지람을 막아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 때문에 여종이 벌을 받게 되자, 그는 반걸음 물러났다.
그의 삶에는 늘 그를 대신해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말리려 했지만, 몸은 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녀는 금아가 번듯한 옷을 벗겨지고 장신구를 빼앗긴 채, 마당을 가득 메운 하인들 앞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동생이 가산 뒤에 숨어, 걸음마다 뒤돌아보는 금아를 바라보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뒤쫓아 가려 했다.
그러나 친구가 새로 온 극단의 공연을 보러 가자고 청했다.
그는 나중에 금아를 다시 데려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금아는 우물에 몸을 던졌다.
우물물이 그녀를 집어삼킬 때, 그녀도 후회했다. 손톱을 이끼에 박아 넣고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려 했지만, 끝내 우물 벽에 몇 줄기 핏자국만 남겼다.
이어서 그녀는 옥아를 보았다.
금아와 함께 정원으로 팔려 왔던 그 여동생은 밤마다 우물가에 엎드려 울었다. 눈에서 피가 흐르도록 울었고, 핏눈물은 한 방울씩 우물로 떨어져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원혼을 먹여 살렸다.
그녀는 큰고모님의 생신 잔치에서 옥아가 언니를 제사지낸 향재 냄새를 몸에 묻히고 왔다는 이유로 재수 없다는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 밤 옥아가 두 사람 몫의 월급을 우물에 던져 넣는 모습도 보았다.
“그 사람들이 주는 관도 싫고, 은전도 싫어.”
“난 언니만 있으면 돼.”
옥아는 뛰어내렸다.
우물 밑에서 의식도 분명하지 않은 채 굶주려 있던 원혼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살과 피를 집어삼켰다. 금아는 제정신이 돌아오고서야 자신이 잡아먹은 것이 여동생임을 알아차렸다.
우물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정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긴 회랑은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는 유배길의 역로로 변했다.
장부 담당자의 누나가 칼과 족쇄를 찬 채 진창 속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동생의 첫 아내가 되었지만, 가문이 죄를 얻자 남동생은 삭발하고 출가하여 혼자 절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출가는 임시방편일 따름이라며, 사태가 잠잠해지면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가는 내내 그 말을 믿었다.
역참에 도착할 때마다 다음 역참에는 남편의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버려진 역참 정자 아래에서 병들어 죽어 가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동행하던 노파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앞으로 가면 또 역참이 있지요?”
노파는 그렇다고 거짓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안심하며 웃었다.
“그럼 됐어요. 그이가 약속했거든요. 앞으로 가면 누군가 저를 데리러 올 거라고요.”
그녀가 죽은 뒤에는 관도 없었다.
동행하던 사람들은 찢어진 거적 한 장으로 그녀를 감싸 역로 옆에 서둘러 묻었다.
한편 그녀의 남동생은 승복을 걸친 채 산문 뒤에서 염불 한마디를 외웠다.
그녀는 문득 남동생이 남들도 아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깨달았다.
그저 자신이 마음 아파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깊은 궁궐에 갇힌 누나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누나를 위해 지은 정원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금아가 벌 받는 모습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몸을 돌려 새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유배 가는 아내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절 안으로 숨어들어 마음만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입궁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녀를 궁으로 보냈다.
일족은 그녀의 노고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녀가 얻어 온 재물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이 정원의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줄 알았다.
다만 누구도 실제로 대가를 치르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정원의 시간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수많은 여종이 눈밭에 무릎을 꿇고 벌을 받는 모습과 매 맞아 죽은 하인들이 벽 틈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 주인집에서 마음대로 남에게 상으로 주거나 되팔거나 쫓아낸 하인들이 밤중에 남몰래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여자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아니, 이름이 너무 많았다고 해야 했다.
부모가 하나를 지어 주면 인신매매 여인이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고, 주인집에서는 기분이 좋을 때 또 하나를 하사했다.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이름은 남들이 편히 부려 먹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뒤에는 주인집의 자비로운 이야기에 적히는 하찮은 은덕 한 줄이 되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적장녀였다.
맏누이였다.
마마였다.
현덕비였다.
모두가 그녀의 신분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와 저 하인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다르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정원으로 팔려 왔다.
그녀는 궁으로 보내졌다.
그 여자들은 주인집을 위해 일하며 밥 한술과 몸을 의탁할 곳을 얻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총애를 다투고, 선처를 빌고, 번영을 유지하며 부모에게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 한마디를 얻었다.
모두가 그 여자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비를 막아 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더는 그 우리를 원망하지 못하게 했다.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녀는 자신이 수십 년 뒤의 정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는 이미 오래전에 가문이 죄를 얻었고, 저택도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한 뒤였다.
화려한 누각에는 검게 탄 들보와 기둥만 남았고, 호수 한가운데의 정자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잡초는 사람보다 높이 자랐고, 친정에 왔을 때 등불이 가득 걸렸던 긴 회랑에는 이제 깨진 창문을 지나는 바람의 흐느낌만 남아 있었다.
오직 그녀를 위해 지은 그 정원이 마침내 진정으로 그녀 한 사람의 것이 되었다.
부모도 없었다.
일족도 없었다.
남동생도 없었다.
길 양옆에 무릎을 꿇고 마마 천세를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홀로 쓸쓸히 우물가로 걸어갔다.
우물 난간에는 도사가 남긴 부적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쇠못 여덟 개가 돌 틈에 깊이 박혀 있었으며, 맨 위에는 푸른 녹이 잔뜩 슨 거울까지 얹혀 있었다.
우물 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때로는 금아의 목소리였다.
때로는 옥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두 목소리가 뒤섞여, 누가 언니이고 누가 동생인지 이미 구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물가에 서서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언니.”
우물 밑에서 갑자기 누군가 불렀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어쩌면 금아를 부른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를 부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평생 수많은 사람에게 언니나 누나로 불렸다.
남동생은 열이 날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
말썽을 부린 뒤 그녀의 등 뒤로 숨을 때도 누나라고 불렀다.
정원에 들어가 살고 싶을 때도, 황실 극단을 남겨 두고 싶을 때도 웃으며 누나라고 불렀다.
그 부름에는 언제나 그녀가 해내야 할 일이 하나씩 따라붙었다.
오직 우물 밑에서 들려온 이 한마디만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죽은 두 소녀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는 소리였다.
등 뒤에서 갑자기 우거진 잡초를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국 왕비의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홀로 허물어진 긴 회랑을 따라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세월은 여인의 눈가에 잔주름을 남겼지만, 등은 여전히 곧게 펴져 있었다. 화려한 옷의 모양새는 고국의 것과 달랐고 옷깃과 소맷부리에는 낯선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지만, 걸음걸이에는 여전히 정원에서 길러진 단정함이 배어 있었다.
왕비도 그녀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잡초와 황혼 사이에서 마주쳤다.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첩에게서 태어나 나중에 큰마님 곁으로 보내져 자란 여동생이었다.
가문은 한때 그 아이를 궁으로 보내, 자신의 뒤를 이을 두 번째 황비로 키우려 했다.
하지만 동생은 그 길을 걷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정원의 뒤엉킨 시간이 다시 갈라졌다.
그녀는 어린 소녀가 생모의 품에서 빼앗기는 모습과 첩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마당 문밖까지 뒤쫓아 나오는 모습, 소녀가 몇 번이고 차가운 얼굴로 “이낭, 자중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도록 강요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동생이 궁으로 보내져 무거운 관 장식을 머리에 이고 황실 예법을 배우는 모습과, 두 번째 황비로 정해지기 직전 스스로 왕비 앞에 무릎을 꿇고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먼 타국으로 화친 혼인을 떠나게 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긴 혼인 행렬이 고국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동생이 낯선 땅에서 언어를 배우고 곡식 창고를 점검하고 조세를 정비하는 모습, 남편과 다투다가 다시 마주 앉아 대화하는 모습, 밤에 악몽을 꾼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았다.
정원을 떠난 뒤, 정말로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
왕비 역시 같은 순간 그녀의 일생을 보았다.
어린 나이에 입궁해 깊은 밤 홀로 궁규를 외우는 모습, 병으로 인한 고통을 참으며 윗사람에게 은혜를 구하는 모습, 친정에 돌아왔을 때 정원을 가득 채운 사치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 죽기 직전 혼이 몸을 떠나 정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무능해서 가문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일족의 말을 듣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한때 같은 무게를 짊어졌다.
가문은 먼저 그들의 이름을 빼앗고, 그들의 어깨에 가문의 흥망을 얹었다.
성공하면 조상의 가호 덕이었다.
실패하면 그들이 무능한 탓이었다.
동생은 원래 두 번째 그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끝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동생이 그녀보다 영리해서도, 그녀보다 용감해서도 아니었다.
다른 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마침 동생에게는 아직 선택할 기회가 남아 있었을 따름이었다.
동생은 그녀보다 운이 좋았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질투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 위에 얹혀 있던,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무거운 짐이 문득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적어도 이 정원이 모든 소녀를 집어삼키지는 못했다.
우물에서 갑자기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수많은 여인이 동시에 물 밑에 잠겨, 수십 년의 세월 너머로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했다.
음산하고 차가운 우물물이 끊임없이 뒤끓었고, 이따금 창백한 손가락 한 마디가 드러났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우물가에서 가장 큰 부적을 바라보았다.
부적에는 악령을 억누르는 주사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끝에는 주인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부적을 떼어 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우물 안의 원한은 차츰 수맥을 따라 호수로 스며들 것이었다.
언젠가 금아는 남은 봉인을 뚫고, 평생 금은보화를 두르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자신이 벌을 받을 때 반걸음 물러섰던 사람 앞에 돌아갈 것이었다.
그녀는 평생 가문을 지켰다.
부모를 위해 작위를 지켰다.
일족을 위해 앞날을 지켰다.
남동생을 위해 정원을 지켰고, 그가 거듭 일으킨 말썽도 수습해 주었다.
죽은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이 집안을 위해 우물 속 악령이 풀려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더 이상 현덕비로 살고 싶지 않았다.
맏누이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 부적을 향해 뻗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선 왕비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왕비는 우물 밑에 무엇이 억눌려 있는지도, 부적을 떼어 내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일을 처리해 온 습관대로라면 즉시 소리 내어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스스로를 놓아주기로 결심한 홀가분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평생 남들이 정해 놓은 대로 살아왔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왕비도 가문이나 천하, 그 어떤 대의를 내세워 다른 여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적에 닿았다.
“찌익” 하는 소리가 났다.
부적이 찢겨 떨어졌다.
우물 밑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졌다.
음산한 바람이 황폐한 정원을 휩쓸고, 마른 가지들이 거세게 흔들렸으며, 남은 부적들도 바람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부적은 재로 변해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흩날려 떨어졌다.
그녀는 우물 속의 것을 다시 보지 않았다.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저 몸을 돌려 황폐한 오솔길을 따라 정원의 뒷문으로 걸어갔다.
친정에 왔던 그날 밤, 그녀는 정문으로 들어왔다.
의장 행렬이 수 리에 걸쳐 이어졌고, 북소리와 음악이 하늘을 울렸으며, 모두가 길 양옆에 무릎을 꿇고 마마 천세를 외쳤다. 그녀는 구슬발 뒤에 앉아, 제 집에도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이제 떠나는 길에는 의장 행렬도, 배웅하는 사람도 없었다.
외로운 혼 한 줄기만 잡초가 무성한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뒤에 여전히 자신을 보아 준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왕비는 그녀를 총애를 잃은 마마로 여기지도, 더 이상 가문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없는 도구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 버티다가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한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뒷문 앞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왕비가 뒤에서 소매를 여미고 그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마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한때 가문에게 도구로 취급받았던 한 여인으로서, 다른 여인에게 말없이 작별을 고했다.
그토록 오래 버텨 줘서 고마워요.
이제는 가도 돼요.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어깨에서는 서서히 힘이 풀렸다.
생전 마지막으로 친정에 왔을 때, 그녀는 정문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의장 행렬에 둘러싸여 궁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하인과 여종들이 드나드는 뒷문으로 떠나기를 선택했다.
뒷문의 널빤지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있었다.
그녀가 살짝 밀자 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궁궐 담장이 없었다.
의장 행렬도 없었다.
적장녀로서, 맏누이로서, 혹은 현덕비로서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문턱을 넘었다.
그녀의 모습은 반쯤 무너진 뒷문을 지나, 점차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미 가문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다.
그들을 위해 한 번 죽기도 했다.
이번에는 부모가 보내는 것도, 황명을 받들어 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누군가를 위해 살길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떠나고 싶었다.
우물 밑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이어졌고, 황폐한 정원 깊은 곳에서도 무언가 깨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왕비는 남아서 살펴보지도, 그 부적을 다시 붙이지도 않았다.
이 정원에 묻힌 빚은 끝내 빚진 사람이 갚아야 했다.
그녀도 왕비도 더는 이 집안을 대신해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한 사람은 살아 있을 때 가문이 정해 놓은 길에서 벗어났다.
한 사람은 죽은 뒤 가문이 억지로 지운 짐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 두 사람 모두 더는 누군가의 두 번째가 될 필요가 없었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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