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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어둠의 나라-적인가 아군인가(12)

【적인가 아군인가】

그 시각, 의료센터의 반대편에서는 바이솽이 그 여자 연구원의 안내를 받아 한 걸음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복도의 조명은 눈이 부시도록 밝았지만,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까지 몰아내지는 못했다.

여자 연구원의 걸음은 뻣뻣했고 호흡은 흐트러져 있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바이솽이 아직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하지만 운명은 바이솽에게 한 줄기 기묘한 행운을 내준 듯했다.

──아니,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이어폰으로 무전기 채널을 듣고 있던 구로다 레이지가 차가운 잡음 속에서 마침내 표적의 위치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의 입가에 미세하고도 뒤틀린 웃음이 스쳤다. 피에 굶주린 사냥개가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그가 손끝으로 우산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움켜쥐자 우산살에서 ‘딱’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주변에서 태연한 척하던 연구원들은 그의 시선이 스치는 순간 저마다 몸을 피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걸음은 가볍고 유연해졌고, 저승의 강을 지나는 사신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편 바이솽은 내부가 완전히 가려진 연구실 앞으로 안내되었다. 문패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고, 주변 감시 카메라들은 모두 렌즈를 돌려 출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여자 연구원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목구멍 속 공포를 더는 억누르기 어려워 보였다.

“당신의 자료는…… 반드시 여기서 분석해야 해요.” 그녀는 망설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더니 제안했다. “차라리 USB 메모리를 제게 주시겠어요? 그러면 적어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어요.”

바이솽은 대답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인적 없는 통로에서 그녀의 표정은 한층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입술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협박당하고 있군요, 그렇죠? 내가 넘겨주지 않으면…… 저 문 뒤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뭐죠?”

여자 연구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쉰 목소리로 경고했다. “바이솽 씨……” “문 뒤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건 죽음이에요……”

곧이어 여자 연구원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꼭 맞잡고 간청했다. “그러니 USB 메모리를 제게 주세요. 어서요…… 그래야 한 가닥 살아날 길이라도 있어요.”

“한 가닥 살아날 길?” 바이솽은 서서히 냉소를 띠었다. 말투는 몹시 차가웠다. 그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내 생각은 다른데요. 아마 병동 쪽에서도 당신들의 진짜 표적──프랑켄이 벌써 정체를 들켰겠죠. 안 그래요?”

여자 연구원은 온몸을 떨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잘 몰라요. 그건 ‘다른 사람의 임무’예요…… 저는 명령을 받고 당신을 여기로 데려왔을 따름이에요. 다, 당신은 USB 메모리만 넘겨주면 돼요……”

바이솽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뿌옇게 가려진 자동문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순진하시네요. 은환 의회는 자선 단체가 아니에요…… 자료를 넘겨주면 그들이 우릴 놓아줄 것 같아요?”

여자 연구원은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공기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이솽은 고개를 돌려 연구실 부근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미 한 발을 함정에 걸친 상태였다. 가장 좋은 상황은 외부의 힘이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탈출에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연구실 문 뒤에서 아주 희미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바이솽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너무도 익숙한 소리였다——총기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

그녀가 침을 삼키자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좁아졌다. 함정을 설계한 자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었다.

그 연구실의 두꺼운 자동문 뒤에는 은환 의회의 암살자 십여 명이 이미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수 제작된 검은 방탄 전술복을 입었고, 가슴에는 은빛 고리 모양 휘장이 박혀 있었다. 대화도, 거친 숨소리도 없었다. 마스크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숨결과 장비 외장의 차가운 금속빛만이 감돌았다.

그들의 총구는 모두 문을 향하고 있었고,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멈춘 채 문이 열리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솽과 여자 연구원이 서 있는 복도도 소리 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 분주해 보이던 ‘연구원들’의 움직임이 이제는 기묘하리만치 일사불란했다. 누군가는 손에 잡고 있던 장비를 껐고,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벽의 잠금 제어 패널을 눌렀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몇 명이 몸을 돌리자 옷깃 아래로 검은 전술 장비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바이솽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자신이 포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곁눈질로 모퉁이의 그림자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묵직하면서도 소리가 없었다.

공기 속에 감도는 압박감이 조금씩 퍼져 나가며 짙은 안개처럼 복도 전체를 집어삼켰다.

바이솽은 안주머니 속 USB 메모리를 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에는 연구실에 매복한 암살자들, 뒤에는 의회의 위장 부대. 이거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네……’

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조용히 도착한 구로다 레이지가 그녀의 바람대로 본의 아니게 교착 상태를 깨뜨렸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그는 연구원으로 위장한 무장 부대와 맞닥뜨렸고, 바이솽을 양쪽에서 포위하려던 그들의 대형은 강제로 흐트러졌다.

그런데 정작 구로다 레이지는 그들을 완전히 무시했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대의 뒤편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그의 관심은 오직 연구실 문밖에 있는 바이솽에게만 향해 있었다.

구로다 레이지는 오른손으로 백골 우산 손잡이를 쥐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조금 힘을 주었다. 순수하다 못해 거의 병적인 살의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참지 못하고 들썩이는 그의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우산 손잡이 안의 세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마음만 먹으면 다음 순간 주변의 모든 사람의 배를 갈라 내장을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의 바이솽은 즉시 그 살기를 느꼈다. 차가운 손바닥이 뒷목을 가볍게 쓸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녀가 곧장 뒤를 돌아보자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구로다 레이지와 눈이 마주쳤다.

구로다 레이지의 눈빛은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을 만큼 차가웠고, 바이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 녀석도…… 저 매복한 놈들처럼 나를 노리는 거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말투에는 믿기 어렵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곁에 있던 여자 연구원은 이미 그 기세에 질려 다리가 풀려 있었다. 구로다 레이지의 눈빛에 영혼마저 송두리째 빠져나간 듯, 도망치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바이솽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늘 팀의 두뇌 역할을 맡던 그녀는 금세 계책 하나를 떠올렸다. 곁에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여자 연구원을 바라보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보죠──저 사람이 대체 적인지, 아군인지.”

말이 끝나자마자 바이솽은 한 줄기 흰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여자 연구원의 주머니에서 출입증을 낚아채 연구실 문의 인식기에 정확히 갖다 댔다.

출입증이 인식기에 닿아 출입 권한이 확인되자 연구실의 자동문이 곧바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십여 개의 총구가 동시에 올라가며 출입구를 완전히 겨누었다. 바이솽은 거의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이며 여자 연구원을 힘껏 옆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문 옆의 아주 좁은 사각지대에 바싹 붙어 섰다.

바이솽이 재빨리 문 안을 훑어보았다. 예상대로 연구실에는 의회의 정예 살육 부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노리며 ‘사냥감’이 시야 안으로 한 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그들은 발포할 기회를 놓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이솽이 아니라 이미 세검을 뽑아 들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구로다 레이지였기 때문이다.

강렬한 압박감이 순식간에 찬바람처럼 밀폐된 연구실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치명적 조우에 정예 부대의 움직임과 계획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들은 초조해하고 당황하며 서둘러 상부에 보고했다. 그때까지도 주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던 구로다 레이지는 마침내 무전기에서 잔혹한 진실을 들었다.

“어째서 혈족의 앞잡이가 여기에……”

“상관없다. 저놈은 이미 버리는 패야. 위에서 벌써 명령이 내려왔어……”

“저놈도 함께 죽여라——혈족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그 순간 구로다 레이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동공이 칼날처럼 좁아졌고, 이내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얼굴에는 분노도 놀라움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조차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소름 끼칠 만큼 지극히 평온한 눈빛이었다.

그는 무기를 점검하듯 손에 든 백골 우산과 세검을 한 번 돌렸을 따름이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바이솽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렇군. 내가 배신당한 건가……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장례식에 초대받은 모양이군.”

벽에 기대 있던 바이솽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예상한 가장 좋은 상황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천천히 모자챙을 들어 올리고 다시 구로다 레이지와 눈을 맞추었다.

“장례식?” 그녀가 경멸 어린 말투로 말했다. “적어도 쓰러지는 건…… 내가 아닐 거야.”

그때 연구실 안에서 폭우처럼 총성이 쏟아져 나왔다. 총구의 섬광이 공간 전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탕! 탕탕탕!

구로다 레이지의 반응은 보통 인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왼쪽 손목을 떨자 백골로 된 검은 우산이 거세게 펼쳐졌고,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기이한 방패벽으로 변했다.

팅! 팅팅팅팅!

총알이 유성우처럼 우산 표면을 때렸다. 탄환 하나하나가 부딪치며 튀기는 불꽃에 눈꺼풀이 따갑도록 아팠다.

바닥에 떨어지는 은빛을 본 바이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 탄환을 쓰다니…… 역시 의회의 정예들이군!” 그녀가 놀라서 말했다.

은제 탄두를 대규모로 사용할 수 있는 부대는 극히 드물었다. 의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사냥 부대만이 그것을 지급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상층부가 이종족과 배신자를 제거하는 데 쓰는 냉혹한 사냥개들이었고, 한 부대만 출동해도 병원 전체를 죽은 듯 고요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바이솽은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양복 입은 녀석이 여기서 죽으면 내게는 조금도 득이 없어. 저 녀석이 버티지 못하면 이 암살자들은 바로 나를 갈가리 찢을 거야……’

의회의 정예들이 연구실 안에서 밀물처럼 밀고 나왔다. 소총의 총구에서는 치명적인 냉기가 번뜩였다. 구로다 레이지는 우산으로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거센 화력에 밀려 한 걸음씩 물러났고, 구두 굽이 바닥에 갈리며 귀를 찌르는 소리를 냈다.

바이솽은 곁에 있던 여자 연구원의 비명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외투 안에서 은색 금속 통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몸을 낮추어 벽에 붙은 채 측면으로 다가가 기습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가 팔을 휘둘러 통을 앞쪽으로 던졌다. 금속 통은 공중에서 회전한 뒤 바닥에 떨어졌고, 다량의 유독성 액체가 터져 나왔다. 액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라 앞줄의 암살자들에게 쏟아졌다.

액체가 피부와 옷, 장갑에 닿자마자 흰 연기가 피어올랐고, 부식되는 ‘치익치익’ 소리가 났다.

이것은 바이솽이 특별히 제작한 무기였다. 어둠의 생물과 인간을 동시에 상대하기 위해 성수를 바탕으로 강산을 혼합한 것으로, 그 위력은 어떤 화학 용제보다도 잔혹했다.

액체가 튄 암살자들은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방어구가 순식간에 부식되어 구멍이 뚫렸고, 바로 다음 순간 살과 피가 녹아내리듯 무너져 떨어졌다. 그들은 고통에 무릎을 꿇고 경련했고,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이어 바이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빛으로 재빨리 네 발을 더 쏘았다. 상대를 좀처럼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는 그녀는 그 고통을 깔끔하게 끝내주었다.

곧 공기 중에는 화약과 탄 살점이 뒤섞인 코를 찌르는 냄새가 퍼졌다. 남은 암살자들은 즉시 흩어져 엄폐물을 찾았다. 상황이 잠시 혼란에 빠지자 바이솽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반대편으로 굴러 위치를 바꾼 뒤 제압 사격을 가했다.

바이솽의 공격으로 정예 부대의 맹렬한 화력이 순간적으로 약해지자 구로다 레이지는 마침내 숨 돌릴 틈을 얻었다. 그가 오른쪽 손목을 들어 올리자 우산 아래의 세검이 일격을 준비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귀신처럼 움직여 미처 피하지 못한 의회의 암살자에게 바짝 다가갔다.

서늘한 빛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칼날을 따라 피가 샘처럼 솟구쳤다. 어두운 복도에서 그것은 산산이 부서지는 붉은 눈송이 같았다.

구로다 레이지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내딛고, 빠르게 이동하고, 손목을 돌려 베어 내렸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암살자의 경동맥도 같은 동작에 끊어졌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그의 살육은 생명의 운율에 맞추어 발을 디디는 무용수처럼 우아하면서도 끔찍했다.

하지만 의회의 부대가 전부 나선 것은 아니었다. 복도 모퉁이의 무장한 연구원들은 이제 막 명령을 받고 끊임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들어 바이솽과 구로다 레이지를 앞뒤로 협공할 준비를 했다.

뛰어난 기량을 지닌 두 사람을 상대하는 의회 부대는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도 여전히 몹시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다만 실력을 훨씬 더 깊이 감춘 세 번째 인물을 놓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경고가 나오기도 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 머리 위의 복도 조명이 갑자기 꺼졌다. 흰 가운을 입고 연구원으로 위장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어둠에 삼켜졌고, 당황한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만 남았다.

곧이어——어둠 속에서 날쌘 빛줄기 두 개가 번뜩이며 깊은 곳에서부터 정적을 갈랐다.

비명과 핏물, 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뒤엉켜 갈가리 찢기는 교향곡을 이루었다. 누군가는 짧은 창에 가슴이 꿰뚫렸고, 누군가는 거꾸로 쥔 단검에 목의 기도가 잘렸으며, 누군가는 투구가 발에 한 번 짓밟혀 박살 나 뒤통수 전체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육안으로 포착할 수 없는 형체 하나가 어둠 속을 귀신처럼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발걸음은 가볍고 빨라 중력에 얽매이지 않는 듯했다. 몸을 돌릴 때마다 핏빛이 튀었고, 도약할 때마다 죽음의 무대에서 홀로 춤추는 것 같았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바닥에는 네다섯 구의 시신이 뒤틀린 채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 서늘한 빛이 멈추고서야, 가냘프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영 하나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짙붉은 긴 머리카락이 선혈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앞머리는 굳세고 차가운 눈빛을 가리고 있었고, 손에 든 짧은 창과 단검에서는 적들의 꺼져가는 목숨이 여전히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타난 이는 바로 엘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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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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